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망(脉望)이 나타났어
노태맹, 푼크툼PUNCTUM의 순간들, 시와반시 발행(2025).
김인기
바로 지금이 은행나무 잎사귀가 가장 아름다울 때이다. 오늘 2025년 11월 19일 이곳 대구의 거리에서 노란 자태로 선 은행나무 아래 떨어진 잎사귀들을 몇 개 주워 살펴보기도 했는데, 벌레 먹은 자국이 하나도 없다. 지상에 출현한 지도 무척 오래라는 이 나무는 잎이나 가지나 왜 이렇게나 멀쩡할까? 맛이 지독히도 없거나 억지로 먹었다가는 배탈이 나거나. 아마도 이런 이유로 벌레들이 달려들지 않았을 것이다.
노태맹 시인의 평론집 『푼크툼PUNCTUM의 순간들』을 읽다가 갑자기 엉뚱한 생각을 한다. 와, 이건 경이롭다. 마치 전설로나 전해지는 책벌레 ‘맥망(脉望)’을 실지로 발견한 듯하다. 이 벌레는 신선을 뜻하는 글자 ‘仙’ 셋을 갉아먹으면 신통한 능력을 얻는다나 뭐라나 한다는데, 여기 이 책벌레도 바로 이런 부류로 보인다. 손에 맥망을 잡아서 하늘의 별빛에 비춰보면 그 별이 지상으로 떨어진다는 그 이야기나 일부 시인들이 드러내는 몇몇 시편들의 내용은 일맥상통하지 않나 싶다. 시인이 쓴 다음의 글 역시 동일한 범주라 하겠다.
시는 ‘없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긍정이고 그 긍정의 운동이다. ‘있는 것’은 ‘없는 것’에 의존하지만, ‘없는 것’은 있지 않고 없으며, ‘있는 것’은 있다. 시는 그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운동을 표상하는 ‘있음’이다. (17쪽)
이만하면 전설의 그 맥망이 변해서 아무개 시인이 되었다 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하다. 다만 다시 출현한 맥망은 한자 ‘仙’을 갉아먹지는 않았고 하이데거니 벤야민이니 질 들뢰즈니 미셸 푸코니 하는 인물들이 쓴 글들을 마구마구 갉아먹었다. 나는 놀랍기도 하다. 시인은 이 글들을 도대체 무슨 재미로 읽었을까? 아하, 이걸 실지로 열심히 읽는 이들도 있구나. 와와, 이게 무척 반갑기도 하다.
무엇을 읽고자 하는데 그 내용이 어렵다는 것은 곧 내가 아는 것이 그만큼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나는 여기서 배울 것들도 많다. 평소 생각이 이래서 나는 더러 읽기에 버거운 책들을 구해서 애써 읽기도 한다. 이러면 적어도 자신이 겸허해지지는 않으랴.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시인의 평론집을 두고도 왈가왈부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자기가 모르면 그냥 그대로 모른다고 해야지 굳이 억지소리로 떠벌릴 게 뭐 있나?’
이게 상식이다. 그렇긴 한데, 시인의 평론을 읽다 보면, 어쩌면 이게 아닐지 모른다는 의문도 든다. 그러니까 누가 무엇을 안다거나 모른다고 하는 것에도 그 전제가 있고, 이 전제도 비판하기로 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뜻이다. 무엇을 알고 말고 하는 것에도 주체가 있고 객체가 있지 않느냐? 이렇게 따지고 들자, 내가 안다는 것이 꼭 아는 것도 아니고 모른다는 것이 꼭 모르는 것도 아니어서, 만사가 알쏭달쏭하다.
하기야 시(詩)는 현실도 아니고 현실이 아닌 것도 아닌 헤테로토피아이기도 하다. 세상이 절대로 감옥은 아니라고 기어이 속이려고 고안한 장치가 바로 현실의 감옥이라는 주장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면 이 문학이란 것도 얼마든지 이렇게 또 저렇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길이 예속으로도 해방으로도 열렸다. 사정이 이러하니 가끔은 나도 이렇게 질문할 수밖에 없다.
“지금 이 헤테로토피아는 난민촌인가? 혹은 해방구인가?”
이왕 내친김에 재미로 싱거운 소리를 좀 해보자.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일 뿐인데, 그 ‘사이’의 ‘운동’이란 것이 어찌 가능한가? 무언가에 기대어 인식하는 걸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 하고, 자기 감정으로 멋대로 빚어내는 게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면, ‘없는 것’에 기대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누군가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며 걷다가 허방을 디뎌 쿵 넘어졌는데, 거기가 바로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였다. 이러자 세상에도 없는 은행나무 벌레가 이랬다는 거야.
“야, 인마! 밥은 먹고 다니냐?”
사람들 가운데 더러는 이런 수작들에 반색한다. 그러나 나와 같은 인물들은 이와 거리가 조금 먼데, 이건 분명히 타고난 자질과 팔자 탓이다. 그래서 이 평론집을 대하는 태도도 수상하다. 아마도 이런 글을 열심히 읽으면 두 가지 경우가 나타날 거야. 하나는 두뇌를 많이 쓰니 치매 예방에 효험이 있을 것이고, 또 하나는 이걸 이해하려다가 가슴이 답답해져서 심근경색이 올 것이다. 글쎄, 이런다니까. 그러나 뭐가 어긋나도 다 방도가 있으니, 독자들은 걱정하지 말라. 저자가 의사인 만큼 때때로 상담을 받으면서 읽으면 된다.
“수리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
어쩌면 내가 본의 아니게 귀한 평론집을 놀려먹었을지도 몰라서 일단은 이렇게 정구업진언(淨口業眞言)을 왼다. 비록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이 이미 작가의 것이 아니라 해도 ‘압핀’을 ‘아편’으로 읽는 수준의 오독은 죄 없다 하기 어렵다. 2021년이면 불과 몇 년 전이다. 푼크툼 시인이 이때 작고한 문인수 시인도 언급했는데, 나 역시 생전의 그 모습이 떠올라서, 이 평론집에 옮겨적은 고인의 시 「바람, 못 간다」를 다시 찾아 읽어본다. 가을이 아득히 깊다.
[2025.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