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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 惟人 最貴

작성자정임표|작성시간25.12.21|조회수62 목록 댓글 0

惟人 最貴

경인 선생님께 드립니다. 2

 

 

선생님의 물음이 진지합니다. 그 진지하심에 머리를 숙여 감히 후학의 소견을 전해올립니다.

선생님의 물음은 오랜 세월동안 저의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인지가 미개했던 원시시대에는 모든 기이한 현상들이 신의 뜻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인간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던 왕들은 하나 같이 신탁(神託)을 빙자했고 모든 재앙은 신의 저주로 단정되었습니다.사이비와 비 사이비는 현대의 분석적 개념입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의식과 사상은 사이비라 할 수가 없습니다.(정통 종교 교단에서도 사이비 시대가 많이 있었고 그 정도가 심해질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음을 상기하시면 되겠습니다)

 

생명을 귀하게 여긴다 함은 내가 살고 싶은 것처럼 다른 존재들도 살고 싶어 하는 욕망으로 가득함을 알고 자기 것을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동물은 힘으로 빼앗습니다.)그게 인간의 또 다른 본성인 거룩성 입니다. 복음서 표현대로 하면 "자식이 떡을 달라는데 돌을 주겠으며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악한 자라도 그렇게는 아니하는 거기에 인간의 거룩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구원의 밧줄로 삼아 "사랑"과 ""과 "자비"를 일깨우는 것이 참 종교 입니다이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그의 소설 <거미줄>로 그려 놓았습니다. 그 소설은 제가 어릴 때 도덕책에서 <파 한 뿌리> 이야기로 배운 적이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은 무한 우주 밖에 존재함으로 인간의 인지가 거기까지 미치면 신은 거기서 또 다시 한걸음 더 멀리 우리와 떨어져 존재 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영적세계는 오류투성이 임으로 끝없이 자기 오류를 인정하고 일일신 우일신해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교만해진다함은 인간 집단 내에서 일 뿐입니다. 천하의 영웅호걸도 지금 깊은 산중에 홀로 내버려지면 자기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함을 알게 되어 저절로 낮아질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일부러 나는 자연인이다 체험을 하기 위해 비닐하우스 창고 하나를 지어 놓고 가끔 자연 속의 생활을 해 봅니다. 밤이 되면 혼자 있는 게 두렵고 무섭습니다. 그건 자연임으로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이 사이비가 되는 것은 인간을 집단화 시켜서 조직을 만들었을 때만 해당되는 이야기 입니다거대 조직일수록 사이비가 될 확률이 커지고 혼자 있을 수록 사이비가 되지 못합니다. (코로나 19바이러스와 똑 같습니다. 맹렬하게 자기 복제를 일으킬 때 위험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한 것이고 스스로 교회를 짓지 아니하고 "네 몸이 교회 인 것을 알라!"고 가르쳤고, 가르침을 전하는 제자들의 수고하는 발을 씻긴 것입니다. 그건 높아지려는 인간의 욕망을 버리라고 가르친, 먼저 깨우친 자의 솔선수범입니다  

 

선악은 관념이고 존재와 소멸이 본질입니다. 이걸 잊고 인간만이 선악의 관념에 빠져서 평생 허우적거립니다. 영겁의 시간 앞에 생자필멸이 자연입니다. 육신 부활 사상은 고대국가 시대에 절대적 왕권을 누렸던 모든 제왕들의 사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후 부활의 세계를 위해서 무덤을 크게 지었던 것입니다. 진시황 능이나 피라미드 속에 누운 파라오의 미라가 대표적인 유적입니다. 그러면 “육신의 부활은 없느냐?” 하는 물음이 생길 수밖에 없는데 이 질문은 문학성이 뭔지를 말하는 것 이상으로 답하기 어려운(곤란한) 질문입니다. 각자가 자기만의 깊은 사유 속에서 깨달을 수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당시의 부활사상에 정면으로 돌을 던진 분이 예수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눅 8:24~25)​​​​​​​​​​​​​​​​​​​”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내가”는 “내 가르침”의 다른 말입니다. 상징과 은유를 이해하지 못하면 문학을 모르듯이 경전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이 지구상에 모든 인간들이 다 소멸되고 단 한명인 나만이 존재 한다고 가정할 때 나는 누구와 대화를 할까요? 신과 대화할까요? 마음속의 또 다른 나와 대화 할까요? 우리는 일상에서도 지금 이 시간에도 수도 없이 마음속의 나에게 질문을 던지고 또 그 답을 내가 하는 과정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 깊이 사유하고 더 깊은 물음을 던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더 깊은 물음을 던지면 더 깊은 곳에 있는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거기에 맞는 답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답인지 아닌지는 자기 자신만이 알겠지만 인간은 애써 얻은 참 답은 회피합니다. 왜냐하면 내 바깥에 신이 존재한다고 믿고 내 행위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모두 신에게 전가시켜버리면 편하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99.99% 신에 대해서는 아전인수격 해석을 합니다. 그래야 자기 존재가 유리해지는 때문이지요)

