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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섣달 그믐밤의 아부

작성자人山 이희순|작성시간18.02.19|조회수131 목록 댓글 1



섣달그믐 밤에 잠이 들면 굼벵이가 된다고 했다. 우리는 잠 귀신한테 이겨보려고 넉동내기나 화투놀이를 하고 부각이며 과줄, 식혜 등등 이것저것 먹고 마셔도 보지만 다 헛일이었다

결국 잠이 들어버리는데 설날 아침에 굼벵이가 되어있지 않은 이유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섣달그믐에는 밤이 다하도록 집안 곳곳에 불을 밝혔다. 큰방, 작은방은 말할 나위없고 칼바람이 무시로 드나드는 부엌에도 솥 안에 촛불을 켜놓았다. 마루에는 바람벽의 중방에 등을 걸고 멀찍한 뒷간에는 서까래에 초롱을 달아 밤을 밝혔다. 외양간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잡귀가 어둠을 틈타 숨어 들게 해서는 안 되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던 60년대 이야기다. 귀신의 처소가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의 속이라는 걸 깨달은 지금에야 옛 풍습이 새롭다.

 

우리 내외와 큰 아들, 둘째 내외와 손녀딸 이렇게 여섯 식구가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저녁을 먹었다. 나는 함께 밥을 먹는다는 데서 명절의 의미를 찾고 싶다. 맏이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버지, 그림 잘 그리세요?”

아무렴, 그림 하면 한 소질 있었지!”

흐흐흐, 이따가 실력이 다 드러나게 돼있거든요.”

나는 아들의 말을 한 귀로 흘려보내며 내 그림솜씨의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다과를 즐기고 나자, 맏이가 수상쩍은 안을 냈다. 아무런 설명도 없이, 다섯 개의 번호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 나는 3번을 찍었고 다들 차례로 번호를 불렀다. 마치 사다리타기와 같았다. 내가 고른 3번은 바로 안사람이었다. 아내에게는 며느리가, 맏이한테는 제 동생이, 둘째에게는 내가, 며느리한테는 제 아주버니가 간택되었다. 아들은 서로 간택한 사람의 얼굴을 스마트폰으로 촬영토록 했다. 느닷없이 맏이가 검정 사인펜과 미니 스케치북을 하나씩 돌리더니, 각자 선택한 사람의 촬영한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리라는 것이었다. 10분이 주어졌다. 오늘의 심사위원장 겸 유일한 심사위원은 다섯 살짜리 손녀딸이었다. 주니가 날만큼 보아온 아내의 얼굴이건만 막상 그려보려니 여간 어려운 노릇이 아니었다. 없는 솜씨에 마음만 바빠진 나머지 엉터리 작품이 되고 말았다. 왕년에는 제법이었는데 나이 탓에 손이 굳은 게 틀림없었다.

 



십 분은 거짓말처럼 지나갔다. 아내가 그린 며느리의 초상에는 모딜리아니의 데생이 숨을 쉬고 있었다. 맏이가 스케치한 제 동생은 90년대의 인기 만화 <슬램덩크>의 정예 멤버를 빼쏘았다. 둘째의 손끝으로 빚어진 내 모습은 거울을 대하는 듯 정밀했다. 며느리는 제 아주버니를 순진한 총각으로 투영해냈다. 참 대견한 실력들이었다. 우리는 서로의 초상화를 평가하며 웃기도하고 실망과 긍지와 경탄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의 운명은 심사위원에게 달려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그림을 받아들고 심사위원 앞에 나란히 앉아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되었다. 심사위원은 좀처럼 눈길을 주지 않았다. 모두들 심사위원의 시선을 끌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아양과 너스레를 떨며 간절한 아부의 눈길을 보냈다. 어린 심사위원은 싱글거리며 이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한참 만에 1등이 결정되었다. 철부지 심사위원은 제 아빠의 초상화를 가장 먼저 손짓했다. 자연히 맏이가 1등을 거머쥐었다. 나는 3등이었다. 둘째가 그린 것이다. 어떤 변명도 소용이 없었다. 상금은 5등에도 지급되었는데 다 같은 금액이었다. 맏이는 어디서 이런 재미있는 놀이를 습득했을까. 하릴없는 총각이 나이만 보태게 생겼다.

 

맏이가 SNS에 그림을 공개하여 네티즌의 평가를 요청했다.

둘째가 그린 내 초상이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실물과 꼭 같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내가 그린 아내의 얼굴은 단 한 표를 얻는 데 그쳤다. 무언가 반성해야 될 것 같은 완전한 패배였다.

한밤의 사생대회가 어느덧 무술년의 새 날을 열었다. 상서로운 기운은 온 가족이 모여 함께 웃고 흥겨워하는 이곳 거실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역시 사람 속에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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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임병식의 수필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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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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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꿈꾸는별 작성시간 21.10.22 가정의 화목함을 이야기하듯 잔잔하게 풀어내셨네요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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