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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플레이션과 갱죽(1)

작성자정임표|작성시간26.06.15|조회수29 목록 댓글 0

인플레이션과 갱죽(1)

환율이 계속 오르고 집 값이 계속 오르고 물가가 계속오르면 나는 갱죽이 생각 납니다. 어릴 때 하던 인사말 "아침 잡수셨습니까?" "점심 잡수셨습니까?"하고 밥을 먹었는지를 물었던 인사말도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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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수 없는 그 얼굴/수필가 정임표

 

 

  많은 사람들이 돈을 가진 사람을 증오하면서도 자기는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돈을 많이 벌려면 월급쟁이 해서는 불가능하고 사업을 해야 합니다. 사업을 하려면 자기 인생은 물론이고 처자식 목숨까지 전부 담보로 걸어야 합니다. 성공할 확률도 매우 낮습니다. 사업을 한다고 하더라도 한 두번은 돈을 벌수 있지만 일평생 돈을 잘 벌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사업이 10년을 넘기지 못하고 망합니다. 끝없는 자기 혁신을 기해낼 수 있어야만이 지속적으로 사업을 성공시켜 나갈 수가 있는데 이게 사실 무척 어려운 일인지라 얼마 못가서 자기 내부의 모순과 한계로 문을 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아니까 내 보다 먼저 세상을 살아본 우리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월급이 꼬박 꼬박 나오는 월급쟁이 길을 가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우리 아버지도 나에게 공부를 해서 공무원을 하든가 학교 선생님의 길을 가라고 하셨습니다. 월급쟁이로 살아보니 늘 월급 많이 받는 꿈만 꾸고, 사장이 되어 보니 무엇으로 저 직원들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만을 걱정하게 되더군요. 경기 불황이 와서 수입이 줄면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어지기 때문에 걱정만 느는 것이지요. 자식들을 주렁주렁 낳은 우리 아버지도 아마 한 평생을 그렇게살았을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게는 참으로 가난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동지가 가까워 오면 낮이 짧고 밤이 길기 때문에 하루 두끼를 먹었습니다. 그것도 저녁에는 김치에다 밥 한 그릇을 넣어서 멀겋게 끓인 "갱죽"이라 불리는 죽을 자주 먹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건강에 좋다고 죽을 끓여 주신 것이 아니고 물을 타서 양을 늘여서 많은 식구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신 것입니다. 요즘 말로하면 화폐량만 늘여서 전 국민에게 똑 같이 나눠주는 통화 팽창이라고도 할 수가 있겠네요. 그러니 당시에는 비만이란게 없었고 배가 나오면 사장배라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지요. 아이들 머리에는 소버짐 과 마른 버짐이 꽃 처럼 피어 났으며, 아침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의 훈시가 길어지면 영양실조로 운동장에서 픽 픽 쓰러지던 아이가 한 두명은 꼭 나왔습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집에 있어 봐야 먹을 게 나올리가 없으니 계집아이는 식모살이 사내 아이는 꼴머슴으로 머슴살이를 나갔습니다. 아이들이니까 세경(품값)이란 게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하루 세끼 밥만 먹여 주면 입하나 덜려고 조금 형편이 나은 집으로 죄다 일하러 보냈습니다. 인권이란 게 있을 수도 없었고 주인의 인심이 넉넉한 집으로 가면 그래도 인간 대접을 받으며 일할 수가 있었습니다.

 

 내 지난 기억 속에 내가 처음으로 돈을 벌러간 아득한 추억이 있습니다. 나는 도시로 진출한 아버지를 따라 대구 수창국민학교를 3년 다니다가 아버지가 도시 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귀향하셔서 시골 국민학교로 3학년 봄 방학때 전학하여 나머지 3년을 다녔습니다. 줄줄이 딸린 자식 다섯을 데리고 무작정 귀향한 아버지처지에서는 자식들 입에 풀칠해 주는 일이 여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이라고 해봐야 겨우 열살입니다. 그 나이 즈음에 어렴풋이 가난을 이해 했습니다. 그때 이윤복이란 아이가 <<저 하늘에도 슬픔이>>라는 일기책을 발표 했는데 그 책을 읽고 많이 울었습니다. 그래서 거지 아이가 보이면 '저 아이가 이윤복인가?' 하고 물어 보고 싶어 지기도 했습니다. 아마 그 즈음 어느 여름날 인 듯 합니다. 미꾸라지를 잡아서 대구 식당에 가면 돈을 준다는 이야기를 옆집에 같이 살던 아이에게 들었습니다. 공한열이라는 이름을 가진 나보다 한 살 적은 아이였는데 그 아이는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시골 사람들은 미꾸라지나 이런 것을 팔러 다닐 줄 몰랐습니다. 쌀이나 곡식을 퍼주고 갈치나 고등어를 사고 하던 시절이었으니 미꾸라지 잡아서 팔 생각은 아무도 하지 않았습니다. 미꾸라지는 논의 물꼬에 통발만 놓으면 지천으로 잡히던 흔해 빠진 물고기였습니다. 