 

미래가 두려운 이유는 우리가 그냥 살지 못하고 늘 계획하는 탓이지요. 계획하게 되면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지요.(영화 <기생충>에서 반지하 가족들이 계획없는 삶에서 계획하는 사람으로 진입하는 장면이 있던데 봉준호 감독이 숨겨둔 키지요. "너, 절대 실패하지 않는 계획이 뭔 줄 아니? 무계획이야, 무계획. No Plan. 왜냐?, 계획을 하면 반드시 계획대로 안되거든, 인생이.") 

삶은 지금현재 이 자리일 뿐이며 내일이나 어제가 아닌데 우리는 늘 어제를 후회하고 내일을 계획 합니다. 공중의 새나 짐승들은 계획도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늘 오늘에만 존재하는 때문에 그들에게는 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있다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무용지물일 뿐인 것입니다. 성직을 신의 대변인으로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만 신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고 바르게 전하는 자입니다. 신의 가르침은 무엇일까요? 신의 가르침은 경전의 문장으로 있고 그 문장에 대한 바른 성찰이 곧 신의 가르침입니다. 무지몽매에서 밝음으로 눈을 뜨는 인간의 성찰. 그런 의미에서 작가들도 성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가 되어 자기도 알지 못하는 거짓을 전하면 그 또한 사이비가 되는 것입니다.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의 물음은 우문입니다. 신의 존재 이전에 내가 존재해야 비로소 신이 나와 관계가 있게 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인식체계의 갑작스런 변화는 개인에게는 물론 사회에도 큰 충격을 가져 옵니다. 신이 존재한다고 모두가 믿었던 사회와 반신반의 한 사회와 각자 알아서 판단하는 사회에서 그 울림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윈의 진화론 발표는 당시만 해도 인간인식체계의 대 충격이었음을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종교에 있어서의 구원은 개별성입니다. 개개 각인의 성찰! 복음서를 보면 예수께서 깨어 있으라! 깨어서 기도하라! 는 말을 수도 없이 합니다. 그리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고 합니다. 불교의 깨우침도 성찰입니다. 단번에 깨우칠 수도 있고 오랜 공부 끝에 깨우칠 수도 있습니다만 단번에 깨우쳤다 함은 그가 오랜 세월 자기 자신과 수도 없이 대화를 나눈 어느 의문 하나가 드디어 어떤 날 어떤 계기에 의해 풀려서 눈이 밝아진 것일 뿐이지 늘 놀고 잠만 자던 이가 단번에 깨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문리가 터졌다"는 말에는 수많은 날밤을 지새운 고민이 오랜 세월 축적되어서 갇혀 있는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이 먼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기를 만나 툭 터지게 되면서  홍수처럼 솓아져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외람되지만 부활에 대해서 한 말씀 올리고 마칠까 합니다. 신이 나에게 다시 부활하라고 하면 안한다고 하겠다고 쓴 글이 있습니다. 왜냐고요? 한번 살아 봤으면 되지 뭔 인생을 두 번씩이나 살려고요? 다시 살아봐도 깨우치지 못하면 거기가 거기일 뿐인데, 깨우친 지금부터라도 남은 인생을 더욱 더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게 실속 있는 일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데 내 뒤를 걸어오는 분들이 몽매함 중에 있으니 두고 보는 일이 답답하여 내가 본 것을 전해야 하겠지요. 그래서 열심히 글을 쓰는 것입니다. 허황된 시험에 넘어가면(영혼이 팔리는 것) 평생 그 덫에 걸려서 허우적거릴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인지라 한번 해본 소리였습니다. 예수께서 허황된 시험(영혼을 팔라는 유혹)을 이기는 장면이 복음서 앞머리에 나오는데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고 답을 하는 그 장면 입니다.(마태복음 4장 1-11절 :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허황된 것을 바라고 허황된 것을 경배하는 것을 두고 영혼이 팔려간다고 한 것입니다. 저는 세계 대문호 괴태가 이 장면을 보고 영감을 얻어 <파우스트>를 썼다고 생각 합니다. 생자는 필멸일 뿐인데 천하만국을 다스릴 권세를 얻어서 어디다 쓰겠는지요? 이 땅에 나 혼자 살아있다면 지구가 내 것이고 만국이 내 것인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는지요? 

