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아는 것들을, 10년 먼저 알았더라면
수필가 정임표
밤부터 비가 온다는 소식이 있는지라 오늘은 그동안 미뤄 놓았던 들깨 모종을 이식하려고 합니다. 텃밭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이해합니다. 먼동이 트는 새벽이 있고, 씨앗을 품는 아침이 있으며, 목마른 대지에 물을 축이고, 여린 모종을 튼실하게 기르는 정오를 거쳐서 마침내 하루를 갈무리하는 일련의 계절들. 그 짧은 찰나를 놓치면 대지는 서둘러 문을 닫고, 서리 맞은 빈 가지만 남기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라던 옛말은, 결국 인간 또한 자연의 푸른 결을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잎사귀라는 고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흐르는 강물 같은 인생의 사계를 다섯 발달 단계로 나누어, 내가 그 시절의 밭에 심었어야 할 마음의 씨앗들을 돌아봅니다. 지나는 그 당시에는 정말 힘겹고 고된 시간이었습니다만 지나고 보면 찰나이고 아무것도 아닙니다. 부디 후인들은 이 인생 여정에서 살아 보지 않은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지 마시고 오직 매 순간 게을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1. 유아기 (0세 ~ 6세) : 세상이라는 대지에 첫 뿌리를 내리는 봄
아직 학교라는 울타리를 알기 전, 삶의 기초 공사를 시작하는 서정의 시기입니다. 이 고요한 계절에 아이는 부모와 가족의 사랑이라는 따스한 볕을 듬뿍 받으며 세상이라는 대지를 신뢰하기 시작합니다.
〇 마음의 주춧돌 놓기: 주변의 깊은 눈빛 속에서 '세상은 안전한 곳'이라는 따스한 믿음을 배웁니다.
〇 호기심의 싹 틔우기: 딱딱한 책장보다는 마음껏 흙을 밟고 뛰놀며, 세상 모든 것에 감탄하는 상상력의 날개를 폅니다.
〇 홀로서기의 첫걸음: 스스로 먹고, 씻고, 몸을 가꾸며 하나의 독립된 생명으로 살아갈 조용한 습관들을 몸에 익힙니다.
이러한 일들은 오직 부모와 할아버지가 자애로운 마음으로 보살펴야 합니다.
2. 청소년기 (7세 ~ 18세) : '나'라는 숲을 찾아가는 방황의 푸르름
초·중·고등학교라는 시절의 터널을 지나는 시기로 이는 나만의 빛깔을 찾아가는 거친 여정이자 자아를 정립하는 계절입니다.
〇 이름 없는 마음의 이름 찾기: '나는 누구인가',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가슴에 품고 나만의 가치관을 세워갑니다.
〇 더불어 사는 숲의 법칙 익히기: 교과서의 활자를 넘어, 친구라는 거울을 통해 부딪치고 갈등하고 해결하고 다독이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웁니다.
〇 넘어짐의 미학 체험하기: 작은 실패들을 안전하게 경험하며, 흙 묻은 무릎을 스스로 털고 일어나는 마음의 탄력성을 기릅니다.
이 시기가 정말 중요한 것은 들깨 모종처럼 이때 한번 꺾이면 그게 엄청 큰 영혼의 상처로 남아, 일생동안 트라우마에 지배당하고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싱클레어에게 데미안이 필요했듯이 훌륭한 선생, 훌륭한 친구, 훌륭한 선배가 길 안내자가 되고 보호자가 되어야 하는 시기입니다.
3. 청년기 (19세 ~ 39세) : 홀로 서서 바람을 맞는 서늘한 여름
부모의 아늑한 품을 떠나, 스스로 내 삶의 항로를 결정하고 자립하는 뜨거운 도전의 시기입니다.
〇 삶의 무게 감당하기: 내 손으로 생계를 일구고, 내가 내린 선택의 결과를 담담히 책임지는 어른의 뒷모습을 배워갑니다.
〇 사랑이라는 깊은 우물: 진정한 우정을 나누고, 뜨거운 사랑의 열병을 앓으며, 나 아닌 타인을 내 가슴속에 품어주는 넉넉함을 익힙니다.
〇 겨울을 위한 곳간 채우기: 평생을 자양분 삼을 직무의 전문성을 벼리고 익히며, 삶의 경제적 토대를 차분히 다져나갑니다.
이 시기는 영적으로 덜 성숙된 미숙한 청년들을 유혹하여 자기 도구로 삼으려는 사악한 것들을 분별하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세상에는 진짜 선(善)과 선처럼 보이는 사이비 선이 공존합니다. 생명을 사랑하되 시냇가에 심은 버들과 같이 나날이 더 푸르게 되도록 도움을 주는 영혼이 진정한 선(善)이고 진정한 신(神)입니다. 나머지는 가짜입니다. 나는 그동안 사이비에 대한 글을 많이 남겼는데 이 중요한 시기에 가짜에게 홀려가면 인생이 정말 힘들어집니다.
4. 장년기 (40세 ~ 64세) : 붉게 익어가는 황금기
인생의 가장 찬란한 확장이자, 사회적 책임을 어깨에 지는 중년의 계절입니다.
〇 그늘이 되어주는 삶: 일터와 사회에서 쌓아 올린 지혜의 노하우로 열매를 맺고, 뒤따라오는 아랫세대를 향해 따스한 그늘을 내어줍니다.
〇 체력이라는 자산 저축: 신체의 저녁노을이 시작되는 시기이기에, 다가올 겨울을 버텨낼 건강한 체력을 정성껏 가꿉니다.
