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4
ㅡ 삼국통일의 시대 6 ㅡ
(수나라 113만 대군의 진실은?)
앞 편에서 <수나라 113만대군의 진실?>에 대해서 한 편으로 자세히 정리하겠다 했다.
나 또한 궁금했다. 수나라는 당시 상황에서 113만이라는 병력동원 이 가능했을까?
그래서 오늘은 수·당 고구려 전쟁 편을 쓰면서 궁금하게 느껴었던 병력동원 수에 대해서 자세히 정리하겠다.
사실 '고대전쟁사'를 살펴보면 어지간 전투에서는 <백만대군>이 출병했다고 칭한다. 중국 삼국지 나 역사서를 봐도 백만대군이란 말이 너무 흔히 나온다.
'수양제'가 113만 대군을 동원 했다는 것은 실제 역사서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구당서>(당나라 시대 기록된 역사서. 후에 신당서가 나와 구분하기 위해 구당서라 함)
와 <자치통감> (중국의 역사가 사마광이 편찬한 역사서) 같은 사서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대사서들은 전쟁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병력 규모를 과장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승패를 과시하거나 상대방 저항을 부각 하기 위해 숫자를 부풀렸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이런 의미에서 수양제 113만이란 숫자는 당대 인구나 군사체계로 보았을 때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113만 병력 대군이 출전하는데
병참, 장비공급, 보급문제등을 고려하면 실제로는 300만 명 정도 인원이 움직여야 한다. 지금의 부산시 전체 인구 정도 이다.
'여수(고구려 수나라)전쟁' 당시 수나라와 고구려 총인구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역사적 기록과 추정치를 통해 대략적인 규모를 유추할 수 있다.
수나라는 중국대륙을 통일한 거대제국이었고, 당시 인구는 대략 '4,600만 명' 정도로 추정 된다. 이는 '수서(수나라에 관한 역사서)'와 같은 사서에 기반한 추정치로, 당시 중국은 농업 생산력이 높고, 광대한 영토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 인구규모를 유지할 수 있었다.
고구려 당시 인구는 수나라에 비해 비교도 안 될 정도 적었으며 일반적으로 200만~300만 명 정도로 추정한다.(고구려 멸망 당시 가구 수가 '60만호'라는 기록이 남아 있음, 당시 한 호당 4~5명이 살았을 것이라 추정) 고구려는 영토가 넓었지만, 기후가 상대적으로 춥고 농경지 면적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인구가 수나라에 비해 훨씬 적었다.
당시 고구려의 동력 가능한 총병력은 약 10만~15만 명으로 추정된다.
수나라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였으며, 대규모 군대를 조직하고 동원할 수 있는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13만 명이라는 숫자는 당시 수나라 국력이나 병참능력 으로도 지나치게 과도한 수치로 보인다. 수나라 인구가 4600 만명이라 하지만 여성, 아이들, 노인들 빼고 성년남자 총인구 5분의1 정도가 고구려 침략에 어떤 형식이로든 참여 했다는 말이 전혀 현실적이지 않다. 그래서 역사학자들은 <중국 정통사서인 '구당서'나 '자치통감' 기록의 신빙성을 믿어 준다해도 113만 대군은 병참보급 및 지원 인력을 포함한 숫자라고 보고 있다.
역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수나라 <실제 동원병력이 30만~50만> 정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이는 당시 병참지원 능력과 인구 비율에 기반한 추정이다.
이 병력도 고대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서구를 지배한 '로마'도 병원동력 능력이 '십 만'을 넘지 않았다.
서구 고대사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동원한 전투로 알려자 <테르모필레 전투>(기원전 480년, 우리에게 영화 '300'으로 알려진 전투)에도 당시 페르시아 군은 약 100,000~150,000명
(헤로도토스는 200만 명으로 기록했으나, 이는 과장된 수치로 여겨짐)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그리스군은 약 7,000명 정도 (레오니다스 왕이 이끈 300명 스파르타 병사 + 연합군 포함)로 보고 있다
이와같이 수나라 고구려 침략당시 적게 잡아 30만이라는 이 숫자 역시 당시로서는 엄청난 큰 규모 였으며, 고대 세계사적으로도 유례없는 가장 큰 규모 병력동원 이었다.
<백만대군>이 가능해진 것은 현대에 들어와 세계 1,2차 대전이 터지고 나서였다.
세계 역사상 가장 많은 병력이 동원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벌어진 <스탈린그라드 전투>(1942년 8월 ~ 1943년 2월)로 꼽힌다. 이 전투는 독일군과 소련군 사이에서 벌어졌으며, 약 20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독일 및 동맹군이 약 110만 명 소련군이 약 120만 명 정도였다
어쨋든 수나라 수 십만 병력은 고구려에게는 엄청난 두려움과 위협을 주었을 것이다. 그래도 쫄지않고 그 많은 대군을 물리친 고구려가 정말 대단했다.
