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사에는 조양교회가 있다.
급하게 흐르는 사등이천 伊川急灘
넓은 들을 압도하는 우람한 토함산에 山氣平郊壓
지난 밤새 내린 빗소리가 가득하네 雨聲昨夜崔
동쪽기슭에서 발원한 사등이천 따라서 二天水路自東開
좁고 빠른 물살이 십리를 흘러가니 十里淺灘來
쏟아지는 폭포수가 풍우를 만난 듯 流瀑奉風雨
바위틈을 부딪치며 활기차게 감도네 活波激石回
오랜 세월 쌓인 수심을 씻어 보내니 道遠千古滌塵堆
겨울잠 깨울 봄 우레를 뉘에 물으랴 誰問起春雷
마동에 있는 덕봉정사에 내려오는 『역하유고』에 실린 이규일선생의 한시다. 이 시에 등장하는 사등이천은 토함산이 발원지다.
<조양들 풍경>
사등이천의 ‘사’는 ‘새’라는 동쪽을 나타내는 우리말이고 등이는 등성이로 동쪽 등성이에서 흐르는 거랑이라는 말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말 그대로 토함산 동쪽에서 시작된 냇물이 신계를 거쳐 양지버들, 갯들을 적시며 월성 남쪽으로 흐르며 남내천이 된다. 조양동은 사등이천이 지나는 들에 있는 마을이다.
토함산 주변의 대부분 동네가 그러하듯이 불국동의 지명들은 토함산과 연관이 깊다.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경주시 불국동에 속하는 조양동은 朝陽에서 알 수 있듯이 토함산으로 오른 아침 해가 유난히 밝게 비추는 동네다. 토함산 형제봉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들에 송림이 울창한 개남산 아래로 복제, 탑리, 대추밭마을로 된 1통과 내리, 들빛마을로 나눈 2통으로 구성된 조양동은 마을 동편으로 7번 국도과 동해남부선 철도가 통과한다. 1914년 지금의 불국동 일원이 내동면일 때 조양리가 되었다가 후에 조양동으로 고쳐졌다. 행정상 조양동 평동 시동을 합하여 삼성동으로 불린 적이 있다. 그 당시 업무를 보던 동사무소 건물은 현재 마을의 경로당으로 개조되어 사용 중이다. 1986년 다시 정래동에 속했다가 지금의 불국동으로 1998년에 합해졌다. 행정관청의 편의에 따라 변천사를 겪은 이면에는 주민의 감소 때문이다.
주민 대부분은 수도작과 축산을 겸하거나 낙농을 한다. 논과 주택이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축사에서는 소들이 오수를 즐기는 모습이 한가롭다. 자연에서 사람과 가축이 어울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조양들에 위치한 답은 모래가 많이 섞여있어 물 빠짐이 좋다. 벼농사에 유리한 탓인지 일찍부터 벼농사가 발달했다. 사등이천이 아니라도 물을 가둔 조양못이 있어 가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조양못이 만들어진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동경잡기』에 내용을 보면 신라시대부터 “볍씨 일백 석을 뿌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오래된 못임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말들이 물을 마셨다하여 조역제라고 불리기도 했다. 현재도 중요한 농업저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름에는 물에 어리는 풍광이 멋져 사진동호회에서 심심찮게 찾는 명소다. 또 가물치나 붕어 같은 민물고기를 낚는 강태공의 모습은 사철 보인다.
조양못을 논하면서 개남산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개남산은 평야 가운데 다소 뜬금없이 자리를 한다. 처음엔 남산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남산보다 궁색한 형상 때문에 ‘개’가 붙어 개남산이 된 웃지 못 할 사연이 있는 산이다. 개남산은 기러기 형상이다. 옛날에는 떨어진 주둥이 부분을 지게와 소쿠리로 흙을 돋아 도둠고개를 만들 정도로 중히 여긴듯하지만 달리 유적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동쪽에 못(조양못)을 파고 서쪽 바위는 정으로 쪼개 기러기를 붙잡았다는 전설이 있다. 정으로 쪼갠 자국이 선명한 바위가 남아 주민들은 그 앞에 논을 쪼진배미라 부른다. 또 다른 못으로는 복두제가 있어 청주한씨의 참판공파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다. 이후 안동 권씨들이 들어오고 복두제는 사라지고 복제라는 지명만 남았다. 이름만 남기는 대추밭마을도 그렇다. 대추나무가 많았다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그 밖에도 여기저기 유물이 흩어져있다. 형제봉 아래 능갓에는 성덕왕릉과 효성왕릉이 나란하다. 성덕왕릉에 돌거북은 크기나 조각솜씨가 으뜸이라 머리까지 있었다면 국보로 보존되기에 손색이 없었을 것이다. 왕릉 앞으로 내동초등학교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교되었다. 운동장 한편에는 한국전쟁의 상흔을 나타내는 비석이 여전하다.
