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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당과 당황 사이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4.05|조회수59 목록 댓글 4

황당과 당황 사이/김영옥

얼마 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황당’과 ‘당황’에 대한 차이점을 설명한 글을 보았는데 지금도 그 예화의 장면들을 상상하면 웃음이 난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갔는데 정작 나와야 할 것은 나오지 않고 가스만 연달아 나오면 ‘황당’, 번잡한 버스 안에서 가스를 빼려고 힘을 주었는데 생각지도 않았던 큰 것이 나왔다면 ‘당황’,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소변이 급해 주차해 있는 트럭 뒤에 차를 세우고는 그 사이에 숨어서 볼일을 보는데 갑자기 트럭이 앞으로 나가버리면 황당, 뒤로 후진하여 내 쪽으로 오면 당황이라는 것이다.  

   
 
   
 
또 있다.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같이 탄 사람이 방귀를 뀌고 중간에 내리면 황당, 그 다음에 탄 사람이 냄새를 맡고는 나를 의심하면 당황이라나?

앞뒤 말이 바뀌기만 했을 뿐 비슷한 의미로 쓰일 것 같은데 써보면 확연히 다르고, 다른 듯하면서도 얼른 구별이 되지 않아 모호해진다. 아무튼 ‘황당’이나 ‘당황’이라는 말 모두는 위급하고 난처한 돌발 상황에 처했을 때 쓰는 말임은 분명하다.

사람이 살다보면 여러 가지 황당한 일도 일어나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있지만, 엊그제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그야말로 황당과 당황의 틈바구니에 끼여 두 시간 반을 허둥댔다.

큰아들의 결혼식 날이었다. 미용실 예약이 11시여서 느긋하게 아침식사를 마친 후 예식장으로 향했다. 남편은 늘 실수를 연발하는 내가 못미더웠는지 뭐 안 가져가는 게 없나 살펴보라는 당부까지 했지만 귓전으로 흘렸다.

예식장까지는 한 시간 거리인지라 한 시간 전에 출발했다. 고속도로가 좀 막히는 듯했으나 예식장의 미장원에 들어선 시각은 오전 11시 5분. 그런대로 잘 도착한 셈이었다.

그런데 미용실 의자에 앉으려는 순간, 눈앞이 캄캄해지며 정신이 아찔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챙긴다고 챙긴 것이 저고리와 속치마만 덜렁 집어 들고, 구겨질까 봐 벽에 걸어 둔 겉치마는 그냥 두고 와 버렸으니…….

결혼식 전날, 또 결혼식 날 아침, ‘지금 챙기는 게 실수를 안할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잊어버릴 게 따로 있지, 지금 접어놓으면 주름이 질 거야.’ 하며 자신을 너무 믿은 게 화근이었다. 비뚤어지거나 어질러져 있거나 구겨져서 단정하지 못한 것을 절대로 용납하지 못하는 그 완벽주의가 문제였다.

부랴부랴 작은아들을 찾아 집에 다녀올 것을 부탁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는 부리나케 집으로 향했다. 시계는 이미 11시 2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예식 시간이 2시로 잡혀 있으니 하객들을 맞이하려면 1시까지는 와야 한다.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왕복 두 시간이다. 길이 막히지 않더라도 1시 20분 전에는 돌아올 수 없는데 지금부터는 고속도로가 붐비기 시작하는 시간대가 아닌가. 주말이면 주차장처럼 막히는 그 구간을 어떻게 뚫고 올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순간, 가슴이 방망이질치며 3년 전 청주 어느 결혼식장에서의 일이 눈앞에 펼쳐졌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어느 봄날, 후배의 청첩장을 들고 청주로 내려갔다. 그런데 예식 시간이 되어도 부모가 도착하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서야 예식이 진행되는 바람에 그날의 예식장은 무질서에 아수라장이었다. 사색이 되어 애를 태우던 신부의 모습!

하필이면 왜 이 급박한 순간에 그 기억이 떠올랐을까? 그러잖아도 타들어 가던 내 가슴이 불난 곳에 휘발유를 뿌린 것처럼 불붙었다. 시곗바늘은 벌써 12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콩닥콩닥하던 가슴은 이제 쿵쾅쿵쾅으로 커지며 숨소리마저 거칠어졌다. 벽에 걸린 시곗바늘은 내 가슴보다 더 빨리 뛰어가며 정신을 혼란시켰고, 바깥에서 들려오는 하객들의 웅성거림은 온몸을 옥죄어 왔다.

열두 시 반이 지나자 얼굴이 달아오르며 술에 취한 사람처럼 벌개지고, 애써 한 화장은 연방 식은땀이 번져 자꾸만 번들거렸다. 제발 시계가 멈추어 주었으면, 아니 고속도로가 뻥 뚫려주었으면…. 머리를 만지고 있는 미용사의 손도 편치만은 않은지 모양새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 모양새가 까치집이 되든 말든, 화장이야 번지든 말든 그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거울은 보는 둥 마는 둥 하고 속치마 위에 저고리부터 걸쳤다.

1시를 넘긴 시각. 남편은 이미 밀려드는 하객들을 혼자서 맞이하고 있다는데 나는 아직도 속치마 바람이라니. 속이 새카맣게 탄다는 말은 이런 때 쓰는 것이리라. 아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나보다 더 애가 타는 목소리로 고속도로가 꽉 막혀서 도저히 2시 전까지 도착하지 못할 것 같다는 것이다.

손바닥에 흥건하게 고여 오는 땀을 주체할 겨를도 없이 발만 동동 구르다가 1시 반쯤 되어서는 철퍼덕 주저앉고 말았다. 머릿속이 하얘지며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진 그 순간 환청처럼 “엄마!” 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작은아들이 개선장군의 깃발처럼 치마를 휘날리며 뛰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미용실에 있던 사람들이 나보다 먼저 일어나 박수를 치며 환성을 터트렸다. 목숨을 걸고 고속도로를 질주했을 작은아이가 그렇게 위대해 보일 수가 없었다.

시계를 보니 1시 40분. 예식시간 20분을 남겨 놓은 시각이었다.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름 하나 없는 그 ‘개선장군의 깃발’로 속치마를 감싼 후 손님 맞기에 바쁜 남편 곁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헐레벌떡 시어머니 이름표를 붙이고 보니 생각할수록 웃음이 나온다. 구김살 없는 진솔 치마 입고 공작새 같은 시어미 되려다가 여러 사람 애태우며 체통만 구기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 날 나는 ‘황당’인지 ‘당황’인지 굳이 따지고 싶지도 않은 사건 앞에서 한평생 끼고 살던 완벽주의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체통 구긴 시어미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철이 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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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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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동조 | 작성시간 12.04.05 ㅎㅎㅎ~~ 황당 + 당황이네요.
    괜히 즐겁습니다.
    역시 완벽함 보다는 틈이 좀 있어야 .........!
    희자샘! 보시가 따로 있나요! 재미난 글 올려서 여러사람 즐겁게 하는 것도 보시라는 동조생각.
  • 작성자엄옥례 | 작성시간 12.04.06 노련한 구성입니다.
    잘 비벼서 깔끔하게 마무리 시켰네요.
    선배님 감사합니다.
  • 작성자김수정 | 작성시간 12.04.06 어쩜 이렇게 맛깔스럽게 글을 쓰실까요...
    소재도 매력 있고 구성도 야무지고 흡인력도 대단하여
    정신없이 한숨에 다 읽어내려간 후에야 숨을 내쉬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 작성자김가영 | 작성시간 12.04.20 김영옥 선생님은 수필과비평의 까페를 재미있게 이끌어가는 재치있는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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