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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마(靑馬 )의 쾌족

작성자정재순|작성시간14.05.03|조회수75 목록 댓글 2

 

 

 

청마(靑馬 )의 쾌족  /  홍억선

                                                                                                                 

                                                                                                                
갑오년(甲午年)인 올해를 청마(靑馬)의 해라고 한다. 백마, 흑마, 황마니 하는 말들은 익히 보아왔고, 삼국지에서 관우가 탔다는 적마도 읽어보았으나 푸를 청(靑)자를 쓰는 청마는 아무래도 낯이 설다. 그런데도 이 생경한 이름이 쓰이는 까닭은 10간 12지에 따라 돌아오는 갑오년의 갑(甲)자가 청색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청색은 오방위에 따르면 동쪽이요, 계절로는 봄에 해당한다. 거기에다 말은 근육질의 동물이 아닌가. 갑오년 벽두에 눈을 감고 한 해를 점쳐 보니 봄날의 푸른 들판을 마냥 질주하는 말떼들의 기운생동이 꿈틀댈 수밖에 없다.
이 푸른 기운을 일찍이 받아들여 스스로 청마라 칭한 이가 유치환이다. 고서 ‘대학’에는 ‘쾌족’이라는 낱말이 나온다. 누가 뭐라 해도 나 자신의 삶이 하루하루 유쾌하고 내가 결정하고 행한 일이 만족스럽다면 이미 행복한 인생이라는 뜻이다. 문단사를 살펴보건대 유치환처럼 한생을 이처럼 쾌족하게 살아간 이도 드물다는 생각을 한다. 시인으로 널리 알려진 그가 경주, 대구에서 두루 교장을 지내고 부산남녀상고 재직 중에 사고사를 당하였으니 한편으로는 존경받는 중후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그런 그가 1945년 통영여중에서 한 여인을 만났다. 한 사람은 서른일곱의 유부남이었고, 한 사람은 스물아홉 청상이었다. 한 사람은 국어 교사였고 또 한 사람은 가사(家事) 교사였다. 세상의 눈으로 보아서는 몇 사발의 욕으로도 감당 못할 일이겠으나 그가 죽는 그날까지 이십 여 년 동안 무려 오천여 통의 서한을 보낸 것은 청마의 쾌족으로 두둔하지 않을 도리가 없겠다. 이미 세상이 다 아는 연정사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만 서로에게 절절했던 시편을 옮겨본다.

일어나니 세시 반/ 달은 넘어가고 없고 미륵산 조용한 그림자 위에/ 또렷한 별 한 개가 보입니다 / 저 별이 당신이 아닙니까?//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동안에도/ 나를 지켜 비쳐주고만 있을 당신의 애정// - 청마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가/ 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 정운

아무래도 그가 사랑타령이나 읊조리고 돌아다닌 시인 나부랭이라고 할까 두렵다. 유치환 그는 서정주, 김동리와 더불어 생명파 시인으로 로 분류된다. 동시대에 청록파라 불리던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이 자연주의에 의탁하여 제각각 시의 배면을 노래하였다면 생명파는 인생이 무엇인가에 깊이 천착하였다. 생명파를 인생파로 고쳐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들이 늘 되돌아보며 자문자답하는 과제다. 돈을 벌고, 명예를 좇아가고, 눈만 뜨면 아귀 같은 세상에서 지지고 볶는 이 인생이란 무엇인가. 외람되게 유치환의 시에서 삶을 풀이해 보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는 ‘생명의 서’에서 인생에 대한 회의를 풀지 못할 때, 살아가면서 느끼는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할 때 이 세상에서 가장 극한의 땅 아라비아 사막으로 가보자고 했다. 고독하고 허적한 막다른 끝에 가보면 허위와 위선의 때가 묻지 않은 원시 본연의 자세, 순수한 자기의 모습을 만난다고 했다.
우리 인생에서 원시 본연의 자세, 순수의 모습이라는 것이 어떤 것일까? 단 한번 다니러 온 우리의 인생, 그저 오만잡사에 얽히고설키는 데서 벗어나 하루하루를 즐겁고도 만족하면서 사는 것이 아닐까.
올해는 청마의 해다. 이제 곧 동풍이 불고, 들판에는 푸른 풀들이 방창하는 봄이 올 것이다. 인생, 한번 재미나게 살아보고 싶다, 청마의 발굽으로 저 세상을 유쾌하게 달려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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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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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손훈영 | 작성시간 14.05.07 오랜만에 마주하는 선생님의 글입니다.
    반갑군요.
    글내용을 보니 올해 발표하신 글인 듯 싶은데
    정재순님 덕분에 읽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정재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5.08 유려한 문체가 돋보이는 홍 선생님의 글이 지금의 계절과 어울리지요?
    바꾼 카페명을 신고할 겸, 인증도장 찍는 마음으로 올렸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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