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26
ㅡ 후삼국시대 (889~936) 3 ㅡ (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 편)
궁예!
요즘 현대식 이름으로는 듣기 어려운 이름이지만, 어찌보면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 속에서 가장 깊이 새겨둘 이름이다.
후삼국시대 후고구려를 창건하고 스스로 '미륵'을 자처했던 '궁예'란 인물이 어쩌면 우리나라 최초로 밑바닥으로 부터의 혁명을 일으켜 새로운 왕조를 일으킬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 이었는지도 모른다.
궁예의 탄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지만(신라왕실 후손이었다) 그 당시 궁예는 잡초 같은 완전 민초였다.
궁예는 정처없이 떠돌다가 우연히 '기훤'이 두목으로 있는 도적의 무리로 들어 간다. 당시 도적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도적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통일신라 말기 는 조선말기와 비슷했다. 즉
<흩어지면 백성이고, 뭉치면 도적이 되던 시절이었다>
그리고 궁예는 '기훤'에게서 떨어져 나와 당시 북부에서 가장 큰 세력이었던 '양길' 밑으로 들어 갔다. 이후 양길에서 떨어져 나와 힘없는 농민과 도적무리 그들과 힘을 모아 양길군대를 물리치고 '후고구려'를 건국한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 오천년 역사상 '궁예'말고는 찾아 볼 수 없다.
중국만 해도 漢나라를 건국했던 유방, 明나라를 세웠던 주원장 등이 시정잡배출신 건달아니면, 거지출신이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안타깝게 궁예라는 걸출한 인물이 그들이 쌓아온 기득권 상실을 우려한 왕건을 필두로 한 호족 세력에 의해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고 만다.
물론 '태조왕건' 대하드라마에서 보듯이 '궁예'란 인물에 개인적인 문제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핵심은 미륵세상을 부르짖으며 백성들에 의한 나라를 꿈꾸었던 '궁예'를 그 당시 사회 주류이면서 기득권 세력이었던 '왕건'을 중심으로 한 호족연합 세력이 자기들 기득권 상실을 우려해서 힘을 모아 제거 한 것으로 보여진다.
6두품 세력은 통일신라 시대 주류는 주류였지만 그들 성골, 진골이라는 왕족보다 못했던 계층 으로 호족세력과 함께 기득권층 주류로 봐야 한다.
궁예를 제거하고 고려를 창건한 '왕건'과 '호족연합세력'에 의해서 '후삼국'이 통일 되어 '고려'가 건국된 것이다.
그럼 '궁예' 생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 보자.
궁예(弓裔, 869년~918년)는 후고구려(훗날 태봉)의 초대 국왕으로, 후삼국 시대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다.
설화에 따르면, 궁예는 신라 왕족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태어나자 마자 버려져 절로 보내졌다 한다. 궁예 아버지는 신라왕족이었으며 궁예가 태어날 당시 왕위계승을 둘러싼 음모가 있었고,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강한 기운을 지녀 당시 왕실에서는 그가 장차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두려워하여, 어린 궁예 눈을 찔러 애꾸눈을 만들어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궁예의 후손을 자처하는 순천 김씨의 세보에는 궁예가 '신문왕' 아들로, 광산 이씨 세보에는 '경문왕' 서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공식적인 역사기록인 '삼국사기,' '삼국유사'에서는 궁예가 신라왕족이었다는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궁예가 신라를 적대적으로 여기고 왕권에 대한 강한 정통성을 주장 한 점은 신라왕실과 관련성을 암시할 수도 있다고는 한다.
'태조왕건' 대하드라마에서도 궁예는 애꾸눈으로 나온다. 드라마에서 황금빛 애꾸눈가리개 궁예상징 처럼 보이게 해 주었다.
궁예가 애꾸눈이었다는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제 존재하니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눈을 잃은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다른 이야기 하나만 더 소개 하자면 (이 설화는 초등시절 교과서에서도 본 기억이 있다.)
[궁예는 태어날 때부터 치아가 자라나 있었다. 게다가 궁예가 태어난 집 위로 흰 빛이 하늘에 뻗치는 등 불길한 징조가 있어 높은 곳에서 던져 죽이려는 것을 유모가 가까스로 받아 데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또 이때 유모가 떨어지는 아기 궁예를 받을 때 실수로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다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궁예는 어린 시절때부터 성격이 괄괄한 탓에 늘 말썽을 피우며 다녔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정도 큰 후 유모가 출생 비밀을 털어놓자 출가하여 세달사(世達寺)라는 절에 들어 가 중이 되었다.
이때 법명을 스스로 선종(善宗)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궁예'라는 이름도 승려생활을 할 때 법명이라는 설도 있다.
