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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 (우수상)

작성자이랑 김동수|작성시간14.09.02|조회수363 목록 댓글 22

              제6회 천강문학상 수필 (우수상)

 

 

                                             헌책방을 읽다

 

                                                                                            김이랑(본명:김동수)

 

  텅 빈 가게, 빛바랜 간판만이 여기가 한때 버림받은 책들의 처소였음을 알린다. 아무런 안내가 없는 것으로 보아 머지않아 지도에서 사라질 모양이다. 발품을 보태 법서를 사던 시절부터 허기를 채워준 곳인데, 허전한 걸음으로 나는 다른 보물섬을 찾아 떠난다.

  헌책방의 질서는 뒤죽박죽이다. 정해진 자리는 형식일 뿐 계급이나 서열이 없다. 펄벅의 대지 위에 한국의 야생화가 피고 백과사전에 눌린 시집이 숨을 못 쉬겠다고 엄살을 떠는가 하면, 돈키호테가 이순신 장군에게 창을 겨누며 어서 칼을 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큰스님의 어깨에 발을 척 걸친 동화를 보며 명랑만화가 깔깔거리고 명심보감이 옆에서 웃음을 꾹 참으며 앉아있다. 법전을 깔고 앉은 사형수의 참회록과 명작 위에 드러누워 낮잠을 즐기는 잡지는 단연 압권이다.

  설욕을 벼르는가, 예리한 지혜에 탄탄한 논리를 입고도 무명 한 조각만 걸친 화보에 패한 철학이 침묵하고 있다. 처세술만 찾는 세상에게 단단히 삐쳤는지, 인문학은 구석에서 등을 돌리고 있다. 바깥에는 저고리에 지문조차 찍히지 못하고 소박맞은 시집과 나이조차 까맣게 잊은 수필집이 단체로 결박당한 채 마지막 봄 햇살을 쐬고 있다. 자릿값도 못한 죄, 저들은 곧 저울대에 올라 영혼이 가난한 세상에게 동전 몇 닢 건네고 떠날 것이다.

  한물간 몸이지만 세상에게 할 말은 있다. 책장에 빳빳이 서서 지적 허영의 배경이 되는 건 싫다. 방구석에서 뒹굴다가 냄비 밑에 깔려 뜨거운 맛을 보느니 싸늘한 아랫목을 데우는 불쏘시개가 낫다. 가난한 고시생의 법서처럼 몸이 닳도록 읽히고 싶다. 서점 창고에서도 밀려나 산골로 전학 온 소녀처럼 옷자락에 먼지가 묻을까 새침을 떨고 있는 새 책은 아직 모른다, 벌 나비에게 탐닉 당하지 못하고 스러지는 꽃의 슬픔을.

  앞만 보고 달리는 세상에 지나간 시간을 잡아두는 곳이 있다는 건 그나마 다행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것들이 과거로 유폐幽閉되었을까. 성벽 같은 책장과 지층처럼 쌓여있는 책 속에 묻히면 나는 잃어버린 과거를 찾아 떠난 방랑자다. 역사의 강물에서 노를 젓다가 티벳에서 불어오는 명상의 바람에 마음을 실어도 본다. 눈에 띄는 책장을 훑다가 잘 우려낸 문향文香에 취해 언어의 소우주를 유영하기도 한다. 이곳저곳 뒤지다가 반짝이는 무엇을 발견했을 때, 그 기쁨은 방금 제본을 마친 신간보다 새것이다.

  활자로 낸 길을 가다보면 누군가의 흔적을 만난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낙서가 있는가 하면 잠시 멈추었다가 가라는 신호도 있다. 앞서 간 사람은 어째서 밑줄을 주욱 긋고 그 위에다 빨간 별을 켜놓았을까. 마음의 풍경風磬이 울리는 바람의 길목이거나, 반짝이는 깨달음 한 조각 주운 곳이거나, 아니면 문장 너머에 있는 함수를 풀지 못해 건너뛴 자리일 것이다. 나보다 먼저 떠난 사람이 몇 번이고 되돌아와 서성거린 자리에서 나는 이 땅에 온 영혼들의 지적방랑을 읽는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형이상을 헤매는 철학자. 태초에 생성된 미립자를 찾아 까마득한 밤하늘을 떠도는 천체물리학자, 진화의 고리를 찾아 황량한 사막을 헤치는 생물학자. 문명의 사금파리를 찾아 굳은 땅을 파는 고고학자, 혼돈에서 진리의 조각을 찾는 방랑자는 외롭다. 아니, 깨달음을 찾아 홀연히 떠난 붓다만큼 고독해야 한다. 과거로 떠난 것들이 퇴적된 세계는 두꺼운 침묵으로 말을 하기에.

  배낭을 메고 홀로 변산반도로 떠난 적이 있다. 이 땅의 숨은 연대기가 차곡차곡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채석강彩石江, 지층을 몇 장 넘기면 백제의 병졸이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지르고, 몇 권 넘기면 털북숭이 조상이 사전에 없는 말을 걸어오고, 계속 넘기면 거대한 공룡이 달려들 것 같은 풍경은 말 그대로 압권이었다. 발아래에서 파도가 뭐라고 철썩거리는데, 두꺼운 시간의 지층 앞에서 나는 한없이 납작해지고 말았으니, 반세기 동안 써내려온 내 일기는 낱장에 지나지 않음을 그날에야 알았다.

