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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경북문화체험 수필 금상, 불광/도무웅

작성자이랑 김동수|작성시간13.09.23|조회수116 목록 댓글 1

<제4회 경북문화체험 수필 금상>

 

 

                                                             불광

 

                                                                                                  도무웅

 

벽에 걸린 그림을 본다. 짙은 흑갈색의 굵다란 두 고목 사이로 산사(山寺)의 고즈넉함으로 이어지는 외길이 조용히 누워 있다. 길 오른쪽 산기슭은 흑청색의 숲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고, 앞쪽의 작은 나뭇가지들만이 석양을 받아 어두운 적막감을 약간 희석해주고 있다. ‘세한도(歲寒圖)’라는 제목의 어쭙잖은 내 그림이다.


이는 조선조 후기의 서도가요, 고증학자인 추사(秋史) 선생의 유명한 작품 제목이기도 하다. 나 역시, 당시 세한의 혹독한 추위와 어렵고도 힘든 한 사연을 겪는 과정이었다. 그러한 내 심경이 제주도 유배지에서도 심의(心意)를 중시하시던 선생의 고매한 인품이 생각나서, 외람되긴 하나 감히 같은 작품 제목을 붙였다. 그림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때의 일들이 생각나곤 한다.


삶에는 끊임없는 이해(利害)의 탐욕이 있게 마련인가. 십여 년 전 그때, 믿었던 후배의 배신으로 많은 것을 잃었다. 물질상의 피해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심경 또한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급기야 아내와 나는 집을 떠나야 했다. 도착한 데가 바로 그림의 그곳, 영천 은해사였다.


사찰 입구, 금포정(禁捕町) 송림은 일체의 살생을 금한 곳이라 했다. 보화루까지의 울창한 소나무 숲은 품위를 갖춘 아름다움과 함께, 솔의 고고한 지조와 절개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이로써 마음에 큰 위안을 얻었다. 이 풍광을 가슴에 담고 싶어 이젤을 세우고 유화(油畵) 그림에 몰두했다. 그림붓으로 아픔을 치유하고 정신적 안정을 되찾으려는 내 극기(克己)의 수단이었다.


그림에는 혼을 담는다고 했다. 세한도라는 이름만 같을 뿐, 바랐던 추사의 예술혼은 흉내도 낼 수 없었다. 선생의 것에는 송백(松柏)의 기개를 빌려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이 담겨 있지만, 내 경우는 배신한 후배에 대한 증오의 ‘한(恨)’이 서려 있었다. 그 ‘한’의 골이 깊었다. 그림이 제대로 될 수 없었으니 내 심신의 치유 역시 바랄 수 없었다.


그림이 다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동안 내 모습을 눈여겨보시던 한 스님께서 저녁 공양을 함께하자고 했다. 뜻밖이었다. 겨울 저녁 산사는 차분했고, 스님의 맑은 시선과 부드러운 음성은 그동안 얼어붙어 있던 내 마음속 긴장의 끈을 늦춰주기에 충분했다. 송암(松巖)스님이었다. 공양을 마친 후, 차(茶)를 권하면서 천천히 말문을 여셨다.


“처사님의 그림에 쏟는 심경은 같이 온 보살님으로부터 잘 들었습니다. 모든 괴로움은 좋거나 싫음의 집착에서 오지요.” 사랑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었다.


좋고 싫음은 인간의 기본감정이 아닌가. 갓 태어난 아기가 가장 먼저 깨닫는 것 또한 이들이다. ‘좋은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속성이다. 그럼에도 호(好), 불호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 함은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내 생각을 간파하신 듯, 스님은 조용히 나를 이끌고 가셨다.


스님이 데려간 곳은 ‘불광(佛光)’ 편액 앞이었다. 처음 보게 된 편액이었다. 다른 것과는 달리, 두 글자의 세로 길이가 같지 않은 이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글씨는 힘이 있어 살아있는 듯 꿈틀거렸다. 강한 문체에 압도되어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는데, 등 뒤의 스님이 추사 선생의 글씨라고 하셨다. 마치 선생 앞에 엄숙히 머리 숙이고 있는 듯했다. 편액을 보여주신 스님의 숨은 뜻을 헤아리기 위해 잠시 눈을 감았으나 얼른 딴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佛光’은 부처님의 후광인 자비광명의 상징이지요.” 그것은 어둠을 없애고 진리를 밝히는 의미이다. 삶이 저질러온 나쁜 습성, 부끄러운 모습도 환하게 비추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빛이다. 좋고 싫음의 집착을 버리는 지혜도 곧 이 ‘불광’과 통한다고 하셨다.