〇 노을 너머의 풍경 준비: 은퇴 이후의 삶을 위한 경제적 준비와 더불어, 홀로 남았을 때 내 영혼을 채워줄 고즈넉한 취미와 관심사를 틈나는 대로 가꾸어 둡니다.
5. 노년기 (65세 이상) : 하얗게 비워진 겨울, 혹은 새로운 새벽
수명이 늘어난 오늘날의 겨울은, 두 번의 깊은 호흡으로 나누어 맞이해야 합니다.
1) 전 노년기 (65세 ~ 80세) : 삶의 갈무리와 평온
일터에서 물러나 지나온 날들을 수용하고 통합하는 완성의 시간입니다. 후회와 미련으로 밤을 지새우기보다 "이만하면 참 열심히, 잘 살아왔다"며 스스로의 삶을 대견하게 여기고 토닥여야 합니다. 은퇴와 노화, 그리고 정든 이들과의 이별이라는 '상실'을 자연스러운 계절의 변화로 받아들이며 마음의 평온을 지킵니다. 평생을 걸쳐 거둔 지혜를 사회에 아낌없이 나누고, 문학과 예술의 향기 속에 하루하루를 감사함으로 채웁니다. 이 시기에 깊은 외로움이 찾아 오는데 외로움과 싸워서 이겨내야 합니다. 그걸 이겨내는 방법은 텃 밭 가꾸기가 정말 도움이 됩니다. 텃 밭은 나에게 빛나는 태양을 하루 종일 쬐게 해 줍니다. 싱그러운 생명의 기운을 듬뿍 안겨 줍니다. 생텍쥐페리가 말했듯이 "내가 길들인 장미"가 시간이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 하게 합니다. 베개에 머리를 뉘면 쉽게 잠이 듭니다.
나는 벌써 전 노년기의 중반을 지나고 있습니다. “인생의 나그네 길을 지나는 순례자”라는 노랫말이 가슴에 와닿는 나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흘려 보내는 시간이 아까워서, 후인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될 살아 낸 긴 이야기를 글로 남기고 싶어서 이런 글도 쓰는 것입니다.
2) 후 노년기 (80세 ~ 90세) : 아름다운 여백과 축복
아직 제가 살아 보지 않은 미지의 시간입니다만 추측하건데 삶이 풀잎 끝에 맺힌 이슬(초로)과 같음을, 머리가 아닌 온몸의 세포로 깨닫는 나이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신령한 존재에 영혼을 의탁하고, 세상을 깊은 품속에 녹여내며 오직 남은 이들을 향해 축복의 기도만을 올리는 거룩한 마무리의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굽이쳐 흐르는 세월의 끄트머리에 서면, 이 짧은 백세의 소풍길 위에서, 오직 존재하기 위해서 비교와 시기와 질투와 반목과 다툼으로 살아왔음을 알고, 문장을 비틀지 않고서도 시바다 도요 할머니 처럼 "약해지지 마!"라는 시도 쓸 수가 있고, 김형석 교수님 처럼 참으로 유익한 가르침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내 뒤를 밟아오는 후인(後人)들은 내가 걸었던 그 자갈길을 반복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10년 앞을 내다보며 십만 양병설을 주창했던 율곡처럼 십년 앞의 내 모습을 생각하며 10년 먼저 준비하고 산다면 후회 없이 살아 내게 될 것입니다.
6.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1948년에 건국된 이 나라가 올해로 일흔여덟의 나이를 맞았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나라가 구성되는 것이니, 나라인들 그 구성원의 생로병사에 따라 흥망성쇠가 되풀이되지 않겠는지요? 이 모두가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거늘, 다음 세대를 낳아 귀하게 기르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혁신해 나가는 성의정심이 있어야 대대손손 번영을 이어갈 것입니다. 고래로부터 백 년의 사직을 이어가는 나라가 드문 것은 성의정심하는 이 이치가 쉬워 보이지만 말처럼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서서, 머물 집이 없어 결혼과 아이라는 축복을 포기한 채 살아가는 자식세대인 청년들을 볼 때 내 지난 삶도 실패한 삶이라는 생각 자꾸 듭니다. 대책이 없는 게 아닌데도 정작 대책을 세워야 할 자리에 있는 자들이 전부 제 욕심에 눈이 멀어 "네 삶은 네가 알아서 살아 내라"며 고개를 돌립니다. 세상을 고쳐야 할 정치 조차 무엇이 진정한 우리의 아픔인지 관심조차 없고, 하나 같이 제 욕심의 배를 채우기에 급급합니다. 시장도, 기초의원도, 국회의원도, 대통령도 오직 표만 의식하고 팬덤을 만들어 끌고 다니고 있으니 그저 한낱 화려한 직업꾼이나 연예인으로 전락해 버린 듯합니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 저 푸른 젊은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거름입니다. 직업도, 집도, 명예도 다 넘겨주고, 나와 같은 노인은 그저 흙냄새 가득한 고향으로 돌아가 작은 농막 하나 지어두면 족합니다. 텃밭을 일구며 내 부모가 그리 살다 가셨듯, 여린 생명들을 아끼고, 사랑하고, 찬양하는 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렇게 삶을 즐기다가, 때가 되면 지는 낙엽처럼 이 세상을 고요히 하직하여 거름이 되는 것. 그것이 밤 하늘에 별이 빛나는 이치이자 신의 섭리가 아닌가 싶습니다.(2026. 6. 19 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