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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의 변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4.06|조회수63 목록 댓글 4

 

수필가의 변

 

 

 

                                          김 정 화

 

 

 

시인은 근사하다. 이름부터 근사하다. ‘시인’이라는 단어를 입속에 넣어보면 꽈리 알처럼 부드럽게 굴려지고 장미 꽃잎 같은 향긋한 향기가 우러나온다.

시인의 꿈, 시인의 길, 시인의 섬, 시인의 마을, 시인과 촌장, 시인을 찾아서……. 어느 단어와 짝지어도 그럴싸하게 어울린다.

그러나 수필가는 호칭부터 거칠고 딱딱하다. 수.필.가. 하고 불러보면 토막말처럼 소리에 각이 생기고 음절 마디가 뚝뚝 걸리는 게 마치 덜 익은 보리밥을 씹는 듯 입안이 까끌해진다. 짐짓 시인 흉내를 내어보고자 수필가라는 말 뒤에, 수필가의 힘, 수필가의 집, 수필가의 언덕, 수필가의 노래, 수필가의 편지…… 등 꽤 괜찮은 단어를 붙여 봐도 시인만큼 폼 나지가 않는다. 심지어 유행가 가사에도 시인이라는 말은 넘쳐나지만 수필가는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뿐인가. 종합문예지 차례를 훑어봐도 수필은 시의 앞자리에 앉지 못한다. 시, 소설, 수필 순으로 목차가 엮이는 게 관례처럼 되어 있는 지라 수필은 항상 책 후반부에서 얌전하다. 그러기에 수필가라면 수필이 한 번쯤 독자들과 먼저 눈맞춤이라도 했으면 하는 욕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나도 그런 허세를 부리고자 시도한 적이 있다. 내가 편집 일을 맡은 동네 문학지에 두어 번 시와 수필 자리를 슬그머니 바꿔놓은 것이다. 책장을 넘기면 수필이 먼저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게 여간 신통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번번이 편집위원이나 발행인의 눈에 덜미가 잡혀 다시 제자리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마치 어린 시절에 달리기를 하다가 바통을 놓쳐 등수에 들지 못한 것처럼 억울했다.

수필가는 외양부터 시인에게 수가 뒤진다. 문학 행사장에 들어서도 챙이 넓은 모자에 커다란 코사지로 멋을 부렸거나, 명주 머플러를 두르고 붉은 손톱물을 든 손을 흔드는 문인들은 대부분 시인이란 이름표를 달고 있다. 그들의 웃음은 자신감이 넘치고 낭송하는 목소리도 성우마냥 곱다.

반면에 수필가는 어찌해도 구별이 된다. 검정이나 갈색 또는 회흙색 옷차림을 하고 구두굽 소리를 낮게 내거나, 유행이 지난 목도리를 두르고 투박한 손가방을 든 채 구석 자리를 찾는다면 그 경우는 십중팔구 수필가다. 게다가 서로 생각하는 방향도 다르다. 시인은 꿈을 노래하고 수필가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꽃 피는 소리를 듣고 수필가는 꽃 지는 자리를 본다. 그래도 시인과 수필가는 문인이어서 서로가 통한다.

시인이라는 이름은 누구에게나 근사한가 보다. 내 가족이나 친척도 예외가 아니다. 일전에 모처럼 만난 친척 언니에게 내 글이 실린 동인지 한 권을 전한 적이 있다. 평소 내가 수필 쓰는 것을 모르던 언니는 활자로 찍힌 내 글의 내용보다는 단단한 약력을 가진 동인들과 나란히 내 사진이 책장 속에 있다는 사실이 더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 후 언니는 나를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할 때마다 “우리 시인 동생이, 우리 시인 동생이…….”라고 서두를 꺼낸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산 동생’에서 ‘시인 동생’으로 격상된 것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수.필.가, 수.필.가.” 하며 귀엣말로 언니의 허리를 찔러댔지만 언니는 그때마다 모른 척했다.

“시인이 발음하기 더 좋구마.”

이 말이 언니의 변명이니 더는 정정을 포기할 수밖에.

고인이 된 박완서는 “시인의 꿈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사람과 만나는 거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수필가의 꿈은 무엇일까. 흩어진 꿈 조각들을 모아 가슴 울렁이는 한 편의 글을 엮는 것은 아닐는지.

그러기에 나는 진정으로 수필가를 사랑한다. ‘수생수사隨生隨死’를 외치며 외길을 걷는 어느 선생님을 끔찍이 존경하고, 수십 권의 수필 이론서를 저술한 노선생님을 경배하며, 낮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 눈길을 주어야 한다는 나의 수필 스승에게도 고개 숙인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장소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발품과 손품을 파는 무명의 수필가에게 가장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수필가라는 이름이 발음하기에 좋지 않더라도 수필을 향해 백두옹처럼 허리 낮추는 일만큼 멋진 일이 또 어디 있으랴.

 

 

 

Toselli, Enrico / Seren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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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4.06 시인은 꿈을 노래하고 수필가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꽃 피는 소리를 듣고 수필가는 꽃 지는 자리를 본다.

    수생수사隨生隨死’를 외치며 외길을 걷는 어느 선생님.
    그 분이 누구인지 아시겠지요?

    한 편의 글을 쓰기 위해 장소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발품과 손품을 파는 우리이지만
    수필을 향해 백두옹처럼 허리 낮추며 나아가보도록 해야겠어요.
  • 작성자박동조 | 작성시간 12.04.06 시인은 꿈을 노래하고 수필가는 현실을 이야기한다.
    시인은 꽃 피는 소리를 듣고 수필가는 꽃 지는 자리를 본다.

    이왕이면 꿈을 노래하고 싶은데.
    이왕이면 꽃이 피는 소리를 듣고 싶은데,
    아니라고 하는군요.
    아! 나는 꽃이 지는 자리가 넘 싫은데.........!

    그래도 백두옹처럼 허리 낮추며 나아가기 위하여 먼길 마다않고 달려가네요.
    수생수사隨生隨死’를 외치는 선생님께서 횃불의 기치를 들고 앞서 가시는데
    우리가 어떻게 게으름을 피우겠습니까.
  • 작성자엄옥례 | 작성시간 12.04.06 작가의 모습과 글이 많이 닮았네요.
    군더더기없는 문장이군요. 읽기가 참 좋네요.
  • 작성자송재 이미경 | 작성시간 12.04.08 내가 수필을 쓰는 사람인 줄 아는 친구들도 시인친구를라는 말을 의식적으로 붙이더군요. 그때의 민망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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