  나를 읽으면, 목마른 세상을 적시는 물 한 잔이나 될까. 영혼의 때를 닦는 한 소절 시도 아니고 내면의 풍경소리를 깨우는 한줄기 법문法文은 더욱 아니다. 사람의 향기가 그리운 가슴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는 산문이라면 자릿값이라도 하겠으나 통속소설처럼 자기도취에 빠져 나열한 활자, 내 전기傳記도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서 웅크리다가 폐기될지 모른다. 미리 알았다면 기승전결이라도 갖추었을 것을, 더 성찰하고 교정했다면 문장이 얄팍하지는 않았을 것을, 헌책방에는 지난 삶을 뒤져 나를 재발견하는 내가 있다.

  내 삶도 반 이상이 과거로 퇴적되었다. 인생 이모작을 꿈꾸며 몸값을 한껏 낮추어도 불러주는 곳이 없어 이제는 정착할 기슭을 찾고 있다.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 시인지 소설인지 정체성을 찾는 잡지처럼 표류하다가 외딴 헌책방에 닿았을 때 산란한 마음이 정돈되는 까닭은 왜일까. 내일을 위해 오늘을 알뜰하게 살지만 내일은 오늘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는다. 낡고 닳아 쓸모없이 보여도 어제는 오늘에게 추억과 지혜 그리고 마음의 휴식을 준다. 어제의 모든 것이 한 자로 정돈되는 헌책방에서 헌, 그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미학을 품은 단음절 언어이기 때문이리라.

  고독한 방랑자들이 찾아낸 지식과 사상의 채석강, 헌책방에서 알았다, 반짝이는 것은 현란한 조명 아래 나 보란 듯 서있는 게 아니라 삶의 뒷면에 안 보일 듯 숨어있음을. 세상의 중심에서 밀려나 그동안 못다 읽은 책장을 넘기다가 찾았다, 뒤죽박죽 내 안의 우주에 질서를 잡는 것은 두껍고 근엄한 법전이나 얇고 약삭빠른 처세술이 아니라 허름하고 컴컴한 구석에서 스스로 캐낸 별임을.

  책은 해져도 활자에 담긴 의미는 낡지 않는다. 시대의 조류에 쓸려 헌책방이 사라져도 어느 날 문득 우리는 길을 떠날 것이다, 지금은 금맥을 찾아 도시라는 이름의 정글을 뒤지지만, 멍석자리에 누워 별을 헤던 우리는 누구나 별똥별 주우러 산 너머로 떠난 지적 방랑자이므로.

 

 

김이랑(본명:김동수)

 

- 1960년 태백에서 출생해 정선에서 성장

- 영남대 법대 중퇴

- 1회 대한민국 독도문예대전 대상

- 1, 4회 경북문화체험 수필대전 은상

- 2012 낙동강전투 스토리텔링 우수상

- 2013 전국유배문학 스토리텔링 동상

- 인터넷 한겨레 논객

 

<수상소감>

 

 풀밭에 개미들이 왁자하다. 산 너머 먹구름이 밀려오나 보다. 여윈잠 뒤란 이슥토록 풀벌레가 칭얼거렸다. 내 이랑에 씨알 하나 움트나 보다. 마음이 가라는 길을 거역하다가 돌부리에 발 접질려 오금 찡그리기도 하는 보행의 나날, 번민이 끓는다면 그 내압은 차라리 풀빛이어라. 한바탕 소나기 두드린 강가, 열병 식힌 민들레처럼 아무 일 없다는 듯 모락모락 몸을 말리고, 밤새 별빛 먹고 자란 꽃 한 송이 반짝반짝 세상에 바칠 터이니.

 

 세상에 글 한 송이 바쳤다고 하늘이 내리는 상을 받았다. 분에 넘친다는 걸 알기에 천강이라는 이름에 흠집을 내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재정을 지원한 의령군, 손을 잡아준 심사위원, 허드렛일을 맡은 의령문인, 여러 선생님께 감사한다. 이에 보답하고 또 이름값을 하려면 한동안 열병을 앓지 싶다.

 

 

-심사평-

 

헌책방을 읽다는 사람살이의 다양한 모습과 오늘의 현실을 두루 생각하게 하는, 인문적 성찰 능력이 돋보이는 글이다. ‘헌책방을 통해 주변으로 밀려난 것들을 따라가는 이 글의 시선은 자본-현실의 지리(地理)뿐만 아니라 생의 보편적 내력까지 생각하게 한다. 헌책에서 먼저 읽은 이의 흔적과 마음을 헤아리는 섬세함, 헌책방의 풍경을 유머러스하게 형상화하는 능력은 서로 겯고 트면서 이 글을 맛과 영양을 두루 갖춘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돌올한 개성과 구체적 실감을 모두 갖춘, 좋은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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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이랑 김동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9.05 고맙습니다.
    조선생님도 좋은 글 쓰시길 바랍니다.
    추석 잘 쇠십시오 ^^
  • 작성자김영미 | 작성시간 14.09.05 안동 고택에서 뵈었었지요. 토담방에서 홍교수님을 중심으로 앉아 이야기를 나눌때 이런 날이 있으시리라 짐작했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이랑 김동수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4.09.05 그랬지요.
    처음으로 이름을 알린 자리라서
    지금 생각하니 기억이 새롭습니다 ^^
  • 작성자최태준 | 작성시간 14.09.11 글 좋군요! 김선생님 수상 축하드립니다.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백송자 | 작성시간 15.04.17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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