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무열대왕 김춘추
김성문
신라 태종무열대왕인 김춘추는 흥무대왕인 김유신이 있었기에 왕이 되고 백제를 멸할 수 있었다. 경주 통일전에 봉안된 태종무열대왕의 표준영정 앞에서 그가 활약한 모습을 떠올린다. 『삼국사기』, 『삼국유사』, 『화랑세기』에서 김춘추를 보았다.
김춘추의 아버지는 김용춘(金龍春)이고, 김용춘은 제25대 진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김춘추의 첫 부인은 보라궁주(寶羅宮主)로 딸 고타소를 낳고 즉시 세상을 떠났다. 그다음 부인은 김유신의 둘째 누이 문희로 문명부인(文明夫人)이다. 문명부인의 아들은 김법민(金法敏), 김인문(金仁問), 김문왕(金文王), 김노차(金老且), 김인태(金仁泰), 김지경(金智鏡), 김개원(金愷元)이고 딸 김지소(金智炤)을 낳았다. 김유신의 첫째 누이 보희는 김춘추의 후궁인 영창부인이다. 영창부인의 아들은 김지원(金知元), 김개지문(金皆知文)이다. 또 다른 서자(庶子)로 김차득(金車得), 김마득(金馬得)이 있고, 딸은 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김춘추의 딸로 알려진 요석공주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풍월주일 때 부제(副弟)로 있었으나 보종과 염장에게 양보하고 나중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는 풍채가 아름답고 빼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세상을 잘 다스리고자 하는 뜻을 가졌다고 한다.
백제의 영특한 왕으로 알려진 의자왕은 재위 2년째인 642년에 윤충(允忠)을 시켜 신라의 대야성을 점령하게 했다. 당시 대야성 군주는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고, 그의 부인은 김춘추의 딸인 고타소였다. 윤충은 김품석이 항복했는데도 부부를 죽여 사비성으로 보냈다. 이 사실을 들은 김춘추는 충격을 받고 기둥에 기대어 서서 온종일 눈도 깜박이지 않았다. 사람이 앞을 지나가도 깨닫지 못했다고 하니 딸의 내외를 잃은 슬픔은 부모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이러한 일로 김춘추는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요청하니,
고구려 보장왕은 김춘추에게,
“죽령은 본래 고구려 땅이니 죽령 서북쪽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어 주겠다.”
라고 하자, 김춘추는,
“임금의 명을 받고 왔는데 사신을 위협하고 겁박하니 그 밖의 사항은 모르겠나이다.”
라고 했다. 보장왕은 김춘추의 말이 불손하다고 오히려 별관에 감금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선덕여왕은 김유신에게 명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달려가게 했다. 김유신의 군사가 고구려 남쪽 국경에 들어서자, 보장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그 후 김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임명받아 군사의 힘을 길렀다.
647년 1월 선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진덕여왕이 왕위에 올랐다. 648년 김유신은 힘을 기른 압량주 군사로 백제에 빼앗긴 대야성을 도로 찾았다. 김유신은 사람을 시켜 백제 어느 장군에게 제의했다.
“대야성 군주였던 김품석과 그의 부인 김 씨의 유해가 너희 나라 감옥에 묻혀 있다. 지금 너희 나라 비장 8명이 잡혀 땅바닥을 기면서 목숨을 구걸하고 있다.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가 되면 머리를 제 살던 언덕으로 향하는 뜻을 생각해서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너희가 죽은 두 사람의 유골을 보내어 살아 있는 8명의 목숨과 바꾸는 것이 어떻겠느냐?”
의자왕은 중상(仲常) 좌평으로부터 김유신의 말을 전해 듣고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파내 나무함에 넣어 보냈다. 이것을 본 김유신은,
“잎사귀 하나가 떨어진들 무성한 수풀에 아무런 영향이 없고, 티글 하나 더한다 한들 태산에 아무런 보탬이 없도다.”
하면서 곧 8명을 살려 보냈다.
654년 3월 진덕여왕이 세상을 떠나자, 김유신과 여러 신하가 2관등인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했으나, 알천이 굳게 사양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오늘날 덕망이 춘추공 만큼 높은 사람이 없다. 실제로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구제할 영웅호걸이라 할 만하다.”
마침내 춘추공을 받들어 왕으로 삼으니,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부득이 왕위에 올랐다.
김춘추가 왕위에 오른 지 2년, 655년 봄에 고구려와 백제 및 말갈의 연합군에 의해 신라는 북쪽 영토를 빼앗겼다. 그러나 3월에 당나라 도독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 중랑장 소정방(蘇定方)의 도움으로 고구려를 물리쳤다. 10월에 왕의 딸 김지소(金智炤)를 김유신에게 시집보냈다.
김춘추가 왕이 된 지 7년, 660년 3월에 당나라 고종이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 김인문을 부대총관(副大摠管)으로 삼아 수군과 육군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치게 했다. 무열왕에게도 우이도행군총관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돕게 했다. 5월에 무열왕은 김유신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라벌을 떠났다. 6월에 현재 경기 이천시에 있었던 군단인 남천정(南川停)에 이르렀다. 소정방은 현재 산둥성 내주(萊州)에서 출발하니 많은 배들이 천리에 꼬리를 달았다. 태자 김법민이 덕물도로 가서 소정방을 맞이했다. 소정방은 7월 10일 사비성 남쪽에 도착해 무열왕의 군사와 합해 사비성을 무찌르겠다고 했다. 태자가 돌아와 소정방의 군대가 매우 성대하고 세력이 강하다고 하자 무열왕은 기쁨에 차서 김유신 대장군, 김품일과 김흠순 장군 등에게 명해 정예 5만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했다. 무열왕은 현재 경북 상주시 백화산 고성으로 비정하는 금돌성(今突城)에 머물렀다. 백제 의자왕은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피해 있었으나 7월 18일 웅진성에서 나와 나당연합군에 항복했다. 무열왕은 의자왕의 항복 소식을 듣고 금돌성에서 사비성으로 와서 군관인 천복(天福)을 시켜 당나라에 소식을 전했다.
무열왕은 백제가 멸하자 661년 5월에 압독주를 대야(합천)로 옮기고, 6관등인 아찬 종정(宗貞)을 도독으로 삼았다. 6월에는 현재 익산시 지역에 있었던 대관사(大官寺)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현재 익산시 금마면 지역인 금마군(金馬郡)에서는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나 되더니, 무열왕은 603년에 탄생하여 58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를 무열(武烈)이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 묘호를 올려 태종(太宗)이라 했다.
태종무열대왕이 없어서도, 흥무대왕이 없어서도 삼국통일이 되었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두 사람이 의좋게 생활하면서 서로가 욕심부리지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해 한평생 몸 바쳤다. 온화하고 위엄있는 태종무열대왕의 영정을 바라보니 그의 호국정신에 고개가 숙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