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일반수필

커피 향 같은 사람이고 싶다. / 수필가 조문자

작성자김희자|작성시간12.09.14|조회수72 목록 댓글 2

   

              커피 향 같은 사람이고 싶다. / 수필가 조문자

 

 

 

궁둥이가 쪼그라진 주전자에서 찻물이 끓고 있다. 설탕과 커피 한 스푼 크림 두 스푼을 섞는다.

잿빛 세월의 향내가 적막한 방안에 장독대의 햇살처럼 부서진다.

커피 향은 아련한 추억의 냄새이다. 순간 퇴색한 일기장의 그리움이 울컥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내 삶의 얼룩을 헤집는다.

 

곁에 남자가 마당에서 망치질하고 있을 때면 따뜻한 커피를 묵직한 찻잔에 담아 쟁반도 없이

들고 간다.

손끝에 닿는 따스한 온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잠시 허리를 펴고 무표정한 얼굴로 커피잔을

받아 든다.

“ 맛있어?”

처마 끝에 달린 청동 전등을 닮은 곁에 남자 코밑으로 얼굴을 바짝 갖다 대고 묻는다.

“응‒ ‑ ‑ ‑ ‑ ”

이렇게 대답해야 가정이 편할 것 같은가. 뚱하게 대답한다.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평 미래 질을

해 놓은 듯 고르고 평평하게 낮게 깔린 구름을 바라보며 곁에 남자는 커피를 마신다.

 

해가 넘어가기가 무섭게 어둠이 내려앉은 산속은 밤이 쉬 온다. 이유도 없이 핏대를 세우고

허공을 향해 짖어대는 것을 보면 우리 집 벅구도 어둠이 무서운가 보다. 어둠의 입자들이

음습하게 켜켜이 뜰 사이에 몸을 숨기기 시작하면 청동 전등에 불을 켜고 나는 커피를 탄다.

곁에 남자가 그라인더에 손을 다쳐 병원에 입원하고 혼자서 이 깊은 산중에 갇혀 있을 때에도,

의사가 중요한 수술을 앞에 놓고 담배를 피우듯이 커피를 마셨다. 삶은 슬프고 아름다웠다.

산다는 것은 한 잔의 씁쓰름한 커피를 마시는 것이었다.

 

선반에 여러 차(茶)가 놓여 있다. 재스민, 국화차. 녹차. 작설차. 우롱차, 하지만 이름도 모르는

중국 차에는 그리 마음이 가지 않는다. 네 맛도 아니고 내 맛도 아닌 덤덤하고 맨송맨송한 맛도

맛이거니와 차향이 우선 내 양에 차지 않는다.

 

어느덧 세월의 더께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 세월 속에 터득한 게 있다면 삶이란 실패해도

좋으니 일단 저질러 놓고 보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제보고 따져보고 또 생각하지 않았다.

실패 속에서 얻어지는 불이익은 성공만큼 소중했다. 손해가 있을지라도 하고 싶은 일은

일단 부딪쳐 보는 것이었다. 그런 성격 탓인지 은은한 차 맛은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그저 답답했다.

하지만, 어찌 차의 경우에만 그러하랴.

 

사람도 향내 나는 사람이 있다. 도무지 속내를 보여주지 않는 사람이나 원리 원칙대로 사물의

시비만을 따지려 들거나, 남의 고통에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가지 않는다.

 조금 성격이 모나서 타인과 조화를 이루지 못할지라도 정 있는 사람이 좋다. 좋은 일은 같이

기뻐하고 나쁜 일은 비밀을 지켜 주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좋다. 심지를 돋우며 타오르는 불꽃 같은 사람에게서는 쫀득거리는 향내가 난다.

까다로워도 괜찮고 좀 잘난 척한들 봐 줄 수 있다.

사람 향내는 가슴을 데워 놓는다.

 

그 여자는 굉장한 미인이었다. 여직원들은 그 여자의 외모를 모두 부러워했다.

차분한 행동과 조용한 목소리, 선명한 콧대와 축축하게 물기 젖은 듯한 눈매는 한 편의

시를 읽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수가 적어 자주 만나도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담백한 색깔의 옷을 입고 진주처럼 뽀송뽀송한 얼굴을 하고 나타나면 눈을 내리깔았다.

처음에는 조용한 여성적인 분위기에 여자도 매력을 느꼈다. 어쩌다 회식하는 자리에서도

사람들과 눈을 맞추지 않았다. 그림 속 여인처럼, 남편의 어깨에 내려앉은 비듬처럼,

남편에게 묻혀서 왔다가 아무 하고도 사귀지 않은 채, 남편에게 묻혀서 조용히 사라지는

투명인간 같았다. 꽃은 꽃인데 향내가 없는 꽃이란 저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려니 했다.

사람도 향내가 나는 사람이 있겠지 싶었다.

