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흠순 장군과 부인, 2부 / 김성문 김흠순은 나이 63세(660년)에 김유신과 함께 나당연합군의 일원으로 백제 정벌에 나섰다. 황산벌에서 백제의 명장 계백과 5천 결사대를 마주한 신라군은 연이어 네 번이나 패했다. 이때 김흠순은 화랑인 아들 반굴을 불러 적진으로 홀로 들어가 싸우도록 명했다. 그 순간 그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끝내 아들의 눈을 바라보며 나라를 택한 한 아버지의 결단을 내렸다. 반굴은 명을 받고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 그 희생은 병사들의 심장을 일깨워, 신라는 마침내 황산벌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전투는 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남은 잔당들이 부흥 운동을 벌이자, 김흠순은 그들을 토벌하며 65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전장을 누볐다. 그리고 71세(668년), 고구려를 정벌할 때 ‘각간’의 관등으로 출정했다. 김유신은 본국에 남았고, 김흠순은 김인문과 함께 대당총관으로 군을 이끌었다. 그 후 신라가 백제의 옛 땅과 백성들을 차지하자, 당나라와의 갈등이 깊어졌다. 문무왕은 김흠순과 파진찬(4관등) 양도良圖를 사신으로 당나라에 보냈으나, 두 사람은 감옥에 갇히는 수모를 겪었다. 다음 해에 김흠순만 귀국했으나 양도는 끝내 옥사했다. 그 사건은 나당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신라는 670년 당나라 오골성을 선제공격했고, 7년간의 치열한 전쟁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김흠순은 젊은 시절 술을 좋아했다. 보단은 남편을 위해 손수 술을 빚어 다락에 저장해 두었다. 어느 날 술을 찾던 김흠순이 기다려도 보단이 내려오지 않자, 다락에 올라가 보니 큰 뱀이 술독에 빠져 있고, 놀란 보단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아내를 업고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그날 후 그는 술을 끊었다. 이 일화를 들은 보리 풍월주는 “그토록 아내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딸을 더 주어도 되겠다.”며 보단의 동생 이단까지 시집보냈다. 자매는 투기 없이 화목하게 지냈다. 이단은 2남 3녀를 낳았다. 가세가 넉넉하지 않을 때면 김흠순은 17대 염장 풍월주에게 도움을 청했다. 염장은 그의 인품에 감복하여 딸들을 반굴 외에 다른 아들에게 시집보냈다. 보단은 염장이 여색과 재물을 즐겨 가풍이 걱정된다고 했지만, 김흠순은 웃으며 말했다. “남자가 여색을 좋아하는 것은 본능일지도 모르오. 나 또한 보단이 아니었다면 염장처럼 되었을 것이오.” 김흠순의 아들들 가운데 원수, 원선, 원훈은 모두 중시에 올라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자리에 이르렀다. 김흠순은 수많은 전장을 지나오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는다. 그는 군사를 자식처럼 돌보고, 가정을 나라처럼 지킨다. 전쟁이 끝난 자리에서도 그의 삶은 흐트러지지 않는다. 보단과 함께 살아온 시간은 그에게 또 하나의 전장이고, 또 하나의 승리다. 그는 마침내 보단과 나란히 생을 마친다. 검으로 싸운 장수이자, 마음으로 버틴 가장의 삶이 여기서 마침내 완결된다. 83세에 이르는 시간 동안 자손은 백여 명으로 퍼지고, 조문객은 만 명을 넘는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그 이름을 다시 부른다. 전장에서 검을 들고, 집 안에서는 사랑을 지킨 사람. 역사는 늘 찬란한 이름을 앞세우지만, 한 시대를 떠받친 힘은 그렇게 조용한 삶에서 나온다. 김흠순과 보단의 삶이 지금 우리에게도 은은하지만 오래 남는 울림으로 다가온다. |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