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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과 골품제도

작성자박철홍|작성시간24.11.26|조회수108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86

ㅡ 삼국통일의 시대 8
(선덕여왕과 골품제도)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632 647년)은 신라 제27대 왕이자 진평왕과 마야부인 딸이다. 이름은 덕만이며 역사서에는 모두 선덕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제37대 선덕왕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선덕여왕으로 부른다.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명민했다고 전한다.

우리 역사 속에는 '善德'이라는 이름 그 자체처럼 '세종대왕' 버금가는 선한 왕으로 기억된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아주 긍정적으로 그리고 있다.

과연 선덕여왕이 그러하기만 했을까? 차츰 알아보기로 하자.

어쨋든 '선덕여왕'은 신라 제27대 왕이자, 신라 최초이자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 여왕이다. 이후에도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신라에서만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나왔을 뿐이다. 신라 이외는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에서는 여왕은 없었다.

이처럼 신라에서만 여왕이 즉위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였을까?

당시 신라 나름 여러 이유가 있었겠지만 몇 가지만 살펴보자.

1. 신라 특유 독특한 '골품제도'와 왕위계승체계에 기인한다.
신라는 엄격한 신분제인 골품제도 를 운영했다. 신분은 크게 '성골', '진골', 그리고 '6두품' 이하로 나뉘었으며, 왕위는 성골에서만 계승될 수 있었다. 성골은 왕족 중에서도 부모 양쪽 다 순수한 왕족 혈통을 가진 계층이다.
성골 인구가 줄어들면서 왕위 계승 후보군이 점점 제한 되었다.
신라 왕족 '근친혼'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나친 근친혼은 한계가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성골 계층이 거의 소멸하여 선택 가능한 왕위 계승자가 줄어 들었다. 이로 인해 여성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상황 이 발생했던 것이다.

2. 신라에서는 여성이 비교적 높은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 기반이 있었다.
예를 들어, '화랑도' 조직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함께 활동하며 정치와 군사적 리더십을 발휘 했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 덕분에 여왕 등장이 비교적 수용되기 쉬웠다.

3. 신라사회에서 불교가 널리 퍼지며, 여성 통치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상적 토대가 형성되었다. 불교에서는 여성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사상이 있었기 때문에, 여왕의 즉위를 종교적 관점에서도 정당화할 수 있었다.

4. 왕위 계승 과정에서 내부 혼란을 방지하고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왕족 중 가장 적합한 인물이 여성이더라도 즉위시켰다.

이러한 신라의 독특한 사회적, 정치적 환경 덕분에 동아시아 역사에서 보기 드문 여성 통치자가 배출될 수 있었다.

물론 반대도 있었다.

사실 신라 전례를 따져본다면 원래 신라에선 아들이 없거나 있어도 문제가 있다면 딸이 아니라 사위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 이사금, 내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이 그랬다

그래서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년인 진평왕 재위 53년의 여름 5월에 대규모 반란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칠숙·석품의 난' 이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진평왕' 말년 신라 최초의 모반사건인 '칠숙의 난'은 선덕여왕의 즉위를 저지 하려는 시도였다고 주장한다.

선덕여왕 업적에 본격적으로 들어 가기 전 앞으로 신라 역사를 좀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라 특유 신분제도인 <골품제도>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먼저 '골품제도'를 자세히 설명하고 가겠다. 학창시절 국사시험에서도 단골출제 문제였다.

신라 '골품제도'는 신라에서 정치적, 사회적 위계질서를 정하기 위해 만든 특유의 신분제도다.

이는 신라의 귀족제와 연결되어 있으며, 개인 출생과 혈통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었다. '골품제'는 신라사회를 유지하고 계층 간 역할을 분명히 하려는 목적에서 사용되었다. 하지만 갈수록 계층간 이동통로가 완전 폐쇄되어 신라를 패망의 길로 들어 서게 했다.

주요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골(骨)

골은 왕족계열 신분을 나타낸다.

ㅡ 성골(聖骨):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최고신분. 초기신라에서 왕위는 성골 내에서만 계승된다. 하지만 '진덕여왕' 이후 성골이 단절되며 없어졌다. '김춘수'가 최최로 진골출신으로서 '무열왕' 이 되었다

ㅡ 진골(眞骨): 왕족이지만 성골보다 낮은 계층이다. 부모 중 한 쪽만 성골인 경우다. 왕위 계승권을 가지며, 고위 관직에 오를 수 있었다. 성골체제가 사라진 이후 신라 최고지배층을 형성했다.

2. 품(品)

골보다 낮은 계층으로 일반 귀족과 평민을 포함하며, 총 6등급으로 구분되었다.

ㅡ 6두품: 고위 관직 진출이 가능한 신분이다. 진골보다는 낮지만 사회적, 문화적 역할이 컸다. 통일신라말기 6두품들 반란으로 신라가 패망의 길로 들어 선다. 그리고 이들이 지방 호족화 된다.

ㅡ 5두품: 중위 관직에 진출 가능하며, 6두품보다 권한이 제한되었다.

ㅡ 4두품: 주로 하위 관리직을 맡았다.

ㅡ 3두품 이하: 일반 평민이나 농민계층. 관직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했다.

3. 골품제도의 특징

ㅡ 혈통 중심: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태생과 가문에 따라 신분과 역할이 결정되었다.

ㅡ 사회적 제한: 관직, 결혼, 복식, 주거 등 모든 생활영역에서 신분에 따라 엄격한 제한이 있었다.

ㅡ 왕권 강화 도구: 왕권과 귀족 사이의 위계를 명확히 하여 통치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4. 한계와 붕괴

신라말기에 들어 골품제는 점차 한계를 드러냈다. 신분제한으로 인해 사회적 유동성이 부족했고, 새로운 계층 요구를 반영하지 못해 국가체제에 균열이 생겼다. 이는 호족세력 등장과 신라멸망 원인이 되었다.

골품제와 함께 당시 신라를 움직이던 또 다른 제도가 있었다. <화랑제도>였다.

글이 길어지니 <화랑제도{는 다음 편에서 다루겠다.

이어서 <선덕여왕 업적과 화랑제도>가 계속됩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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