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대를 갈무리하며.
건천댁 이미경
가을 하늘이 무척이나 청명하다. 이젠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어와 계절이 변해감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한여름 빨간 고추를 따느라 땀도 많이 흘렸는데, 이젠 고추도 잘 익지 않는다.
그동안 따지 못한 고추를 따기 위해 뒷밭으로 향했다. 지난봄에 땡초 5개, 풋고추 10개, 오이고추 5개, 꽈리고추 5개씩을 심었는데, 이제는 나무가 제법 커서 고추 구분이 잘되지는 않는다.
빨간 고추를 따보니 20개가 채 되지 않았다. 여름내, 일주일에 한 번씩 따면 한 소쿠리씩은 따서 말렸는데, 이제는 빨간 고추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서리 내릴 때도 다가오고, 더 둬도 안 될 거 같아 남편에게 고춧대를 뽑아 달라고 했다,
퍼런 포장을 깔고 뽑아 놓은 고춧대를 옮겨 앉은뱅이 방석에 앉아 고추를 땄다. 고춧잎 나물을 좋아하는 엄마를 위해 싱싱한 고춧잎은 따로 모았다. 아직 자라지 못한 아기 고추, 빨개질락 말락 하는 고추, 갓이 두꺼워져 그냥 먹기에는 부담스러운 고추 등 똑같은 건 하나도 없는 가지각색의 고추가 두 소쿠리나 되었다. 고추 소쿠리를 주방으로 옮겨 깨끗하게 씻고,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며, 저 고추들로 무얼 할까 궁리해 본다.
지난해에는 고추 장아찌를 좋아하는 올케를 위해 고추 장아찌를 담고, 큼직한 고추와 땡초는 썰어서 얼려 두고 겨우내 먹었다. 설탕에 재우는 고추청과 땡초를 다져 잔 멸치를 넣고 볶는 고추 다짐도 만들었다. 올해는 고추 장아찌와 고추 썰어 얼리기, 볶음 요리할 때 써 볼 요량으로 썬 고추를 소주에 재우는 고추 소주를 담아야겠다.
큰 고추와 땡초를 따로 빼도 남은 고추는 한 소쿠리가 넘는다. 그 고추들의 꼭지를 딴다. 고추 장아찌 먹을 때 간장이 튀지 않고 잘 스며들라고 과도로 앞코를 일일이 따니 예삿일은 아니다. 우리는 장아찌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이 장아찌를 20개나 먹을지, 말 지인데. 내가 오지랖이 넓은 탓에 하는 수고이지만, 할 때마다 힘든데 왜 매년 또 하는지 잘 모르겠다.
간장:소주:설탕:식초를 2:1:1:1의 비율로 섞어 설탕이 완전히 녹도록 저었다. 나는 더 맛있으라고 매실액도 한 컵 추가했다. 유리병에 고추를 차곡차곡 담고, 장아찌용 간장을 붓고 넓적한 돌로 지그시 눌러 준 후 랩을 씌워 뚜껑을 닫았다. 이제 보름 정도 있으면 고추 장아찌를 먹을 수 있다. 만들기는 힘이 들지만, 그 뜨겁던 여름을 이겨낸 고추를 가까운 친지, 동생들과 겨우내 맛있게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집 뒤 텃밭에 먹을 것만 조금 짓는데, 밭은 우리에게 참 많은 걸 돌려주는 것 같다. 뜨거운 여름 풀 메는 수고와 시시때때로 방충제를 뿌려야 하는 수고가 좀 있지만. 스스로 크고,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아낌없이 내어준다. 우리는 제 가진 것을 아무런 조건 없이 쉬이 내주지는 못하는데 말이다.
땅과 작물들은 생긴 대로, 달리는 대로 내어준다. 그래서 땅을 어머니에 자주 대입하는가 보다. 두세 시간을 자리에 앉아 고추를 따며 많은 생각이 스쳐 갔다.
나도 이제 장성한 자식을 둔 어머니란 자리에 있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욕심 없이 내 것을 아낌없이 내어줄 수 있을까?. 말로는 ‘내가 좀 손해 보고 살면 편해’ 하면서도 막상 그 상황에 맞닥뜨리면 마음속에 작은 욕심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아직 내 안에 끊어내지 못한 욕심이 많은 탓이리라.
자기를 내려놓는 게 제일 편한 길이면서도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고춧대를 갈무리하며, 가을에서 겨울로 향해가고 있는 내 인생도 어떻게 갈무리를 해나갈까 생각하며 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