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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수필

2013 평사리문학대상 수필

작성자이랑 김동수|작성시간13.10.14|조회수203 목록 댓글 4

                                                

 

 

                                                      민들레 영토

 

 

                                                                                                         조옥상

 

 

 

봄을 알리는 기척이 옹골지다. 보도블록이나 콘크리트 틈새에서 겨울잠이나 제대로 잤을까. 환한 등을 지천으로 켜 놓고 어서 봄 마중 나오라고 납작한 손을 흔든다. 방긋거리는 노란색 길을 따라 걷노라니 어둑했던 동면(冬眠)에서 해방된 기분이다. 마음이 상쾌하니 꽃들의 환대에 가벼운 답례 정도는 해야 되지 않나 싶다.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할까. 아님 엎드려 입을 맞출까. 생뚱맞은 예의에 민들레도 어색한 표정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에게 다 내주는 자연의 섭리가 언제 이렇다 할 생색을 냈던가. 어디든 내려앉으면 내 자리 내 집이니 저리도 평온한 얼굴인 것을. 너른 들이나 막다른 골목 어느 귀퉁이에서도 해맑게 피는 민들레. 우아한 향기와 반듯한 자리를 탐내지 않음은 본시 소박한 민초의 천부적 태생일까, 아님 다스려 쌓아 온 내공일까. 비바람을 친구인 양 맞아 주고 무수한 발길에 밟히면서도 아직 더 밟힐 일에 초연한 민들레. 그런 자세는 사실 어떤 힘에서 나오는지 수월찮이 세속에 물든 나는 연륜에 걸 맞는 인격을 좀 배우기 위해서라도 그 순수한 성향을 꼭 알아내고 싶다.

 

땅에 딱지처럼 붙은 민들레에게 다가가 일단 키를 낮추어 보니 미세한 꽃술 속에 나름 소우주가 들어 있다. 모두 모두 제자리에서 가만가만 노래하는 화음이 들린다. 초대받길 원하는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풀꽃나라 노란 성문(城門)이 열린다. 환영하는 팡파르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나의 범속한 것들이 익숙한 틀에서 빠져나오려고 애를 쓴다. 여러 지체(肢體) 중 가슴 하나가 마땅히 버려야 할 한 움큼을 절대로 못 내주겠다는 듯 꽉 쥐고 있다. 내 안에 또 다른 나를 조종하는 본질을 본다는 것��� 칼 융의 아니마아니무스의 어려운 심리학을 모르더라도 무의식으로 잠재한 인격 형성에 있어 가치 있는 발전이고 반전이 될 것 같다. 이성과 감성이 잘 조화되는가 하면 어느새 이율배반적인 속물근성으로 버무려지고 한 낮 태양 아래 훤히 보이는 자신을 거부하고 싶은 실리에 약삭빠른 또 다른 조악한 두뇌의 지시가 스멀거린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 안에 팽팽하게 맞서 존재하는 이분법, 반기를 든 그 무엇이 영 마뜩찮다. 머리에서 가슴까지 잴 수 없을 만큼 멀다는 걸 알겠다.

 

장막이 없는 나라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초라한 것들이 웅성거린다. 육중한 몸을 싣고 다니던 신발마저 벗어 버리니 발바닥을 간질이는 폭신한 풀이 시원하다. 밤이면 은하수가 냇물에 얼비치는 청정(淸淨)나라. 봄의 향연이 펼쳐지는 축제 마당에서 두 팔을 벌리자 확 트인 땅, 그 자유의 날개가 축배의 잔을 들잔다. 분명 새로운 세상, 어느 여행지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신선한 곳, 일단 지상권이 없으니 주민센터 따위가 있을 리 없다. 집도 빌딩도 없으니 흙 자체가 보석이다. 민들레의 천성을 알겠다. 일찍이 소유를 벗어난 경지를 터득한 고로 사심의 꼭대기는 절대 모를 꽃이리라 생각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일단 민들레나라 성문을 나왔다.

 

본초강목에 거론된 민들레가 입을 한번 떼겠단다.

나는 여러해살이풀. 각처의 들이나 길가 또는 집 근처에 흔하게 살고 있어요. 국화과로 서 잎자루에는 날개가 없지만, 잎은 깊게 갈라지고, 가장자리에 거친 톱니가 있어요. 줄기 는 없고, 잎은 밑동에서 나와 방석처럼 옆으로 퍼지면서 이른 봄 풀잎 사이의 중심부에서 꽃대를 밀어 올리죠. 그 끝에서 노란�� 꽃을, 가만, 지금부터가 중요한 제 모습입니다. 한 송이씩 질서 있게 하늘 보고 피죠. 꽃이 진 자리에서 흰 솜털이 달린 씨앗의 날개가 돋아 나 하얗고 둥근 모양으로 부풀어요. 이는 갓털이라 합니다. 며칠 머물다 바람을 타고 날아가죠. 머물던 자리는 돌아보지 않아요. 밟혀서 짓이겨지는 만큼 가벼이 씨를 뿌려야 하는 제 숙명을 아시겠죠? 잎을 자르면 흰 즙액이 나오지만, 어린잎은 여러분 식탁에 올라 달콤하면서도 쌉싸래하게 미각을 돋우기도 해요. 한방에서 포공영(蒲公英)이라 하여 땅 위 로 올라온 전초(全草)가 약재로 쓰여요. 너무 흔한 저지만 이제라도 꼼꼼하게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별일, 식물나라에 국적을 둔 자칭 촌스런 민들레라 하더니 일목요연하게 소개를 잘했지 싶어 박수를 쳐야겠다. 짝짝짝, 분명 자생력이 강한 식물로 추위도 잘 견디는 풀이다. 가상하고 의미 있는 특징은 풀잎의 숫자만큼 꽃대가 올라온다는 것이다. 늦가을에 풀밭을 살펴본 적이 있다. 민들레가 억지춘양 피어 있었다. 꽃의 소임이 가상하여 여러 날 눈을 맞추었건만 며칠 후 민들레는 하얀 이불을 덮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 ! 민들레는 돋아난 풀잎이 몇 개 인지 잊지 않았구나, 겨울 문턱에서도 애썼던 거구나. 그게 마지막 꽃대였구나.