궁예는 장성할 때까지 세달사에서 지냈는데, "계율에 따라 주의하지 않고 담기(膽氣)가 있었다"
(여기에 자세히 적을 수는 없지만 궁예 승려시절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한마디로 고기도 마음대로 먹고 계율도 지키지 않았던 땡중이었다.)
삼국사기 궁예 기록을 보면,
[진성여왕 대 일어난 '원종·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신라말기에 각지 에서 반란이 들끓었다.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 각지에서 군벌이 일어나자 궁예는 891년 세달사에서 나와 죽주에서 한창 이름을 날리던 '기훤' 휘하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무술 을 더 단련한 것으로 추정 된다.
세달사는 지금 강원도 영월군으로 추정되는데, 궁예가 더 가까운 북원(강원도 원주시) '양길' 대신 굳이 멀리 '기훤'에게 찾아간 걸 보아 '궁예'가 몸담을 당시에는 기훤이 양길 이상으로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듯하다.
그러나 기훤은 궁예의 재능과 인물됨을 잘 알아주지 않았다. 궁예는 더 이상 그의 휘하에 있어봤자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궁예는 기훤 밑에서 활동하던 <청길, 원회, 신훤> 등과 몰래 친분을 맺고, 892년에 기훤을 떠나 북원에서 위세를 떨치던 양길에게 투항했다.
사극 <태조 왕건>에서는 이를 각색해서 원회와 신훤이 주도하여 폭압적인 행태를 일삼던 기훤을 제거하고 궁예를 새 우두머리로 추대했으나 세력에 한계를 느끼고 그 세력 그대로 더 큰 세력이었던 양길 부장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나왔다.
아무튼 기훤의 부하였던 신훤이 훗날 양길의 부하로 나오는 점을 볼 때 기훤세력이 양길세력에 흡수된 것은 정황상 실제 역사 에서도 맞는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사졸과 함께 고생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 하였다.> 라고 했다. 궁예가 어떻게 민심을 얻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평무사한 궁예 행보는 귀족들 수탈에 질려 있던 백성들에게 환영받았을 것이다.
양길의 부하가 된 궁예는 양길의 병력을 이끌고 892년 까지 치악산 석남사에 머물면서 신라 여러 성을 정복한다.
892년에 궁예는 견훤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실제로는 892년의 견훤은 아직 후백제 왕을 칭하지는 않았고, 내부적으로만 왕이라 자칭하며, 외부로는 아직 신라의 신하라고 주장했다. 공공연히 후백제 왕을 칭한 것은 900년이었다.
견훤의 소식을 들은 궁예는 자신도 자립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여 2년만인 894년에 대관령건너 명주(강릉시) 귀부를 받아냈다. 이 때 궁예를 따라가는 무리가 3천 5백 명이었다고 하니, 기훤에서 양길로 갈아탈 때처럼 양길군 세력 일부를 흡수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 장군을 자칭하며 한때 주군이었던 양길로부터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때 작은 세력에 머물고 있던 패서 호족들은 이미 강원도 넓은 땅을 차지한 궁예 큰 세력을 보고 대부분 순순히 항복했다.
훗날 고려 태조가 되는 '왕건'의 아버지 '왕륭'도 있었다.
궁예는 897년 왕륭 영토인 '송악' 을 수도로 정했고, 그의 아들 '왕건'을 2인자격으로 중용하기 시작한다.
북원의 양길은 궁예 독자 행보에 분노해 경기 남부, 충청 지역 30여 성 병력을 동원해 궁예를 습격하려 했지만 궁예가 이를 예견하고 선제 공격을 가해 양길을 깨트렸다. 그리고 나서 899년에는 본격적으로 양길과 대립하기 시작하더니 '비뇌성 전투'에서 양길군을 완전히 격파 하고 이듬해 900년에는 왕건을 지휘관으로 삼아 청주ㆍ충주에 있던 양길군 잔당 청길(淸吉), 신훤(莘萱) 등을 토벌해 소백산맥 이북 영역을 거의 장악 했다.
궁예는 드디어 901년 스스로 왕위에 올라 국호를 '고려'라 한다.
사실 우리가 현재 부르고있는 '후고구려'라는 명칭은 먼저 고려 나 훗날 왕건이 건국한 고려와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궁예가 살던 당시에는 쓰이지 않은 국호 였다.
고려를 세운 궁예는 개성에 해당하는 '송악'을 수도로 삼았다.
궁예가 '고려'라는 국호를 쓴 것은 송악을 비롯한 경기도 북부지역 과 황해도를 아우르는 패서지역 호족과 백성들은 옛 고구려 남부 지역으로, 고구려 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측면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년 전인 서기 900년에 남쪽에서는 견훤이 백제 계승을 주장하며 후백제 왕에 올랐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아 모방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그리고 그 시절 사실상 고구려계 호족들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왕건은 이 시절 승승장구해 나갔다.
이어서 <왕건의 등장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