여기서 살수대첩(612년) <30만 대군 몰살>에 관해서도 알아보자.
당시 수나라가 고구려에 보낸 별동정예군대는 병참과 보급문제 때문에 실제로 30만 명을 운용 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역사학자들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피해 규모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일부 역사학자는 사망자가 30만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적은 수였을 것으로 본다.
그 이유는 살수대첩 후에도 수나라는 군사력을 유지했고, 바로 다음 해 또 다시 대군을 이끌고 두 번이나 고구려를 침략한다. 그리고 618년에 당나라로 교체되기까지 국가가 붕괴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주장에 힘을 실어준다. 아마 살수대첩에서 30만 대군이 몰살 되었다면 수나라는 그 직후 멸망했을 것이다.
상식적으로도 하나의 강에서 어떻게 30만을 몰살 시킬 수 있겠는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대군이 전멸했다는 기록은 주로 중국과 한국 역사서에 언급되어 있지만, 그 규모와 전멸 정도에 대해선 역사서와 역사학자 사이에서 논란이 있다.
우리나라 역사서 <삼국사기>에는
살수대첩과 관련하여 수나라의 군사규모를 약 30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권 47 열전 7 고구려 열전에 따르면, 수나라 양제가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을지문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 의해 크게 패배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중국 기록 <수서>(隋書)(중국에서 편찬된 수나라 역사서)에서는 수나라 패배를 인정하지만 구체적인 숫자나 전멸에 대한 기술은 다소 축소되거나 모호하게 언급된다.
<자치통감>에서도 살수대첩을 언급하며 수나라가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심각한 패배를 겪었다고 기록했지 30만이라는 숫자나 다른 숫자도 나오지 않는다
<30만 대군 전멸>이라는 표현은 시간이 지나서 우리나라 측에서 전투의 극적인 결과를 강조한 표현으로 보인다.
실제로는 병사 대부분이 살수에서 익사하거나 고구려군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그러나 그 숫자가 30만은 아니고 모든 병사가 몰살당한 것도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일부병력은 패주해 본국 으로 돌아갔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은 고구려 전략적 승리를 강조하고, 수나라 대대적 침공 실패를 알리기 위한 당시 기록적 과장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승전국인 고구려와 패전국 수나라 양쪽 모두 자신 기록에 왜곡된 요소를 남겼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더욱 복합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요약하면, 살수대첩 에서 수나라 대군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로 보이지만, <30만 몰살>이라는 주장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당시 고대 상황에서는 장기간 원정을 유지하면서 실제로 작전에 투입된 병력은 20만 명 내외가 가능했다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 이다.
그래서 당나라 고구려 침략도 적게는 20만 많게는 50만까지 보지만 20만이 적당할 것이다.
안시성전투도 위와 같은 상황과 비슷하게 추론하면 될 것이다
이러한 병력 숫자 부풀리기는 고대뿐만 아니라 중세까지 이어진다.
100만대군"은 역사적 맥락에서 종종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기록 속에서 과장된 병력 규모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언급되었다.
특히, 고려와 몽골, 여진, 일본과 전쟁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며, 조선시대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에서도 이와 비슷한 표현이 사용되곤 했다.
'100만'이라는 숫자는 단순히 '매우 많다'는 뜻으로, 구체적인 병력의 수보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아야 한다.
확실히 증명된 몇 가지 역사적 사례를 살펴보자.
1. 몽골 침략: 몽골 제국의 대군은 고려를 침략할 때 자주 언급되었는데, 기록에서는 "수십만 대군"으로 기술되지만, 실제로는 이를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기껏해야 3~ 4만 이었다.
2. 임진왜란: 일본군 침략을 묘사할 때도 "100만 대군"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일본군 상륙 병력은 약 15만 명 수준이었다.
3. 병자호란: 청나라 군대 경우도 "수십만 대군"으로 표현되지만, 학자들은 실제 병력은 10~13만 정도로 추정한다.
이처럼 고대나 중세사회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식량, 장비, 보급 등을 고려할 때 실제로 1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을 동원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당시 병력규모는 일반적으로 수만에서 최대 수십만 정도에 그쳤으며, 이를 기록하면서 숫자를 부풀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100만대군>은 실제 병력규모를 나타내기보다는, 위기감과 전쟁의 중대함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다.
윗 이야기들과 별개이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나라와 많은 병력이 한데 어울려 싸웠던 전쟁은 6.25 전쟁이 아닐까 한다.
중국군이 가장 많이 한반도에 들어온 것도 6.25 전쟁이다. 6.25 전쟁 중 총동원된 중공군 숫자는 실제로 100만명이 넘는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