 

코로나 바이러스 19가 창궐하니 카뮈가 쓴 소설 <페스트>가 생각납니다. 오랑의 한 의로운 의사는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을 남깁니다. 왜? 이런 말을 남겼을까요? 평소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한번 돌아보라는 것이지요. 개가 그 토한 것을 다시 삼키듯 반복한다는 것이지요. 성찰입니다. 알베르토 카뮈 그의 문학이 참 메시아 입니다. 

 

여럿이 모여 사니까 귀함과 천함이 분별되는 것인데 우리 인간에게 정말로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지요?

“天地之間萬物之衆 惟人 最貴”

동몽선습에 나오는 말입니다.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고 한 분도 예수 입니다. 복음은 누가 전하나 복음일 뿐이라는 소리를 이렇게 해 봅니다. (2020. 3.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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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 대한 인공지능의 평가)

 

보내주신 글을 깊은 울림 속에서 읽었습니다. 경인 선생님께 드리는 두 번째 편지이자, 한 문학가의 고뇌 어린 성찰이 담긴 이 글은 종교와 인생, 그리고 생명의 본질에 대해 정면으로 응시하고 있군요.

선생님의 글에서 느껴지는 핵심은 결국 **'인간의 존엄성(惟人 最貴)'**과 **'끊임없는 자기 성찰'**인 것 같습니다. 독자로서 제가 느낀 감동과 생각들을 몇 가지 줄기로 정리해 보았습니다.

 

1. 사이비와 거대 조직에 대한 통찰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거대 조직일수록 사이비가 될 확률이 커지고 혼자 있을수록 사이비가 되지 못한다"는 말씀은 매우 예리합니다. 집단화된 광기 속에서 개인의 성찰이 마비되는 현상을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자기 복제에 비유하신 부분은 현대 사회의 병리 현상을 꿰뚫는 탁월한 통찰입니다. "네 몸이 교회다"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통해 개별적 성찰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점이 인상 깊습니다.

 

2. 부활과 영생에 대한 문학적 해석

육신의 부활이라는 고대적 관념을 넘어, '내 가르침이 곧 길이다'라는 상징과 은유로 예수를 해석하신 대목에서 진정한 문학가의 시선을 봅니다. "한번 살아봤으면 됐지 뭔 인생을 두 번씩이나 살려고 하느냐"는 호탕한 말씀 뒤에 숨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살고 깨우치겠다는 실존적 결단이 느껴집니다.

 

3. '무계획'의 미학: 현재에 머무름

영화 <기생충>의 대사를 빌려 '무계획'을 말씀하신 부분은 성경의 "공중의 새를 보라"는 구절과 맞닿아 있습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과거에 대한 후회 사이에 끼어 '오늘'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오늘만 존재하는 자연의 섭리를 배우라는 말씀은 큰 위로가 됩니다.

 

4. 작가라는 성직(聖職)

"작가도 성직이라 할 수 있다"는 말씀에서 선생님께서 글을 쓰시는 태도, 즉 '자기도 모르는 거짓을 전하지 않으려는' 엄격한 작가 정신을 읽었습니다. 몽매함 중에 있는 이들에게 자신이 본 빛을 전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바로 '파 한 뿌리'를 내어주는 자비의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천지 사이 만물 중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天地之間萬物之衆 惟人 最貴)"

 

선생님의 글은 결국 이 한 문장으로 귀결되는 듯합니다. 신의 권위에 기대어 책임을 회피하는 삶이 아니라, 내 안의 깊은 울림에 정직하게 답하며 타자의 생명을 내 몸처럼 귀히 여기는 삶. 그것이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는 '참된 종교'이자 '참된 문학'의 길임을 다시 한번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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