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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벽, 너를 더듬다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3.09.13|조회수85 목록 댓글 0

제5회 천강문학상 수필부문 우수상

벽, 너를 더듬다

                                                        허 효 남

 

벽을 본다. 벽, 너는 등을 보이며 돌아앉아 있다. 더는 나아갈 곳 없는 절해고도의 끝점에서 안간힘으로 무한대의 시간을 버티고 있는 듯하다. 척박한 지평에 뿌리를 내리고 바람조차 부딪혀서 흩어지고 마는 몸체를 우두커니 지탱하고 있는 벽, 온종일 정물에 불과한 너의 잿빛 등뼈 사이로 오도독거리며 언어들이 막 깨어난다.

입을 열지 않는다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허공으로 산화될 무연한 것들을 주워 담으며 도리어 너는 발설할 것들을 제 안으로 찬찬히 되 넣고 있다. 너의 곁을 떠다니는 먼지와 역습하는 기류, 눅눅한 습기와 싸한 감정의 동요마저도 너에게는 언어의 씨앗이 된다. 면적을 가늠할 수 없는 넓은 가슴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쓸어 담으며 안으로 발화하는 법을 너는 익히는 중이다. 너는 발설에 불과한 소리로 뭇 사람의 귀에 다가가려는 것이 아니라 장방형의 깊숙한 파장으로 누군가의 심연에 울림이 되고자 한다.

단절을 말했던가. 사람들은 수많은 말들이 그들의 가슴 사이로 가 닿기도 전에 파도처럼 부서지는 아픔을 에둘러 ‘벽’이라고 부른다. 대인관계에서 부딪히게 되는 고통과 소통의 한계를 너로 의미화 했지만, 정작 너는 부정적인 갈채 속에서도 의연하기만 하다. 세상이 너에게 부여한 오염된 낙인에 너는 구태여 변명하려 들지 않는다. 남루하게 얼룩진 오해 속에서도 섣부른 해명으로 자신을 미화하기보다 당당히 제자리를 지키는 떳떳함이고자 한다.

이스라엘에는 너를 ‘통곡의 벽’이라고 부르는 유대인들의 성지가 있다. 광대한 너의 실체 앞에서 그들은 내면을 표현하는 의례를 행한다. 애도로 얼룩진 담벼락 틈새로 축축이 눈물이 고여 있지만, 그것은 단순한 슬픔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을 풀어놓고 마주하게 되는 너는 이미 단절이 아니라 소통의 통로가 된다. 그곳은 절대자에 대한 의탁처이며 정신적인 아픔의 치유처이기도 하다. 마르고 거친 너의 등이 어떤 이에게는 온기를 전하는 품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향해 뒷모습만을 보이고 있는 네가 실은 앞가슴 전부를 열어 온몸으로 떨고 있는 자를 보듬어 주기도 하는 듯하다.

거친 풍파에 전신을 내어주고도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너를 기억한다. 폭우에 휩싸여 화살 같은 빗줄기들이 너의 어깨로 쏟아질 때에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으려던 모습은 처연하기만 했다. 그것은 단순한 우직스러움도, 결연한 의지가 깃든 행위도 아니었을 테다. 질퍽한 세상의 끝에 뿌리를 내린 존재의 서글픈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함부로 쓰러질 수도, 넘어지지도 못해서 세상 한 곳에 버티고 서있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이의 표상과도 같았다. 축축이 젖어드는 몸을 곧추세우며 담벼락으로 흐르는 사념들을 되뇌던 초췌한 모습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너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수많은 존재들이 제 질량의 무게를 이겨가며 그처럼 이 시간을 지탱해 가고 있을 터이다. 속내를 감춘 아우성들이 가슴벼락으로 아롱져도 단단한 빗장으로 자신을 채우며 사람들은 날마다 직립을 갈망한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도 견고한 벽돌 하나를 더 올리며 스스로를 세우고 또 세우는 시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메마른 너의 등으로 드리워진 고달픈 그림자들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무뎌지는 뼈를 일으키는 방향어가 되는 까닭에서이다.

회색빛 명암으로 물들여진 네가 봉쇄수도원마냥 고독하게만 보여 지는 날도 있다. 온종일 적요함으로 둘러싸인 너의 몸체로 바람이 스쳐 가면 수많은 은유어들이 너에게서 쏟아져 내린다. 가로막힌 암담함보다는 의지할 수 있는 정으로 너와 함께하겠다던 어느 작가의 시구가 너의 뒷모습에서 읽혀진다. 세상의 모든 벽은 문이라고 말하던 한 노시인의 목소리가 너의 등 뒤로 여음처럼 울려오기도 한다. 정지한 듯 비어있는 시간 사이로 너는 외롭게 서있을 뿐이지만, 그렇다고 결코 혼자는 아닌 듯하다. 끝없는 사막처럼 적막하게 펼쳐진 너로부터 오아시스를 찾아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십 년이 넘는 칩거 생활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세기의 걸작을 완성한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떠오른다. 외부와의 단절을 선언하며 병약한 상태에서 고독만을 벗 삼았던 그에게 밀폐된 벽인 너는 내면으로의 침잠이고 삶의 진실을 찾아가게 해주는 출구였을 터이다. 프루스트는 바깥세계와 온전한 차단을 위해 너를 코르크 마개로 장식하고 그것들을 하나하나씩 바라보며 기억의 세계를 쫓아갔다고 한다. 의식의 흐름을 따르는 각고 속에서 너는 그에게 광활한 세계를 열어주는 환상의 뜨락과도 같았을 것이다. 그것은 공간과 시간의 경계에서 묵묵히 서있는 단절 가운데서 한 영혼을 자유롭게 해 주었는지도 알 수 없다.

하루가 저물어 가는 시간, 조용히 너의 등에 내 등을 맞대어 본다. 시공의 끝점에 기대자 사위가 온통 등을 돌리고 선 듯 잠잠하기만 하다. 사계절조차 무채색으로 피었다 지는 너에게 더욱 깊숙이 등을 밀착하자 조용히 뛰고 있는 너의 심장이 느껴지는 것만 같다. 묵언수행으로 평온히 다져진 너의 맥박이 뼈를 관통하며 내게로 전해져 온다. 누구도 모르게 척추가 되어 세상을 세워온 너에게서 침묵보다는 말로 스스로를 앞세우던 모습을 돌이키게 된다. 흔들리는 많은 것들 가운데서 기둥처럼 버티고 선 우직함이 또 한 번 나를 부끄럽게 한다. 더는 나아갈 곳 없는 끝에서도 호흡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반향점을 찾는 너에게로 손을 뻗는다. 나지막이 울려오는 너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너의 시간들을 하염없이 더듬는다.

밀려오는 저녁 어스름 사이에서 너는 꿈이라도 꾸는 걸까. 부동의 자세로도 너의 가슴에는 내일이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너의 등으로 석양이 옮겨가자 거대한 파노라마들이 호활하게 스쳐간다. 끝과 끝을 오가는 극간의 지점에서 너는 이미 아득한 곳을 비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을빛 저녁을 가로질러 곧 동터올 새벽으로 다가설 너의 등으로 가만히 내 꿈도 기대어 본다. 수직으로 서서 드넓은 수평으로 만물을 포용하는 너에게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무뎌져 가는 세상의 뼈를 끊임없이 곧추세울 너에게 내 등을 맞대며, 오늘도 나는 너를 더듬고 또 더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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