 

‘커피’ 라는 말의 뿌리는 아랍어 '카파' 에서 유래되었다 했던가. ‘힘’을 뜻한다. 그래 그런지

커피의 맛과 향은 야성적이다. 갓 볶은 콩이 분쇄기에서 갈리어 필요 이상으로 혼합되지 않는

커피가루가 보트로 옮겨지면 집안 전체에 진한 향내가 내려앉는다.

삶에 여러 맛을 알아 가면서 조금씩 삶을 사랑하게 되듯이 커피는 단순히 입으로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향을 가슴으로 즐기고 느끼는 기분 상태가 커피의 맛이다.

프랑스 작가 타테랑 의 커피 예찬처럼 커피는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겁고 천사처럼 순수하며 사랑처럼 달콤하다.

 

싸락싸락 싸락눈이 문창을 때리는 겨울이 오면 강한 자메이카 블루마운틴이나 쓴

에스프레소 한잔을 마신다. 뻐꾸기가 낭자하게 울어대고 산 벚꽃이 눈처럼 휘날리는

환장할 봄날에는 브라질 커피의 부드러운 뺨처럼 순한 맛을 느낀다. 사랑이란 단어가

쓰디쓰게 가슴을 훑어 내리는 가을날엔 모카커피 한잔을 넘길 때면 또 얼마나 흥분이 되는가.

가마 솥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엔 머그잔에 얼음을 동동 띄운 인스탄트 아줌마

커피를 마신다.

 

살다 보니 물질사회의 편안함에 나도 모르는 사이 젖어들었다. 불의를 보아도 흥분되지 않았고

정의를 보아도 감동이 사라졌다. 그리곤 끊임없이 더 편한 것을 추구했다. 거짓도 적당히 눈감아

버리고 외면했다. 욕망은 내가 가진 것을 만족하지 않도록 자꾸만 부추기어 안락으로 이끌었다.

불편한 것이 귀찮아 중요한 것도 피하도록 유혹했다.

외로움이 싫어서 사람 만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어느덧 나에게서 향내가 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옛 다인들은 찻물 끓는 소리를 마음으로 들었다고 하는데 나는 눈으로 듣는다. 보트도 있지만,

굳이 가스 불 위에서 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것은, 찻물 끓는 소리의 그 역동감을

눈으로 느끼고 싶어서이다.

커피 물은 아주 뜨겁든지 아주 차든지 해야 한다. 미지근한 물은 비릿하다.

커피는 뜨겁게 데어진 찻잔에다 펄펄 끓는 물을 부어 뜨겁게 마셔야 제맛이다.

그때 나오는 커피 향은 다른 모든 냄새를 흡수한다. 역겨운 화장실 냄새도 곰팡냄새도

퀴퀴한 사람 입 냄새까지 흡수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얽힌 올 맺힘도 품어준다.

 

사람에게서도 향내가 난다. 살아온 세월을 훈장처럼 내세워 자기가 경험한 것 외의 것은

받아 드리지 않는 사람보다는, 남을 베려 하고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사람에게서는

커피 향 같은 향내가 난다.

 

김 권사는 나보다 인생선배이다. 우리가 만나게 된 동기는 교회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게 되어 가까워졌다. 직위가 내가 스승이다 보니 깍듯이 어린 나를 스승으로 대한다.

전철 안이나 버스 속에서 빈자리가 나오면 언제나 나에게 자리를 먼저 권한다.

그러면 나는 다시 그에게 양보한다.

우리는 서로 자리를 양보하다가 아무도 앉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다가 답답해서 끼어드는 사람도 있었다.

“내가 볼 때 나이가 어린 사람이 서서 가고 나이 많은 당신이 앉아 가는 것이 옳을 텐데

왜 그리 양보를 지나치게 하시오.”

턱으로 김 권사를 가리키며 약간 신경질적으로 핀잔주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는 서로 눈을 맞추며 픽 소리 없는 웃음을 입가에 흘리면서 눈으로 말한다.

‘우리가 이러는 이유를 당신이 알기나 하슈’

그의 자리 양보는 그저 자리 하나 양보하는 예의범절이 아니다.

자신보다 어린 스승의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 향내였다.

그와 함께 있으면 나는 큰 부자가 되었다.

내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인 양 어깨가 으쓱 해졌다. 그의 깍듯한 존경심으로 나는 나보다

더 나은 내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모든 냄새를 흡수해버리고 자신만의 향내를 풍길 수 있을까.

커피가 비처럼 몸속으로

스며든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김희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9.14 조문자 선생님,
    이 글 선생님의 수필 맞으시죠? ^^
  • 답댓글 작성자조문자 | 작성시간 12.09.14 아이고, 어디에서 찾으셨나요. 어디에다 올렸는지 기억도 안 나는 제 글 입니다. 초보때 썼었죠.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