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제가 문단에 얼굴을 내밀기 전에 쓴 글입니다. 지금도 읽어보면 그 내용이 그대로 유효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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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로서의 첫걸음을 옮기며
문학과 예술이 작자의 내면을 표현한다는 것을 안후로부터는 가끔씩 지인들이 초청하는 그림 작품전에 가면 작가가 무슨 생각으로 이 그림을 그렸을까를 생각하게 되고, 서가에서 빛바랜 옛 시집을 찾아 읽을라치면 시인이 토해 놓은 그 시어들 속에 꼭꼭 숨겨둔 것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하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이런 감상법 탓에 전시회 관람이나 독서 후에는 내가 찾아낸 조각들을 꿰맞춰 두었다가 술자리에 가면 신기한 것을 발견한 소년마냥 떠벌리는 버릇이 생겼는데, 이런 나의 태도를 어떤 이들은 안목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아는 체를 한다고 핀잔을 주기도 한다. 남편의 다변(多辯)적 실수를 보다 못한 아내는 모임에 나가기 전에는 늘 때와 장소를 가리라는 사전교육을 시킨다. 그러나 어찌하랴!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 한다”고 하는데 넘쳐 나는 생각들을 어찌 막으랴!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숨은 뜻이 있는 것처럼 문인 예술가들의 창작물에도 작자의 숨은 뜻이 있음이 분명하다. 혼자서 너무 많이 알아버린 남모르는 깨우침이 가슴속에 차고 넘쳐서 토출하지 않으면 병으로 남을 그 무엇인가를 토해 놓고는 천기누설이 두려워 촘촘히 짠 비단 천이나 두터운 무명천으로 덮어 버리지만 그 덮인 천의 틈새로 은은히 새어나오는 빛 때문에 완전히 감추지 못하는 그 기법이 곧 바로 문학이요 예술인성 싶다.
굳이 백아절현의 고사가 아니더라도 작가의 마음을 다 헤아리기는 무척 어렵다. 어떤 그림이나 시는 작자의 마음을 쉽게 찾을 수가 있는 반면 어떤 작품은 도무지 무엇을 숨겨 놨는지 알 수 없는 작품도 있다. 작자의 마음을 찾기 어려운 작품이 쉬 찾을 수 있는 작품보다 더 격이 높다는 말은 아니다. 난 오히려 작자의 마음이 소탈하고 편하게 다가오는 작품이 예술의 본질에 더 접근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보고도 읽고도 아무 느낌이 오지 않는 것을 감상자의 무딘 감수성 탓으로만 돌린다는 것은 작자의 자기기만이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너무 쉽게 작자의 의도가 찾아지는 것은 감상의 재미를 덜하게 하는 것은 맞다.
훌륭한 작품은 그 느낌이 오래 지속되며 시간이 더 할수록 새롭고 깊은 깨우침이 있다. 비디오 아트라는 새로운 예술장르를 개척한 백남준 선생께서는 “예술은 사기”라고 하였다. 느낌은 꾸밈을 통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다는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 비디오 아트가 주는 느낌을 잘 모르겠다.
때늦은 걸음이지만 나도 창작 활동을 하고 싶다. 그림은 소질이 없으니 글이라도 써 모았다가 세월이 아직도 한참 더 흐른 후에 육순이나 칠순의 기념 수필집이라도 만들어 이 땅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선물로 남겨 주고 싶다. 그러나 마음 뿐 일상에서 깨우치는 순간의 느낌들을 문득 문자로 적어 보지만 써 놓고 보면 진솔함은 없고 온통 거짓투성이라 결국 글 쓰는 것을 포기하고야 만다. 누군가에게 읽혀질 것이란 생각이 먼저드니 내면을 감추어 꾸미고 싶은 유혹을 이겨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필가로서의 첫걸음을 떼면서 비록 서툰 꾸밈이지만 나는 고단한 삶도 밝게 그리고 싶고, 추한 풍경도 아름답게 미화하고 싶고, 기억조차 하기 싫은 추억도 아련한 그리움으로 회상하여 그려내고 싶다.
삶 자체가 모순이고 예술의 태동이 유한한 삶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고자 함에 있었던 것이니 있는 그대로 즐기고 거기에다 분칠을 하여 즐거움을 더한다한들 어떠랴 싶기도 하기 때문이다. (원고분량 200자원고지 10.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