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의 아들들(2부) / 김성문
<1부에서 계속>
그로부터 2년 후, 당나라가 다시 신라를 침공했다. 675년 음력 9월, 이근행이 이끄는 20만의 군대가 경기도 양주 인근 매소성에 주둔했다. 그 소식을 들은 원술은 다시 칼을 들었다. 지난 실책을 만회하리라는 일념 하나로 전장에 나아가 목숨을 걸고 싸운 끝에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포상을 받았으나, 결국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부모에게 외면당한 마음의 상처가 끝내 그를 떠나게 했다. 그렇게 원술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전투들은 단순한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김유신 가문의 윤리가 실제 전장에서 어떻게 시험 되었는지를 보여준다.
한편, 김유신에게는 서자인 시득이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천관으로 추정된다. 김유신은 그 사실을 오랫동안 알지 못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천관의 오빠인 천존 장군은 시득을 5두품 집안에 양자로 보내고 ʻ군승ʼ이라는 이름으로 키웠다. 군승은 자신만의 힘으로 출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수성 성주 자리까지 올랐다. 백수성은 현재 황해도 재령군 부근이다.
시득은 672년, 신라가 고구려와 손잡고 백수성 인근에서 당나라군과 맞서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어진 석문 전투에서는 패배했다. 그 패배의 책임을 물어, 시득은 충남 부여의 가림군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군함을 정비하고 병사를 훈련시키며 다음을 준비했다.
676년 음력 11월, 시득은 사찬(8관등)이 되어 신라 해군을 이끌고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나라 수군과 충남 서천군 장항 일대, 기벌포에서 일대 격전을 벌였다. 첫 전투에서는 패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이어진 22차례의 전투에서 그는 모두 승전했다. 당나라 군 수천 명을 궤멸시키며 기벌포 대첩의 영웅이 되었다. 기벌포의 바다는 그 후 한동안 당나라의 깃발을 비추지 않았다. 그 대첩 후 당나라는 다시는 신라를 침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한 시득의 활약은 후대에 재조명되었다. 2016년 5월, 해양수산부는 우리나라 해양사에 빛나는 인물 225명을 조사하여 17인을 최종 선정했다. 시득 장군도 그중 한 사람으로 뽑혔다. 그는 기벌포 대첩을 승리로 이끈 주역으로, 장보고와 이순신에게 비견될 명장으로 평가되었다.
원술과 시득은 김유신의 아들이지만 서로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원술은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목숨을 건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외면받은 자로 남았다. 반면, 시득은 자신의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한 서자였지만, 전장에서 진가를 드러내며 역사의 이름으로 새겨졌다.
김유신의 집안은 엄격하고도 냉정했다. 임전무퇴의 기개를 실천하지 못하면 핏줄조차 이름을 잃었고, 의로움을 잃으면 가문의 명예마저 깎아내리는 일이었다. 어쩌면 지나치게 가혹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가혹함이 있었기에, 김유신의 가문은 사사로운 삶보다 나라의 운명을 먼저 선택할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김유신 가문의 가풍을 다른 말로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집안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자도 나라를 위해 칼을 들었고, 인정받은 자 역시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자기를 벌했다.
가문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 누군가는 잊히고, 또 다른 이는 끝내 인정받지 못하지만, 그들의 충과 절개는 지금도 우리 삶의 기준이 된다.
신라 최고의 해군제독 김시득 장군 홍보물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