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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꽃/구자분

작성자이랑 김동수|작성시간13.11.05|조회수136 목록 댓글 10

 

 

                                        담배꽃

 

 

                                                                                                 구자분

 

 

  한 남자가 버스터미널의 나무의자에 기대어 담배에 불을 붙인다. 맛지게 머금었던 연기를 천천히 뿜어낸다. 깊디깊은 한숨 내뱉듯이. 명주실처럼 피어오르는 자색연기가 이윽고 허공 중에 사라져 버린다. 매캐한 약간의 냄새 외엔 아무런 흔적 도 남기지 않은 채 바람처럼 흩어지고 마는 허망 그 자체인 담배연기.

 

  외숙모는 그렇게 공허로이 이승과 작별했다. 한 점 혈육도 남기지 않고 담배연기 마냥 덧없이 스러져 갔다. 오십의 생애가 그리도 허무할 수 없었다. 한여름 잠시 돋았다 아쉽게 사라지는 무지개였다. 시나브로 증발해버린 아침이슬이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하였다. 찬연한 예술로 혹은 위대한 업적으로 한평생 살고 간 자취가 뚜렷이 각인 되는 사람도 있는 반면, 보통은 자손으로 이 세상에 나왔던 표를 남긴다. 불임의 외숙모에게야 그마저 가앙 없는 한낱 꿈일 뿐이었으니. 무자식 상팔자, 말이 그러하지 절손의 형벌만큼 모진 게 없거늘 기박하게도 배태조차 못해 본 외숙모. 무엇으로도 채울 길 없는 여인의 깊은 한 때문일까. 외사촌은 피우지 않는 담배를 외숙모는 검지와 장지가 샛노랗도록 즐기셨다.

 

  내 유년의 뜰에 내려서면 언제나 반색을 하고 거기 있는 외숙모. 그 분이 내게 쏟은 애정의 질량은 본능적이라는 모정과 맞먹을 정도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본집에 가는 나를 배웅하고는 솔밭에 들어가 하염없이 흐느꼈다는 외숙모. 지나던 사람이 발길 멈추고 사연을 묻기에 짐짓, 아들 군대보내고 오는 길이라며 목놓아 마냥 울었다는 외숙모다. 나 역시 외숙모와 떨어지기 싫어 장롱 속에 꼭꼭 숨은 채로 나오지 않아 엄마 애를 태우게도 했다는데.

 

  60년대의 농촌 살림을 살았어도 정미소를 운영하여 험한 농사일이나 궁핍 같은 건 겪지 않은 외숙모였지만 결정적인 한 가지, 자손이 주어지지 않았다. 집안의 훈기이자 활력소 그 자체인 아이가 없다보니 절로 무미건조해지는 데다 수심으로 그늘 채운 게 나였다. 어린 생질녀로 하여 비로소 집안에 웃음소리와 활력이 감돌았으니, 외숙 내외분이 나를 귀애함은 친자식 이상이었다. 자연히 나는 외삼촌 네를 집보다 더 좋아했다. 방학은 물론 주말마다 삼십리길 마다 않고 내달릴 정도로.

 

  산야에 녹음 깊고 메꽃이 지천으로 깔린 하지 무렵. 우연찮게 열린 고향 행이었다. 어린 날의 추억이 수놓인데다 외숙 내외분이 영면에 드신 그곳. 교차되는 애틋함과 설레임을 싣고 터미널을 출발한 버스가 당진 읍내를 지나 대호지 방향으로 접어들자 눈에 드는 밭이랑 거지반이 담배밭 일색이었다.

 

  의젓한 덩치에 묵직하게 넌출거리는 크고 너른 잎새가 외래 식물인 컴프리와 비슷한 담배. 건조한 토질에 적합하다는 담배농사가 지역 특성과도 잘 맞아떨어지는 걸까. 군내에 재배 신청 농가가 계속 늘어난다는 옆좌석 아낙의 자긍심 어린 설명이다. 그만큼 농가 소득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는 효자품종도 달리 없다는 부언을 잊지 않는다. 담배 농사는 밑거름만 충실히 해 주면 병충해 염려도 적을 뿐더러 뱀도 꼬이지 않는데다 잔손길이 별로 가지 않아 농사짓기가 대체로 수월한편이라고 한다. 전매춤인 담배인지라 전량 수매를 원칙으로 하는 계약재배를 하기 때문에 판로 걱정도 없단다. 종자를 배당받아 파종한 뒤 순을 잡아주고 꽃을 따주는 품 수고만 하면 저 혼자 쑥쑥 저란다는 담배.

 

  그 옛날 예닐곱적, 외숙모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나선 담배밭에서 내가 해 본 일은 꽃따기였다. 이파리가 무성한 줄기의 맨 끝 대궁에 수줍은 듯 연분홍으로 갸웃이 피어난 담배꽃. 댕겅 잘리는 꽃대를 안쓰럽게 여겼던 기억보다는, 높다란 담배 키를 따라잡자면 까치발을 하고도 항상 모자랐던 팔 길이만 자꾸 생각켜진다.

