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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수필

모색(暮色)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2.03|조회수50 목록 댓글 8

 

모색(暮色)/이영도

 

 

 

 지극히 그리운 이를 생각할 때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돌 듯, 나는 모색(暮色) 앞에 설 때마다 그러한 감정에 젖어들게 된다.
 사람들의 마음이 가장 순수해질 때는 아마도 모색과 같은 심색(心色)일는지 모른다.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 같은 빛, 모색은 참회의 표정이요, 기도의 자세다.
 하루 동안을 겪어낸 번잡한 과정 다음에 밀려드는 영육(靈肉)의 피로와 허황한 감회는 마치 한낮의 강렬했던 연소(燃燒)의 여운이 먼 멧등에 서리듯 외로움이 감겨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 유명한 화가 밀레도 한 가족의 경건한 기도의 모습을 모색 앞에 세우고 그림의 제목을 <만종(晩鐘)>이라 붙였는지 모른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 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서면 슬프디 슬픈 보랏빛 향수에 싸여 신의 음성은 사랑하라고만 들려오고, 원수 같은 것, 미움 같은 것에 멍든 자국마저 밀물에 모래알 가셔지듯 곱게 씻겨 가는 빛깔...... 어쩌면 내 인생의 고달픈 종언(終焉)도 이같이 고울 수 있을 것만 같아진다.
 가끔 나는 해질 무렵에 경복궁 뒷담을 끼고 효자동 종점까지 혼자 거닐 때가 있다.
 이 거리에 석양이 내릴 때 가로수에 서리는 빛깔을 보기 위해서다.
 봄, 여름은 너울거리는 푸르름이 마음을 축여 주어 조용한 생기를 얻을 수 있지만 만추(晩秋)에서 초봄까지의 낙목(落木)일 경우엔 말 할 수 없는 눈물겨운 빛이 된다.
 가물가물 일직선으로 열 지은 나목(裸木)들이 암회색 높은 궁창을 배경하고 보랏빛으로 물들어 가는 하늘에 비춰 선 정취는 바로 그윽히 여울져 내리는 거문고의 음률이다.
 이 음색에 취하여 혼자 걷노라면 내 마음은 고운 고독에 법열(法悅)이 느껴지고 어쩌면 이 길이 서역 만 리, 그보다 더 먼 영겁(永劫)과 통한 것 같은 아득함에 젖어진다.
 그 무수히 소용돌이치던 역사의 핏자국도 젊은 포효도 찬연히 연륜 위에 감기는 애상일 뿐, 그날에 절박하던 목숨의 생채기마저 사위어져 가는 낙조처럼 아물어드는 손길! 모색은 진정 나의 영혼에 슬픔과 정화(淨化)를 주고 그리움과 사랑을 배게 하고 겸허히 가르치고, 철학과 종교와 체념과, 또 내일에의 새로움과 아름다움과...... 일체의 뜻과 말씀을 있게하는 가멸음의 빛이 아닐 수 없다.
 모색 앞에 서면 나는 언제나 그윽한 거문고의 음률 같은 애상에 마음의 우울을 씻는 것이다.

 

 

 

 

이영도

 

 

여류시인 이영도는 한국 전래의 기다림을 고유의 가락에 실어 감각적으로 읊었다. 호는 정운(丁芸). 오빠 호우(鎬雨)도 유명한 시조시인이다. 일제강점기에 군수를 지낸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정교사를 두고 공부했다.
통영여자고등학교,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 마산 성지여자고등학교 등의 교사를 거쳐, 1970년 부산여자대학에서 강의했다. 1964년 부산어린이화관 관장이 되었고, <현대시학> 편집위원을 지내면서 영남시조문학 동인으로 활동했다.
 그녀는 민족정서를 바탕으로 잊혀져 가는 고유의 가락을 재구현하고자 노력하는 한편, 여성 특유의 맑고 경건한  계시주의와 한국적 전래의 기다림, 연연한 낭만적 정서를 섬세하고 감각적인 언어로 표현하였다. 1954년 첫 시조집<청저집(靑苧集)> 을 출간하였고, 이어 제2시집 <석류>를 냈다.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 등이 있다.

 남편은 젊은 나이에 결핵으로 사별했는데, 시인 유치환은 혼자가 된 그녀를 사랑하였으며, 5천 통이 넘는 연서를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위의 수필은 작가가 말년에 쓴 수필로 알려져 있다. 황혼이 기울 무렵, 산 그림자 내리는 들녘에 혼자 서 있는 듯이 외롭고 슬프고 겸허하고 순수한 감정에 젖어들게 하는 글이다.

 이 글을 읽다보면 제목처럼 잔잔한 여운과 외로움이 감겨듦을 느낄 수 있다. 황혼이 기울 무렵 인간의 마음은 가장 순수해지고, 하루 동안의 번잡과 피로를 잊고 참회와 기도의 자세를 가지게 된다. 이때는 미움과 증오는 모래알 가셔지듯 곱게 씻겨 가고, 사랑하라고만 하는 신의 음성이 가슴 속 깊이 울려 퍼진다. 소용돌이치던 감정이 정화되어 그리움과 사랑이 배여 들고 겸허와 순수를 알게 된다. 이 수필은 황혼으로 인해 내일에의 기대와 희망을 꿈꾸게 하는 명문이다.

 

 

<담아온 글>

 

 


Michael Hoppe - Moon ghost wal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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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03 어찌 지내십니까?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안부가 궁금했습니다.
    누구나 모색에 젖어들면 괜스레 눈물이 날 것 같고 생각이 깊어지지요. ^^
  • 답댓글 작성자정애선 | 작성시간 12.02.04 선배님은 수필집 준비에 한창 마음이 바쁘실테지요?
    막내랑 멀리 여행도 다녀오고 집안 일로 쪼매 어수선했습니다.
    어서 나무에 예쁜 촉들이 돋아 나왔으면 좋겠슴다.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04 이번에 대학에 들어가는 막내랑 여행 다녀오셨군요.
    한동안 보이지 않아서 소식이 궁금했답니다.
    저의 작품집에 낼 원고는 2월 중순까지 다듬어서 보내려고 한답니다. ^^
  • 작성자조현태 | 작성시간 12.02.03 暮도 色이 있는 줄 알게 하네요.
    솔직히 暮色이 뭔동 몰랐습니다. 한문에 열등생이다보니....
    인터넷 한자사전을 뒤져보고 나서야 글쿠나~~~
  • 답댓글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2.03 저도 이 글을 처음 만났을 때 모색(暮色)이 무언가 했습니다.
    한문이기는 하지만 노을, 석양보다는 생소해서 호기심이 생기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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