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현의<어떤 숲의 전설>
박양근
문학은 비유로 짜인 얼개이다. 비유로 이루어진 문학은 설명이 아니라 언어 속에 함축된 의미를 열거한다. 현실을 직접 보지 않고 언어를 통해 바라보고 해석은 정보가 아니라 사물이 지니고 있는 맛과 느낌을 나눈다. 이미지와 의미를 언어로 구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하는 집’이라고 하였다. 언어는 존재를 풀이하고 존재는 언어에 의지한다는 점에서 ‘집’이라는 개념은 언어망이라는 말보다 더 구체적이다. 사물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기법이 비유이다. 비유 중에서 중요한 기법이 은유와 환유이다.
그날은 우리 모두가 움직이는 나무였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누가 그렇게 하자고 선동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그날 우리 다섯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훌훌 옷을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쏟아지는 장대비를 온몸으로 받으며 칠흑의 소나무 숲 속으로 뛰어들어 갔었다.
소나무 숲은 어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속의 배경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공간이다. 그는 숲에서 놀았고 솔가지를 꺾어 방을 데웠고 고구마 서리로 군것질을 하였다. ‘ 보지 않아도 느끼는 숲이 아니라 보지 않아도 아는 숲“이 되면서 환상적인 분위기와 경험이라는 리얼리즘을 함께 공유한다.
우리는 발소리를 줄였다. 그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맨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비에 젖은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따스한 느낌마저 들었다. 숲이 그대로 가슴에 안겨왔다. 아니다. 숲의 가슴에 우리가 안겼다. 맨발로 달릴 때도 느꼈지만 빗물에 젖은 땅에 앉으니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나는 길게 드러누웠다. 온몸으로 떨어지는 빗물을 손으로 만져보며 나도 어느새 한 그루 소나무가 되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한여름 밤의 숲에서는 현실에 대한 절망을 이겨내고 ‘사람도 동물인 것’이라는 인식에 공감한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숲 속에서의 장난이 실은 인간의 원초적 욕망임을 이해한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숲은 현재 무엇이 되어있는가.
그 때의 그 숲은 지금도 그대로 있을까. 어린 날의 고향이 그립다. 그 숲이 그립다. 그때의 동무들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지금은 한 명도 연락이 되지 않고 있는데 그들 또한 나처럼 어린 날의 전설을 그리워하고 있을까. 그 숲을 잊지 않고 있을까. 숲은 그렇게 그런 동화를 지어내고 있을까.
문학이란 언어가 지닌 기존 의미에 저항하는 것이다. 어떤 말을 통해서 다른 말을 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은유와 환유의 기법을 적절하게 구사하면 은유와 환유는 서로를 배제하지 않으면서 수필에서 감성과 서사의 유기성을 더 높일 수 있다.
문학이란 기존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일탈하는 행위이다. 일대일의 교환가치를 지닌 평상어는 인간이 지닌 표현 욕망을 충분하게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기존 언어 가치에 안주하려는 작가에게 던지는 경고의 깃발이 은유와 환유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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