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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수필

대구일보 수필대전 대상작품입니다.

작성자풀곷(임 은주)|작성시간11.10.04|조회수108 목록 댓글 3

북비고택(北扉古宅)

- 한개마을을 찾아 -

집은 주인의 얼굴이다. 안락함을 구하기 위해 지었지만 집에는 세월과 함께 배어 든 주인의 사상과 문화가 있다. 건물의 형태와 나무결, 가구 하나, 화초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도 주인의 의지와 정성이 스며있다. 집안을 천천히 거닐다 보면 빈 공간 하나에서도 주인은 금방 정체성을 드러내게 된다. 집은 또한 그리움이고 어머니다. 인간의 삶이 긴장과 휴식의 반복이라고 한다면 집은 풍선 같은 욕망을 토닥여 주고 휴식의 편안함으로 우리를 달래준다. 욕망의 크기가 깊고 질길수록 마음의 줄은 팽팽하고 지속적으로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한다. 집은 일상에서 받은 상처와 수모를 닦아주고 치유해 주는 삶의 모태이며, 하늘에 걸린 달을 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삶의 원형이며 뿌리다.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산리에 자리한 한개마을은 15세기 중엽 진주 목사를 지낸 이우가 터를 잡은 이래 성산 이씨 집성촌이 되었다. 마을 앞을 흐르는 백천에 큰 나루터가 있어 한개마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데 좁아진 강폭에서 시간의 무심함과 함께 그곳을 오갔을 정겨운 인적들을 상상해 본다. 70여 채의 한옥과 초가가 그림처럼 어우러져 마을은 서너 집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사람들이 살고 있다. 마을 입구에 초병처럼 자리 잡은 초가집 한 채는 내부가 정갈하여 집주인의 강기 같은 기운이 느껴진다. 남산골 딸각발이 선비 같은 집이다. 길 가 넓은 논에는 벼이삭들이 짙푸름을 더해가고 나무에는 매미소리 요란하다.

마을 고샅길로 접어드니 이웃과 경계 지은 담장의 선이 아름답다. 지형을 따라 자연스럽게 구부러진 담장은 나보다 전체를 생각하고 이웃을 생각하는 마을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이익을 우선하다보면 경계는 늘 차가운 직선일 수밖에 없을 터이지만... . 집들이 옹기종기 어깨를 기대고 붙어 있는 모습은 도타운 이웃 간의 정리를 보는 것 같다. 그런 마음들이 담장 아래 접시꽃, 봉선화, 도라지꽃으로 피어 예쁘다. 한개마을은 타임머신을 타고 수백 년 전 과거로 들어온 느낌을 주지만 고향에 온 듯 푸근한 것이 전혀 낯설지 않다. 어디선가 낯익은 얼굴들이 달려나와 덥석 손이라도 잡아줄 것 같다.

한개마을에 여러 고택들이 있지만 가장 눈길을 끄는 집은 북비고택(北扉古宅)이다. 18세기 후반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인물은 이석문이다. 북비고택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 영조가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었을 당시 호위무관이었던 이석문은 사도세자를 살려야 한다고 왕에게 간하다 곤장을 맞고 관직에서 쫓겨난다. 그 뒤 고향에 돌아와 사랑채 담장을 헐어 북쪽으로 문을 내고는 ‘북비(北扉)’라 이름 붙였다. 북쪽으로 난 사립문이란 뜻이다. 매일 새벽 의관을 정제하고 비명에 죽어 간 사도세자의 혼을 달래는 뜻으로 북쪽을 향해 절을 올렸다. 훗날 잘못을 깨달은 영조가 그의 충정을 가상히 여겨 다시 불렀지만 끝내 사양한다.

볼록 솟은 언덕 위에 지은 북비고택의 구조는 특이하다. 대문을 들어서니 사랑채 중간사랑채 안채가 차례로 나온다. 정방형으로 지은 일반 양반가옥과 달리 내부가 개방형이다. 건물을 한쪽으로 짓고 마당을 안채까지 일직선으로 연결시켜 맑은 기운이 집안으로 밀려드는 느낌이 든다. 가솔들이 대문 옆에 있는 사랑채 앞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대주의 동향을 관찰할 수 있게 배려한 점은 집안의 주인으로서의 책임의식이 엿보인다. 높은 기단 위에 지은 사랑채에는 주인의 깃발 같은 권위가 걸려있고 친근한 높이를 고려하여 지은 안채는 편안함이 서려있다. 안채에 올라서니 담장 너머 들판과 좌우 산들이 한 눈에 잡힌다. 너무 높으면 집안이 답답하고 너무 낮으면 내부가 허전하다. 자연과의 교감을 먼저 생각하고 이웃과의 소통을 중시한 주인의 세심한 배려가 느껴진다. 중간사랑채의 누마루에 붙은 팔걸이 장식은 아기자기한 멋을 내었다.

