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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높이

작성자서정길|작성시간26.06.19|조회수26 목록 댓글 1

눈높이

 

서정길

 오일장을 찾아다니길 좋아하는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근처 고령 장으로 가는 중이니 지산동 고분도 돌아보고 유명한 도다리쑥국이라도 한 그릇 하자고 했다.

 시장에 들어서자, 봄나물이 지천으로 널려있는 난전에서 팔순쯤으로 보이는 노부부가 심하게 다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다가서니, 할머니는 “종일 채소 판 돈 십만 원을 영감쟁이가 술 퍼마시는 데 다 썼다”며 닭똥 같은 눈물을 훔치고 있다. 불콰해진 할아버지도 “이 여편네 동네 망신 다 시킨다”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다.

 십만 원의 가치를 재단할 수는 없지만,할머니에게는 닷새 만에 겨우 손에 쥔 큰 금액일 것이다. 장터 사람이 지켜보는데도 악다구니를 부려야 할 정도라면 그 돈은 할머니에게 숨통을 틔워 줄 절박한 것이 아니었을까. 두 사람의 가정사에 대해 알 길은 없으나, 할아버지는 주위의 많은 눈을 의식해서인지 할머니와 등을 진 채 담배 연기만 허공에 뿜어댄다. 팔다 남은 푸성귀를 거두는 할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있고 어깨마저 축 늘어져 있다. 두 분 마음에 생채기만 남긴 채 한동안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지낼 것 같아 마음이 아리다.

 때마침 후배도 그곳으로 왔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그의 눈시울이 금방 붉어졌다. 그의 부모님도 그런 적이 있었다며 시선을 허공에다 둔다. 어머니는 형과 자신의 공납금을 마련하기 위해 삯 바느질로 밤을 꼬박 새우고도 낮에는 이 집 저 집 품을 팔러 다녔다. 그렇게 번 돈을 아버지가 몽땅 노름으로 탕진하던 아픈 기억을 그는 꺼냈다. 그들의 딱한 사정을 안 이웃의 도움으로 형제는 퇴학은 면했지만, 부끄럽고 창피해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가난의 그림자가 싫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난이 자신을 단단하게 단련하는 채찍이었다고 했다. 후배는 이웃들에게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지금도 매년 고향 마을을 찾아 어른들을 뵙고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노부부의 다툼에서 자신의 아픈 과거와 이웃의 따뜻함을 동시에 떠올린 모양이었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눈물을 글썽이는 할머니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팔다 만 푸성귀를 사 주지 못한 게 후회가 되었다. 정작 사는 동네라도 알아두었더라면 사정을 알아보고 도움을 줄 방도라도 찾았을 텐데. 문득 내 안에서 ‘도움을 줄 방도’라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켕겼다. 노부부를 바라보는 나는 과연 누구인가. 알량한 자선에 기대 우월의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두 분을 내 시선 아래 둔 채 베풀 대상 가려내듯 바라본 것만 같았다.

 OO복지재단근무 시절, 명절 때면 사무실 청소를 하는 일용근로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마련했다. 기관의 장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의무지만, 은연중에 아랫사람에게는 베풀어야만 인사를 들을 수 있다는 얕은 생각이 숨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는 눈높이를 맞춘 태도가 아니라 낮춰 보는 마음이었다. 복도를 지나칠 때 가벼운 인사만 나눌 뿐, 그들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안부를 물은 기억이 없다. 그런데 퇴직한 지 10여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들은 옛 직함을 불러주며 반갑게 인사한다. 명절마다 챙겨준 선물 때문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한 번은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실 때였다. 아주머니는 “늘 웃으면서 가까이해 주어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진정한 나눔은 물질의 가치에 달린 것이 아니라, 서로 인격체로서 같은 눈높이로 마주하느냐의 문제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초등학교 시절, 장애인 엿장수의 눈을 피해 엿가락을 훔쳤다가 아버지와 신부님께 호된 꾸중을 들은 적이 있다. 약자를 괴롭히는 만큼 못난 짓이 없다는 아버지 말씀에 속죄하는 마음으로 장애인시설에 기부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내 안에는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베푼다는 오만함이 은근히 자리 잡고 있었다. 혹여 나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자선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지금도 귓불이 후끈 달아오른다.

 미사 때마다 수없이 듣고서도 실천하지 못했던 성경 한 구절이 새삼 다가왔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은 단지 일상의 삶을 이웃의 눈높이로 수평으로 맞추라는 의미일 터다. 여유가 있을 때 선심 쓰듯 베풀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라 힘들 때는 곁에서 마음을 내어주는 일일 것이다. 고령장 난전의 노부부를 외면하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던 후배의 선한 눈망울에서, 나는 비로소 참된이웃의 길을 보게 된다. (원고지 11.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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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정임표 | 작성시간 26.06.20 감동적인 글입니다.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당한 고난에다 고리의 이자 까지 붙여서 세상을 향해 복수하는 사람, 자기가 당한 고난을 후인들이 되풀이 하지 않도록 은혜와 사랑을 베푸는 사람.

    하늘이 나에게 시련을 줄 때는 나를 통해 드러내려는 하늘의 더 큰 뜻이 숨겨져 있음을 알고 그 뜻이 무엇인지 찾으라 한 말씀이 <눈높이>를 읽으며 생각 납니다. 세상 사람 모두가 하나님의 눈높이에 오르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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