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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삼국시대 공방전 5- 고창전투

작성자박철홍|작성시간25.04.11|조회수30 목록 댓글 0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132

ㅡ 후삼국시대 9 ㅡ (후삼국시대 공방전 5 '고창전투'- 고려건국 후 왕건의 첫 대승,)

우리가 '고려건국'과 관련 조금 헷갈려 하는 게 있다.

고려건국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낸 쿠데타를 일으킨 918년 이었다. 그러나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을 실질적 고려건국 으로 보아야 한다는 설도 있다.

918년 vs 936년 고려건국 논란,
단순한 연도 문제가 아니다.

고려 건국시점을 918년과 936년 중 어느 해로 보아야 하느냐는 '국가정체성, 민족단위, 통일의미' 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정치적 건국 혹은 국호선포 중심 건국으로 본다면 918년이 타당 하다.

통일국가로서 완성이라는 의미 건국은 936년으로 볼 수 있다.

결국 이건 '정치적 시발점'과 '지리적·민족적 완성' 중 어디에 무게를 둘 것인가 문제이다.

그래서 역사 교과서나 대부분 공식기록에서는 918년을 고려 건국연도로 하면서도, 936년은 통일을 이룩한 해로 별도 강조해 가르친다.

하지만 진보측 역사학자와 북한은 "진짜 국가의 시작은 민족이 통일되었을 때다"라는 의미로서 936년을 고려 실질적 건국으로 보려는 경향이 더 강하다.

918년은 왕건이 왕조를 세우고, 정치적 기틀은 닦아지만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지 못해 민족적 통일은 미완인 상태로서 완벽한 건국으로 보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시각은 오늘날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도 연결될 수 있다.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은 체제는 갖췄지만 민족전체 대표성은 부족하다는 비판이 있다.

즉 1948년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 과도 맛닿아 있는 것이다.

이를 진보성향이나 북한에서 주장한다해서 조금 사시적인 눈으로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대한민국 헌법 제3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라는 입장을 표현하고, 통일의 당위성과 정당성을 헌법적으로 뒷받침 하지만 한반도 전역을 통일해야 실질적 대한민국이 된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936년을 실질적 고려건국 강조는 역사적 정당성과 민족 단위의 자연스러운 통일이라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다.

통일은 과거로부터 내려온 전통의 계승이며, 한반도 단일국가 체제 복원이라는 이상과도 연결된다.

특히 진보성향 통일론자들은 고려 후삼국 통일을 하나 모델로 삼아, 오늘날 남북한 분단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고려건국 해에 대해 이런 깊은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나도 이번 글을 정리하면서 알게 되었다.

어쨌든 왕건이 918년 고려를 건국하고 930년 '고창전투'까지 12년 동안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르게 왕건은 단 한 번도 견훤을 이기지 못 했다.

사실 견훤이 '공산전투' 대승리 후 더 세게 몰아쳤으면 후삼국 통일 은 고려가 아닌 후백제가 차지 했을만큼 그 시기에는 후백제가 고려를 압도하고 있었다.

고창전투 배경을 살펴보자면
당시 왕건은 신라와 연합 하고자 했고,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에 930년, 견훤은 이를 견제 하고자 2만대군을 이끌고 북상 하여 고려를 공격한다

당시 후백제군이 워낙 기세등등 했기에 왕건은 고창을 포기할 것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지만 희대의 명장'유금필'의 진언에 따라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창으로 진군한다.

유금필 진언을 요약하자면 만약 고려가 '고창'을 포기하면 '상주'를 완전 상실하고 후백제에게 북진 진격로 제공하여 호족들 대이탈이 발생하면 고려가 국가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 고창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고창에는 고려군 고작 3,000명이 주둔 중이었고, 이를 견훤이 이끄는 후백제군, 그리고 속국화된 신라 호족지원군 2만 여명이 포위한다. 그리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달려온 왕건의 고려군과 대치한다.

치열한 전투가 3일 ~ 4일 동안 계속되었다. 초기에는 후백제가 우세했으나, 견훤에게 반감을 가진 고창 일대 신라호족들이 고려 편을 들기 시작한다.

견훤이 927년에 서라벌을 점령하고 경애왕을 죽인 사건에 대해 신라인들은 그때까지도 엄청난 원한을 가지고 있었다.

경애왕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왕비를 견훤이 겁탈하고 서라벌 물자를 대거 약탈, 서라벌 백성을 대거 학살하는 온갖 전쟁범죄를 저질러서 후백제에 대한 신라인들 원한이 매우 컸다.

그래서 속국화된 신라 지원군들은 고창전투 도중에 후백제가 밀리기 시작하자 고려군에 붙어서 후백제 뒤통수를 치기 시작한다.

그틈을 타서 고려에서는 유금필이 '저수봉'으로부터 정예기병을 이끌고 후백제에 총공격을 가해 견훤은 대패한다.

후백제군 전사자만도 8,000명에 달했고 견훤은 겨우 목숨만 건져 후퇴한다.

여기서 우리는 '유금필' 장군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 우리에게 크게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나라 역사상 최강 전투력을 가진 장군 중 다섯 손가락안에 꼽힌다. 따로 한 편으로 정리하려 한다.

이처럼 '고창전투'(高敞戰鬪,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고창동 일대, 전라북도 고창이 아님) 는 고려가 건국이후 후백제를 상대로 거둔 최초의 대승리였다.

고려왕건이 고창전투에서 대승리 함으로써 고려는 한반도에서 정치적 정통성과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하며 본격적인 패권다툼에서 우위를 점해 후삼국 통일과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후대 고려왕조는 이 승리를 기념 안동을 '안동'(安東, 동쪽을 편안하게 하다)이라 명명할 정도 대단히 크게 의미를 둔 전투였다. 지금 '안동' 명칭이 생겨난 이유 이기도 하다.

이후 후백제는 한동안 북진을 멈추고 방어로 돌아 선다.

고려는 군사적 사기를 크게 드높이고 신라와 연합기반을 공고히 하며 본격적인 세력 확장을 꾀하기 시작한다.

고려의 고창전투 대승리는 고려왕건의 본격적인 통일전쟁 서막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어서 <왕건의 통일전쟁과 후삼국통일 편>이 이어집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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