사랑채 앞 담장을 헐어 ‘북비문’을 만들었다. 한 사람이 허리 굽혀 통과할 수 있는 쪽문이다. 북비문을 보니 문득 앙드레지드의 소설 ‘좁은 문’이 생각난다. 멸망에 이르는 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고 생명에 이르는 문은 작고 좁아 찾는 사람이 적은 법이다. 정파의 음모에 휘말려 이성을 잃고 자식을 죽이려는 전제군주에게 법도의 부당함을 지적하며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것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고통을 마다않고 어떤 이기심도 버려야 들어갈 수 있는 문이다. 이석문은 쉽고 편한 길을 버리고 명예로운 고집을 선택했다. 담장 위의 기와는 그 기개와 절의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북비’ 문패는 이석문의 성격처럼 소박하지만 뚜렷하여 힘이 있다.

이석문의 행적을 좇다 보면, 모진 일제(日帝) 시절을 남다른 기상과 외고집으로 버텨낸 한용운이 떠오른다. 시인이자 승려요, 독립투사였던 한용운은 겨울에도 늘 냉방에서 지냈다. 조선이란 땅이 감옥이 되었는데 어찌 불 땐 방에서 잘 수 있느냐는 생각에서다. 냉돌방에서 석상처럼 사색에 잠기면서도 한 점 흐트러짐이 없이 늘 꼿꼿한 자세를 보였다. 이런 그에게 사람들은 ‘저울추’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빈한한 생활을 해 오던 한용운에게 만년이 되어 지인들이 성북동 언덕에 집 한 칸을 마련해 주었는데 그는 집의 방향을 굳이 북향으로 할 것을 요구했다. 남쪽에는 보기 싫은 조선총독부가 보이니 차라리 볕이 덜 들고 추운 겨울을 참아내겠다며 북향을 고집했다. 나라를 강탈한 일제와 나날이 변심하는 지도자들을 맨정신으로 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석문의 멋있는 고집은 한용운의 곧은 기백으로 이어져 면면히 겨레의 심장을 흘러간다. 대쪽 같은 기개와 외골수를 보인 선조(先祖)를 한개마을에서 확인하는 일은 유쾌하다.

수시로 찾는 방문객을 위해 항시 열어놓은 대문에서 집주인의 대범함을 본다. 쭈볏거리며 살피지 않아도 된다. 안채 섬돌 위에 하얀 고무신 한 켤레가 주인인 듯 집을 지키고 있다. 마당에는 잔디를 깔아 눈이 시원하다. 담장 아래 심은 허리 반듯한 노송에서 설한풍에도 견뎌낼 꼿꼿한 주인의 몸짓을 배우고 반원형 반송에서는 부드러운 주인의 성정을 배운다. 임창복 교수가 말한 작품주택 같은 집이 북비고택일 것이다. 사랑채 중간 사랑채 안채 마당으로 구성된 공간에 집주인이 추구하는 형식을 담고 독특한 개성을 심었다. 건물 곳곳에 외유내강한 집주인의 손길이 묻어난다.

대체로 사당은 안채 뒤에 위치하는 것이 상식인데, 이곳은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배치하여 파격을 시도한 것도 재미있다. 사당의 존재는 조상이 후손들과 일상을 함께 하는 것을 뜻한다. 외출하며 인사하고 귀가하여 하루를 보고한다. 생과 사는 분리되지 않고 일체가 되어 오히려 편안하다. 후손은 늘 조상을 의식하며 삶의 길을 구한다. 현실에서 위기가 밀물처럼 밀려와도 힘이 되는 조상의 정신적 가치와 얼이다. 사당에 배향된 조상님이 기침소리를 내며 금방이라도 문 열고 나올 것 같다.

고택에는 품격이 있다. 방마다 심오한 뜻을 담아 명명을 하고 기둥에 주련(柱聯)을 건 것은 날마다 삶을 반추하기 위함이다. 벽에 걸어 둔 그림에는 난초 같은 집주인의 향기가 풍기는 듯하다. 가솔들은 집안의 손때 묻은 가재도구와 유품 하나에서 선조들의 기운을 느끼고 가족의 격려와 눈빛에서 힘을 얻기도 한다. 집주인의 숨결이 천장을 떠받들고 기둥을 지탱해 주는 가운데 긴 세월 다진 심지 곧은 문화는 꽃이 되고 열매가 된다. 규격화된 아파트에서 좀처럼 찾을 수 없는 편안함이 곳곳에 향내처럼 피어난다.

이석문이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손자가 판서에 올랐지만 후손들은 판서택호를 내려놓고 굳이 ‘북비집’을 강조했다. 대대로 자존을 목숨처럼 지키고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이기에 가능한 선택이다. ‘북비’에는 조상들이 지켜낸 의리와 충절을 기리는 유학정신이 있다. 안락하고 달콤한 현실보다 영원한 이상을 선택한 북비집 사람들의 혼이기도 하다. 떠나면서 뒤돌아 본 키 높은 북비고택의 대문이 위압적이지 않았다.(원고지 16매 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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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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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희자 | 작성시간 11.10.04 삶의 모태인 집을 잘 그려낸 작품이군요. 또한 북비고택은 조상들이 지켜낸 의리와 충절이 그대로 배어나는 고택이군요. 임 은주 선생님, 대상작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
  • 작성자미건 이숙희 | 작성시간 11.10.05 임작가님~ 수고많으십니다...
  • 작성자박월수 | 작성시간 11.10.07 임작가님 고맙습니다. 퍼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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