 

한때 허상을 좇던 세월이 있었다. 돌담에 기대선 소박한 해바라기보다는 울타리에 불붙는 화려한 장미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뜻한 바를 이루고자 외국으로 떠나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동생이 줄줄이 있는 집안 장녀로서는 도저히 엄두도 못 낼 꿈이었다. 꿈꾼 후에 엄연한 현실일 뿐인 텅 빈 공간은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어 비참한 법이다. 희망이 소등된 캄 캄한 세상. 삶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이성을 잃지 않은 지성에 더하여 지혜가 필요하다. 봄이었던 그해도 민들레는 저마다의 길손을 반겼지만, 가당찮은 꿈으로 부푼 내 동공에 보일 리 만무였다. 무심히 밟았으니 매지구름 속 허무 외에 무엇을 보았겠는가. 지극히 보편적인 곳에 타당한 진리가 있다는 것을 자맥질하는 흙탕물 속에서는 깨닫지 못한다. 죽을 만큼 외로운 방황도 곁을 내주지 않는 아집 때문에 더 오래 헤매는 법이다.

 

숨 가쁘게 달려온 길에서 민들레를 만났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부드러운 붕대로 감싸 주는 민들레 순례자를 환영해 주는 희망찬 들녘. 홀연히 날아가는 갓털마저 초원의 지붕 게르를 밝혀 주는 등불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덕에 둥글둥글 묻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촉을 틔웠다. 민들레를 좋아해도 괜찮을 값을 제대로 치른 것일까.

 

유목민의 삶터가 초원이듯 민들레는 해님처럼 맞아 주는 어머니 같은 꽃, 변방으로 내몰린 이방인을 위한 사랑의 꽃이 분명하다. 줄기는 없지만 훌훌 날아가 앉은 자리에 여린 꽃대를 끙끙 밀어 올리는 민초의 힘. 세상 어느 등보다 밝아서 사심이 없고 키도 작지만, 자존심이 깐깐한 소신 있는 꽃이다. 홀연히 떠나는 날이 축제의 날이요, 앉는 곳이 그의 영토다. 긴 방황 중에 만난 민들레의 처방전은 지상권을 주장하며 누워 잘 평수에 급급했던 욕심까지도 제 영토에 고이 묻어 주었다. 내 삶이 완성되어 떠나야 할 날에도 어쩌면 갓털을 앞세워야 발길을 떼지 싶다.

 

환한 등을 따라 걷는다. 노란 촉수는 어디만큼 가야 둥글게 충전될까. 허공을 떠다니던 하얀 기우를 뿌리로 내린 것인지 언 땅을 파 보면 민들레 뿌리는 옹골지게 박혀 있다. 틈새를 비집는 자생력으로 버들가지의 물오르는 소리도 맨 먼저 듣고 마중 나갔을 것이다. 그 수고의 꽃을 피워 놓고 어서 봄 마중 나오라고 재촉하지 않던가, 사실 민초나라 민들레에게 무엇 하나 베푼 것도 없는데, 봄소식에다 꽃등까지 너무 고마워서 미안할 뿐이다. 갓털이 날아가는 궤도에 저공으로 나는 비행기조차 없는 이유를 알겠다. 천성이 그러하니 가는 길이 제 길이요, 내려앉는 곳이 민들레 영토라고 식물나라 수장이 땅! ! ! 명명했을 것이다.

 

올봄에도 꽃등축제가 열린다는 초대장이 조만간 날아들 것이다. 민들레는 초록빛 선상(線上)에 핀 노란 아리아. 그 들녘으로 사뿐히 걸어 나갈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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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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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경순 | 작성시간 13.10.14 이랑선생님, 경주에서 직접 만나뵈어 반가웠습니다. 그날 잘 돌아가셨는지요?
  • 답댓글 작성자이랑 김동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15 예, 저 또한 반가웠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부르는 바람에 김 선생님과는 별 대화를 못한 게 아쉽습니다. 팸투어 일정이 예년보다 짧아서..., 좋은 날 또 뵐 날이 있겠지요. 깊어가는 가을만큼 글세계도 깊어지길 바랍니다 ^^*
  • 작성자박동조 | 작성시간 13.10.15 이랑 선생님!
    반갑습니다.

    조옥상님은 시로 등단을 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천천히 맛을 느끼며 읽어보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백송자 | 작성시간 15.04.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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