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서현과 만명 / 김성문
신라는 삼국통일을 이룬 나라다. 그 이름 앞에는 늘 김유신이 먼저 불린다. 그러나 시선을 조금만 낮추면, 그를 떠받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보인다. 시대의 굴곡을 견디며 아들을 키워낸 김서현이다. 그는 가야의 피를 지닌 채 신라의 충신으로 살아가는 쉽지 않은 길 위에 서 있다.
김서현은 단순한 장군이 아니다. 그는 나라를 잃은 가문의 후손이며, 동시에 새로운 나라의 질서 속으로 자신을 밀어 넣은 인물이다. 혈통의 경계 앞에서 물러서지 않았던 김서현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김유신이라는 이름이 결코 우연히 태어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김서현의 아버지는 가락국의 마지막 왕인 양왕의 둘째 아들 김무력 장군이다. 김무력은 가야가 멸망한 뒤 신라에 귀속되며 진골 귀족의 대우를 받는다. 김무력의 아들 김서현 역시 진골로 인정받는다. 그는 신라 귀족으로 편입되지만, 가야의 혈통이라는 태생적 경계 위에 서 있다. 진골이긴 해도,‘ 가야계 진골’ 이라는 굴레는 쉽게 벗겨지지 않는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이름이 서현舒玄으로, 김유신 묘비에는 소연逍衍으로 남아 있다. 소연이 자字인지, 개명한 이름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두 이름은, 김서현이 역사 속에서 분명한 자취를 남기고 있음을 말없이 증명한다.
김서현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그의 부인 만명이다. 둘의 만남은 예고 없이 다가온다. 김서현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숙흘종의 딸 만명을 보는 순간, 단번에 마음을 빼앗긴다.
만명의 아버지 숙흘종은 신라 제24대 진흥왕의 동생으로, 명문 신라 왕족이다. 혼처가 정해지지 않았던 만명과 김서현 사이에 마음이 오간다. 시간이 흘러 김서현이 만노군 태수로 부임하게 되자, 만명도 그와 함께 떠나려 한다.
숙흘종은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채고 만명을 별채에 가두어 엄중히 감시하게 한다. 그때 뜻밖의 일이 벌어진다. 홀연히 별채의 문에 벼락이 쳐서 지키는 이들이 놀라 흩어지자, 만명은 뚫린 구멍으로 빠져나와 서현과 함께 만노군으로 향한다. 신라 왕족과 가야계 진골 사이의 사랑은,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운명을 건 탈출이며 새로운 세상을 여는 첫걸음이 된다.
당시의 골품제 사회에서 김서현처럼 가야계 인물이 신라 왕족과 혼인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혈통과 신분의 벽은 높고, 왕실은 보수적이다. 만명의 어머니 만호 부인은 김서현의 어머니인 아양공주와 사이가 좋지 않다. 가야계 출신인 김서현을 사위로 맞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김서현은 전방화랑을 거쳐 우방대화랑이 되고, 마침내 부제의 자리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 문턱은 오래 그의 것이 되지 못한다. 부제는 풍월주 바로 아래의 자리, 대개 풍월주로 이어지는 길목이다. 김서현은 그 문 앞에서 멈춰 선다. 그리고 그에게는 풍월주보다 더 큰 임무가 남겨진다. 신라의 국경을 지키고, 아들을 길러내는 일이다.
진흥왕이 경남 합천 일대에 대량주를 설치하자, 김서현은 그곳을 맡아 다스리는 도독으로 부임한다. 대량주는 신라의 서쪽 국경을 지키는 요충지였다. 그는 늘 전쟁의 기척이 가장 먼저 스며드는 땅에 있었다. 적의 침입 소식은 조정의 명령보다 먼저 들려왔고, 국경의 백성들은 전투보다 먼저 삶이 흔들리는 현실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텨야 했다.
이후 그는 경남 양산의 양주 총관이 되어, 백제의 빈번한 침공을 막아 낸다. 『삼국사기』는 김서현이 농사와 양잠이 끊기지 않도록 지역을 지켜냈다고 전한다. 국경은 그에게 전장이면서 동시에 삶의 터전이다.
629년, 예순여섯이 된 김서현은 진평왕의 명을 받고 김용춘과 함께 고구려의 낭비성으로 향한다. 진지왕의 후손 김용춘과 가야계 김서현, 두 사람은 대장군으로서 나란히 군을 이끈다. 그 장면은 왕족과 가야계가 처음으로 같은 깃발 아래 선 순간처럼 보인다.
낭비성의 승리는 성 하나의 함락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신라가 삼국을 향해 내딛는 첫 발자국이며, 통일을 향한 문이 열리는 소리다.
김서현은 어느 순간 기록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땅 위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경남 양산의 취서사와 울산의 은월사에는 지금도 김무력 장군과 김서현 장군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취서사 영정각에는 김서현과 만명 부부의 영정이 함께 모셔져 있다.
이 영정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사당이 크게 파손되었을 때, 무속인이 그것을 수습해 간신히 보존해 냈다. 지금은 진품이 양산시립박물관에 있고, 복제품은 사당에 안치되어 있다.
김서현의 관직은 최고위 관등인 각간에 이르고, 만노군 태수와 대량주 도독, 양주 총관으로 지역을 두루 다스린다. 그는 564년에 태어났으나, 사망한 해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그의 묘소는 지금의 양산 북정리 고분군 부부총으로 추정되며, 1963년 사적 제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김서현과 만명 사이에서는 다섯 자녀가 태어난다. 장남 유신, 차남 흠순, 장녀 보희, 차녀 문희, 삼녀 정희. 그 가운데 문희는 태종무열대왕 김춘추의 부인이 되어 문명왕후로 불린다. 김서현 부부는 가야와 신라의 경계에 선 존재였지만, 그 자녀들은 두 나라를 하나로 엮는 다리가 된다.
김서현 부부의 삶은 전장에서 칼을 드는 방식으로 성웅이 되는 길이 아니었다. 사랑을 지키고, 혈통의 벽을 견디고,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일이 그들의 전투였다. 그 선택 위에서 김유신이 자라고, 신라는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역사는 흔히 눈에 띄는 성웅 한 사람의 이름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그 이름을 가능하게 한 삶은, 말없이 오늘도 어디선가 이어지고 있다.
<다음 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