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회원 수필

동해 용왕

작성자김성문|작성시간23.12.12|조회수1,025 목록 댓글 8

동해 용왕

 

김성문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용왕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어떤 모습의 용왕인지 궁금하여 기원정사를 찾았다. 기원정사는 경북 안강에서 포항 쪽으로 자연의 색을 품은 형산강변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형산 북쪽 8부 능선에 있다. 경주시 강동면 국당길 283이다. 도로에서 기원정사까지는 임도로 그렇게 험하지 않고 자동차가 드나들 수 있어서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이다.

 

사찰 이름은 대부분 절 사(寺)자를 사용하는데 정사(精舍)라는 글자가 있어서 의아했다. 그런데 기원정사뿐 아니고 죽림정사란 표현도 간혹 본다. 알고 보니 옛날 인도의 거부(巨富)가 승원을 지어 석가모니 부처님께 기부한 두 곳을 기원정사와 죽림정사라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처음 활동한 곳으로 신성한 이름이다.

 

경주 기원정사는 그 전(前) 이름을 왕룡사원으로 불렀다. 국당2리 회관에서 기원정사까지 가는 길은 주위의 빼곡한 산림이 풍광을 더 아름답게 한다. 정사 입구에 도착하니 다른 절에서 보는 대웅전이 아니다. 영주 부석사의 중심 법당처럼 무량수전이란 현판이 눈에 들어온다. 무량수전은 행복하고 안락한 이상적인 곳을 다스리는 아미타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말한다. 아미타 부처님은 정토 극락세계에 있으며 수명이 끝이 없다고 한다. 법당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공간이 넓다란 법당 상단에는 네 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다. 각 부처님은 자비스럽고 사랑이 넘치는 인자한 모습이다. 바라보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아미타 부처님이다. 합장한 후 마음을 모아 세 번의 큰절을 천천히 했다. 이곳까지 무사히 도착한 것에 대한 감사와 사는 동안 건강하게 살겠다는 약속도 했다.

 

법당에서 나오니 스님 한 분이 가사(袈裟)를 걸치고 앞마당에 들어오고 있었다. 구암 주지 스님이라 한다. 반가움에 인사를 드리고 용왕이 어디 있는지 여쭈니 법당 뒤편 용왕전에 있다고 했다. 용왕전에는 문인상(文人像)인 신라 태종무열대왕(김춘추)과 무인상(武人像)인 흥무대왕(김유신)의 목조 조각상을 모시고 있다고 한다. 문무인상을 기원정사에 모시게 된 연유를 주지 스님께 들었다. 모시게 된 연유가 신기하고 기이하다.

 

옛날 경주 강동면 지역에 형제산(兄弟山)이 가로막혀 물이 흘러가는 강이 없었다. 비가 많이 오면 서라벌까지 물이 차서 수해가 심했다. 김유신은 이 지역에 물이 흘러가는 강을 만들어 수해를 없애기 위해 김춘추와 내기를 했다. 내기는 김유신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면서 형제산을 갈라서 강을 만들기로 하고 만약 만들지 못하면 목숨을 내놓기로 했다. 반대로 용이 되어 강을 만든다면 김춘추가 목숨을 내놓는 내기였다. 단순한 내기이면서 위험한 내기이다. 어느 한쪽은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두 사람의 우정으로 봐서 서로가 죽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김유신은 포항 북구 신광면 쪽에 있는 습지에서 구렁이 모습을 하고 있을 때 지나가는 사람이 자기를 보고 ‘용이다!’라고 세 번 말하는 것을 들으면 용이 되기로 했다. 김유신은 습지에서 구렁이로 변해 있었다. 어느 엄마가 ‘유금’이란 아이를 업고 신광면 시장에 가고 있었다. 등에 업힌 유금이가 한없이 울자, 엄마는 김유신이 구렁이로 화한 습지를 지나다가 깜짝 놀라,

“저 구렁이 좀 봐라.”

울던 유금이는 엄마께,

“용이다! 용이다! 용이다!”

세 번 말하자, 김유신은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면서 형제산을 갈라서 강을 만들었다. 만든 강은 지금의 형산강이다. 은빛 강물은 사연도 모른 체 유유히 흐르기만 한다. 강이 만들어지면서 남쪽에는 꽤 높은 형산이 생기고, 북쪽에는 형산 보다는 낮은 제산이 생겼다. 김유신은 내기에서 이겼다. 김춘추를 죽이지 않고 콧등에 흠만 내었다. 용왕전에 있는 김춘추 조각상 콧등에 자국만 남아 있다. 하늘로 올라간 김유신은 동해에 내려와 용왕이 되었다. 그래서 신라 경순왕은 용왕전을 만들어 김춘추와 김유신을 구리로 조각하여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동해 바닷가 이 지역 어부들은 용왕전에 있는 문무인상에 기도를 드리면 매번 고기가 많이 잡혔다고 한다. 많은 어부가 기도를 위해 용왕전 근처에 있는 유씨(柳氏) 마을을 지나야 했다. 유씨 마을은 지나는 사람들로 시끄러우니까 지나지 못하도록 힘센 머슴들이 문무인상을 형산강에 던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런데 사건이 생겼다. 문무인상을 강에 던진 후에 유씨 마을 사람들은 원인 모르게 많이 죽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점을 치니 문무인상을 형산강에 던졌기 때문이라 했다. 강에서 문무인상을 찾지 못하자 마을 사람들은 200여 년 전에 현재의 목조 문무인상을 조각하여 용왕전에 다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구암 주지 스님은 용왕전에 있는 문무인상에 대하여 잘못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 문무인상은 김유신과 김춘추를 모신 조각상인데 잘못 구전되어 경순왕 조각상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한 경순왕이 형제산을 갈랐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문무인상을 처음 제작하여 모신 이유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나라가 쇠퇴해지자, 나라의 발전을 위해 삼국통일의 주역인 김유신과 김춘추의 조각상을 모시고 나라가 번창하기를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용왕전에 있는 김유신과 김춘추는 포항 시내와 동해를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형산에서 그곳 사람들을 지키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익살스럽고 위엄있는 문무인상에게 나도 모르게 나라의 안녕을 빌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시계방향으로 김유신과 김춘추 조각상,   촬영: 서기 2019.9.8.(일)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김성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2.13 바쁘신데 댓글 감사드립니다.
    연말 마무리 잘 하시고,
    보람된 시간 보내시길 바랍니다!
  • 작성자김남희 | 작성시간 23.12.13 김유신 강감찬 이순신 세 분이 우리나라 최고의 명장이라는 말도 있는것 같던데~^^. 김유신에 대한 글 잘 읽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김성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2.13 강감찬 이순신도 대단한 장군들입니다.
    이 분들이 계셨기에 우리가 존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댓글 감사드립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 작성자(화당) 김복건 | 작성시간 23.12.14 동해용왕이 하늘로 날아오른 신라시대로 여행을 잘 했습니다ㆍ
    사찰의 '사'자가 이상하여 가보셨다는 그곳에 저도 시간 날때 가보겠습니다ㆍ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ㆍ
  • 답댓글 작성자김성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3.12.14 교통이 편해서 쉽게 가실 수 있는 곳입니다.
    경주나 포항 가시는 길에 코스를 잡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법당에 여러 부처님께서 잘 돌봐 주실 것입니다.
    좋은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