산사의 저녁 시간이 깊어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내 ‘한(恨)’의 심경을 스님에게 토로할 수 있었다. 이야기를 들으신 스님은 지난날의 지은 업을 풀고, 용서하며 살라는 긴한 충언을 주셨다. 용서는 증오심으로부터 자신을 자유롭게 해 주며, 그 증오의 집착에서 벗어나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 그 때문에 용서는 곧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었다.


스님의 이 ‘버림으로써 얻게 되는 불광의 깨우침’에 마음이 편안해지고, 증오의 집착을 털게 되니, 관용의 여유가 생기는 듯했다. 놀랍게도 다음날, 그 심한 정신적 갈등과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사람에게도 회귀본능이 있는 것인가. 그 후, 다른 삶의 곡절에 부딪힐 때마다 집착을 버리는 불광의 교훈으로 해법을 얻곤 했다. 그런 사연들 속에 점차 추사 선생의 고매한 정신을 더욱 가까이하고 싶은 갈증이 일었다. 그것이 송암 스님을 뵙고 그 편액을 보고 싶은 바람(願)으로 변해, 드디어 십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어느 화창한 봄날, 은해사를 다시 찾게 되었다.


금포정(禁捕町) 송림은 십년지기처럼 반갑게 맞아주었다. 하지만 마음의 짐을 벗게 해 주신 스님은 이미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으며, ‘세한도’의 그 경관 또한 당시와 달리 많이 훼손되고 없었다. 내 삶의 뿌리 깊은 회한도 돌아볼 기회마저 허락되지 않았으니 모든 것을 잊으라는 섭리인가.


이윽고 대웅전 앞, 박물관에 다다랐다. 들어서니 ‘佛光’ 편액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순간, 숨결이 멈춰지고 신음 같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오랜 세월에도 편액의 느낌은 변함없었다. 선생은 이 작품으로 수백 성상을 거쳐, 부처님의 불광 즉, 자비 광명을 깨우쳐 주고자 했음이 틀림없었으리라. 궁금했던, 선생의 예술혼이 깃든 편액의 태동 일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은해사 주지 스님은 불에 탄 절을 중건하면서, 추사의 글씨로 편액을 걸고 싶어 그에게 간청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글을 주지 않아 직접 찾아갔다. 추사는 벽장을 열고 그 속에 가득 찬 ‘佛光’의 수많은 파지(破紙)를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한 작품을 골라 주었다. 편액 하나를 위해, 추사 선생도 수없이 쓰고 다시 쓰는 수고를 마다치 않았다.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주지 스님은 편액을 만들면서 긴 ‘佛’ 자의 마지막 획을 망설임 끝에 ‘光’ 자의 세로길이와 같게 잘라 장방형으로 만들어 버렸다. 후일 절을 찾아 이를 본 추사가 큰 노여움으로 편액을 떼어오라 하여 절 마당에서 불살라 버렸다. 주지 스님은 크게 당황하여 즉시 사죄하고 원모습으로 다시 만든 것이 지금의 작품이라고 했다.


‘佛’ 자의 오른쪽 마지막 긴 획으로 말미암아, 편액의 세로가 길어져 거의 다섯 자에 가까운 정방형이다. 그로 인해 왼쪽 아랫부분에 생긴 여백에 유난히 눈길이 간다. 그곳에 선생이 남기신 심오한 예술적 감각과 생각의 여유가 조용히 전해온다.


선생은 이미 가고 없으나, 서릿발 같은 영혼이 맑은 물소리와 함께 고찰의 뜰을 노닐면서 후손들에게 삶의 크나큰 교훈을 일러주시고 계신 듯하다. 새삼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러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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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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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희자 | 작성시간 13.09.23
    가을날 아침에 읽기 좋은 글입니다.

    ‘佛光’은 부처님의 후광인 자비광명의 상징'
    어둠을 없애고 진리를 밝히는 의미.
    삶이 저질러온 나쁜 습성,
    부끄러운 모습도 환하게 비추어,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지혜의 빛이다.
    좋고 싫음의 집착을 버리는 지혜도 곧 이 ‘불광’과 통한다...

    사랑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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