 

 미꾸라지를 잡아서 바케스에 모았습니다. 그걸 팔러 가려면 지천역까지 3키로 걸어가 기차를 타고 대구 역까지 가서, 무작정 식당마다 다니며 팔아야 합니다. 수창국민학교를 다녔으니 대충 그 쪽 지리는 기억하는 지라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차표를 끊을 돈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반표를 타야 했지만 그때만 해도  엄마 손을 잡고 따라가면 극장이나 기차를 그냥 태워주기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미꾸라지를 반합(밥통)에다 담고 보자기로 싸서 낑낑거리며 지천 역으로 열차 타러 가는 어른 뒤를 따라 무작정 갔습니다. 아마 1관(3.75kg)은 된 것 같았습니다. 눈치를 보다가 머리에 장반티(네모난 나무 소쿠리를 우리는 반티라고 불렀습니다)를 이고 개찰구를 나가는 아주머니 아들인 것 처럼 그 뒤를 쫄쫄 따라 들어갔더니 역보가 그냥 보내 주었습니다. 대구역에 내려서 북성로 "미나까이" 건물을 지나 인교동 그 골목길을 무거운 밥통을 들고서 식당을 찾아다니며 문을 빼꼼히 열고 "미꾸라지 사세요!"라고 모기 만한 소리로 말하니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습니다. 한 참을 그렇게 다녔더니 팔이 빠질 듯 아픔니다. 대구역에서 점점 멀어지면 나중에 길을 찾지도 못하겠다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돌아 갈 차비도 없으니  또 어떻게 기차를 타고 지천역으로 돌아가나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기 몸집 보다 더 큰 커다란 싸리 바구니를 등에 지고 종이나 고물을 집어가는 넝마주의 아이가 되는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까지 일었습니다. 그렇게 무작정 다니던 중에 어느 식당 주인 아주머니가  미꾸라지를  한번 보자고 하더군요. 너무 반가워서 보자기 매듭을 풀고 반합 뚜껑을 여니 아 글세 미꾸라지들이 몽땅 질식해서 죽어 있는 게 아닙니까. 물이 없는 좁은 반합에다 1관에 가까운 미꾸라지를 담고 몇시간을 들고 다녔으니 죽을 수 밖에 없었지요. 안산다는 주인 아주머니 말씀이 청천벽력으로 들렸습니다. 더 이상 갈곳을 몰라 가게 문앞에서 망연자실 미꾸라지 통을 놓고 서 있으니 그런 내 모습을 본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와서 그 미꾸라지를 자기가 사겠다며 그 때 돈으로 몇십원을 주셨습니다. 나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그 아주머니 덕분에 다시 대구역으로 와서 열차표를 타고 동생들 줄 사탕까지 사서 집으로 올 수가 있었습니다.

 

내 나이 칠십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이 바로 그 얼굴도 모르는 아주머니 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니 거리에는 찬바람이 생생 붑니다.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있던 젊은 직원이 결국 사표를 냅니다. 말리고 달래보지만 더 큰 꿈을 찾아 가겠다는 데야 어쩔 수가 없습니다. 고용보험 타며 몇달 놀다 다시 일자리를 구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저 임금이 최고 임금이 되어버린 거리에는 가게 임대라는 간판들만 줄비합니다. 세개 2천원인 붕어빵 봉지 위로 '산 입에 거미줄 치겠나"며 독백하시던 엄마의 얼굴이 그 아주머니 얼굴이 되어 떠 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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