 

  그렇게 휘어잡다 줄기가 꺾이면 외숙모는 "내 심심초 순한 걸로 장만했구나." 하시며 대궁 째로 허리춤에 끼웠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푸르른 담배 아랫단이 누렇게 익어 잎을 딸 시기가 가까운 듯 보인다. 밑자락부터 따낸 담배잎을 줄줄이 볏짚으로 엮어 그늘진 데다 말리던 정경이며, 껑충하게 솟은 담배건조장의 황토벽 풍경이 한 장 삽화되어 되살아난다. 신문지 쪼가리도 귀해 거친 갈잎에 말아 피우던 엽연초 독한 내음까지도.

 

  식물에게 있어 꽃을 피운다는 것은 전력을 기울여 생애를 마무리 짓는 대역사이다. 뿌듯한 절정의 순간, 그러나 경제성 및 효울성이 우선인 사람들 입장으로는 그마저 용납해선 안된다. 온 기운과 영양의 총결집인 꽃을 불필요하게 개화시키느니 더 유용한 방향으로 에너지를 돌리겠다는 발상은 합리적인 영농과 학의 소산이리라.

 

  감자알을 굵게 하려고 감자꽃을 따내듯 담배잎을 실하게 키우려면 담배꽃을 미리 따내야 한다. 종자식물의 번식기관으로서의 역할이 주어진 꽃. 대부분의 식물은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그 속에 씨를 품어 다음 대를 예비한다. 꽃은 맺었으되 제몫을 다 못하고 하릴없이 밭고랑에서 시들어가는 담배꽃.

 

  종족번식 수단으로 피우는 꽃을 인위적으로 거세당한 담배꽃의 비탄쯤이야 위무될 수 있는 명분이라도 있지만 봉오리조차 품어보지 못한 통한을 한숨 토하듯 담배연기로 날리며 한세상 적막하게 마감한 외숙모. 안타까운 건 미완으로 끝난 무용(無用)의 세월이다. 더욱이 풀숲 봉분마저 기억하는 이 없는 쓸쓸하게 잊혀짐이다.

 

  내 회포만 애연할 따름인가. 차창밖엔 녹음이 욱욱청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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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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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희자 | 작성시간 13.11.07 담배꽃처럼 스러져 간 외숙모...
    이 가을에 어울리는 글이군요.
    미완의 삶.
    요즘 저는 요양병원에 일하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완성한 삶이 있을까요?
    저는 모두가 미완의 삶을 살다 가는 것 같습니다.
    죽음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사람이 보기 힘들다는 뜻이지요...
    열반,
    평온히 열반에 드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나 자신부터 되돌아보는 시간이 많아진답니다.

    이랑 선생님,
    잘 지내시지요?
    내리던 가을비가 그쳤습니다.
    밤을 건너며
    잎을 실하게 돋우기 위해 자신을 버리는 담배꽃을 그려봅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랑 김동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07 희자샘은 노인을 돌보니 생각할 게 많겠습니다.
    노인 돌보는 일은 어지간한 심성이 아니면 하기 어려운데,
    다랭이마을은 심성도 곱게 만드나요?
    어쨌건
    밤낮이 바뀐 일상에서 건강 유의하시고요 ^^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 작성시간 13.11.08 이랑 선생님, 웃기는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

    203호 박을쇠 할머니가 주무시다가 소리를 지릅니다.
    "야야, 안 일어나나?" 하고 외치니
    이점달 할머니가 "일어나야제!" 하십니다.
    잠결에 두 분이 대화하시는 걸 보고
    웃음을 참을 수 없어 막 웃습니다.
    조용하던 병동이 제 웃음소리에 그만...
    이러면서 일을 합니다.
    웃기도 하고 안 되어보이기도 하고.
    눈이 따갑습니다.
    밤 근무 들어와 전초전 한 판을 벌였더니 나른합니다.
    그래도 오십 명에 가까운 환자들을 돌볼 수 있음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벽에 걸린 시계가 막 한 시를 가리킵니다.
    긴 밤을 어찌 보낼까 궁리 중입니다.
    날이 샐 때까지 무사히 밤을 건널 수 있길!
  • 답댓글 작성자이랑 김동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1.08 을쇠, 점달, 분돌, 말옥....., 이런 이름이 우리시대의 어머니죠.
    전쟁과 가난을 온몸으로 이기고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분들입니다.
    하하 웃다가도 돌아서면 아릿한 그것의 정체는 뭘까요.
    동화 같다가 소설 같다가......,
    아!
    80년대 노래 한 곡이 생각나네요.
    그것은 인생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 작성시간 13.11.08 퇴근을 했습니다.
    무사히 밤을 건너길 바랐는데
    새벽 네 시에 종례 할머니를 먼 길로 보내고 왔습니다.
    협심증과 무기폐 질환을 앓고 계시던 할머니가 새벽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네 시쯤 소피를 보시고 침대에 오르신 후 갑자기 심장이 멎었습니다.
    아흔이 넘은 분이시니 어쩌면 평안히 가신 것 같습니다.
    옆에 계신 할머니들이 참 편안히 가셨네 하시더군요.
    숨이 멎은 할머니께 좋은 길, 자유롭게 가시라며 손을 꼭 잡아드렸습니다.
    서서히 몸이 식어가는 종례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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