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신 장군의 손자들(1부) / 김성문 김유신 장군의 손자는 여러 명이다. 그들은 조상의 기상을 이어받아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때로는 가문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더 큰 이상을 품는다. 그들의 이름은 신라의 역사 속에서 찬란히 빛나기도 하고, 어떤 이름은 흐르는 강물처럼 조용히 이어지기도 한다. 손자들 가운데 김윤중(김윤충), 김장청, 김암, 이 세 사람의 삶은 사서에 기록되어 후대에까지 전해진다. 김유신이라는 거목의 그늘에서, 그들은 어떻게 자기의 길을 열었을까.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에는 김윤중에 관한 일화가 실려 있다. 그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으로부터 유독 총애를 받은 인물로, 대아찬이라는 관직에 올랐다. 그러나 총애에는 언제나 시기와 질투가 따라붙는 법. 명절인 한가위 때 성덕왕이 월성의 마루에서 잔치를 벌이며 말했다. “김윤중을 부르라.” 그러자 신하 중 한 사람이 아뢴다. “왕족 중에도 충직한 이들이 많은데, 굳이 벼슬에서 멀어진 신하를 찾으십니까?” 이에 왕은 대답했다. “오늘 나라가 평온한 것은 바로 김윤중의 조부, 김유신의 덕이다. 그 은혜를 저버린다면 자손에게까지 미치게 하는 의리가 아닐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인정을 넘어, 조상의 공적에 합당한 예우를 후손에게도 잊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김윤중이 부름을 받고 나아가자, 왕은 김유신의 생애를 길게 회고하며 그를 치하했다. 밤이 깊어 물러나는 김윤중에게 절영산의 명마 한 필을 하사했다. 그것을 지켜본 신하들은 마음속으로 섭섭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일화는 성덕왕이 김유신 후손에게 얼마나 깊은 의리와 은혜를 품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역사의 흐름은 언제나 일정치 않다. 김유신이 세상을 떠난 뒤, 가락국 왕족의 피를 이은 그의 가문은 점차 조정에서 밀려났다고 전해진다. 김윤중은 성덕왕 24년(725년)에 중시로 임명되었으나, 그 뒤로 언제까지 그 자리를 지켰는지는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어쩌면 김유신 가문이 더 이상 왕실과 혼인으로 이어지지 못한 탓에, 정치적 입지도 서서히 좁아졌는지도 모른다. 733년, 당나라는 말갈과 함께 발해를 견제하고자 신라에 군사 연합을 요청했다. 이에 성덕왕은 네 명의 장군을 파견했다. 그 가운데 김윤중과 그의 아우 김윤문도 포함되었다. 김유신이라는 거대한 인물이 남긴 이름 덕분에, 후손들 역시 전장으로 소환되었다. 공이 깊은 만큼, 그늘 또한 짙었던 셈이다. 김윤중의 아들 김장청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 김유신 행록 』10권을 집필했다. 이 책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이상적인 군신 관계를 모색하며 신라 하대의 혼란을 바로잡고자 한 정신적 지침서였다. 또한 김유신 가계의 정치적 위상을 복원하고, 다양한 분파로 나뉘어 가던 후손들 속에서 정통 직계임을 드러내려는 작업이기도 했다. <2부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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