처음 조양동을 찾은 것은 팔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래된 교회가 있다는 말을 듣고서다. 조양교회의 시작은 어떠했을까? 서울 남쪽 끄트머리 불교가 성했던 천년고도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는 누구였으며 교회는 어떤 중추적 역할을 하면서 역사에 관여했을까? 1900년대 전후는 역사상 가장 뼈아픈 나라를 잃는 과정이었다. 혼란의 시대를 지나며 식민지 지배하에 겪은 고초는 대단했을 것이란 지레짐작을 하면서 불교의 성지인 토함산 턱 밑에 서양의 낯선 종교가 자리를 잡게 된 내력이 궁금하였다. 그 당시 과감한 행동을 한 선지자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하는 기대가 컸다.
교회를 찾는 길은 경주에서 울산으로 뻗은 7번 국도를 달리는 시내버스를 타고 영상Q박물관 버스승강장 앞에서 내리면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박물관은 예전에는 내동초등학교였다. 지금은 폐교가 되었지만 인근에 있는 불국사 초등학교와 동방초등학교를 분교 시킨 큰 학교인 셈이다. 효소왕릉과 성덕왕릉에 가려해도 여기서 내려야 한다. 왕릉은 영상Q박물관 뒤편 길이다. 교회는 맞은편에 있는 구판장 앞을 지나는 골목을 한참 들어가 주택을 벗어나면
<조양교회 전경>
환하게 트인 들이 나오는 안동네다. 석탑이 있어 탑리라 불린다. 조양의 여러 동리에서 가장 큰 동리다. 허공에 우뚝한 십자가를 기점삼아 고샅 안길을 가면 교회에 도착한다. 설명은 이러해도 교회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마을 중심으로 난 남쪽 길로만 가다보면 유일하게 높은 3층 건물이 보여서다. 교회는 조양들에서 가장 가운데다. 그래서 십자가가 유독 높아 보인다.
<조양교회 일지>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협소한 골목을 지나 서너 대의 차만 들어서도 꽉 찰 것 같은 마당으로 들어갔다. 교회는 붉은 벽돌로 쌓은 3층 본당과 판넬지붕을 덮은 단층 부속 건물로 이뤄졌다. 담벼락 앞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비가 섰다. 2003년에 백년을 기념하고도 18년이나 지났으니 교회의 나이는 118년인 셈이다. 그밖에 달리 눈길을 끄는 것은 없었다. 굳이 찾자면 땅으로 내려와 다소곳이 앉은 종탑 정도다. 한때는 높다랗게 매달려 복음을 전파했을 무쇠 종은 이제 쓰임을 다하고 쉬는 중이었다. 여름 땡볕 아래서 종만큼이나 교회는 조용하였다.
<조양교회 종탑>
교회는 넓지 않았다. 본당 1층은 현관을 겸한 어린이들 공간이고 2층은 예배실이었다. 정면 벽에 선 나무십자가를 향해 기다란 나무벤치가 여러 개 놓였다. 평일 낮이라 신도의 모습은 볼 수 없었지만 어느 교회와 다를 바 없었다. 2005년 부임하셨다는 성제규 목사님은 더운 날 갑자기 찾아온 방문객을 반가이 맞아 3층으로 안내해주셨다. 3층이 회의실을 겸한 집무실이었다. 교회에 보관중인 기록물은 출석과 헌금내역을 적은 낡은 수첩들과 조양교회 백년을 기념하는 화보집이었다. 수첩에는 신도 이름과 헌금액이 손 글씨로 꼼꼼히 적혔으나 1960년대 것들뿐이었다. 그 외에 자료들은 없거나 분실되었다 한다.
교회에 대해 여쭸다. 조양교회의 기록에 따르면 조양교회의 시작은 1903년 배반동의 한 민가 사랑방이다. 백현숙과 10여명의 신도들이 5월 조양동에 초가집을 빌리면서 교회 형태를 갖췄다. 배반과 조양은 행정상 나눠진 명칭이 다를 뿐 생활의 근거가 유사하다. 안의화라는 선교사가 12월에 예배를 인도하고 다음해 호주에서 온 맹의화 선교사가 인도하였다. 부산으로 들어온 호주선교사들은 주로 경남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인근 지역인 경주지역에도 선교를 하였다. 그들에 의해 조양교회보다 몇 달이 앞서 외동 말방에 장산교회가 건립됐다.
교회 백년사에 적힌 연혁을 살폈다.
1912년 조남규. 손재규 영수
1915년 서성오. 배은희. 이대영. 김보근. 이성락. 양천언 전도사가 시무
1922년 구정교회가 분회를 하고 지세영 조사가 시무
1924년 이춘중 김광수 손영균 곽말수 전도사 시무
1931년 허담 목사 시무하였다고 적혔다.
이후에도 목사님들이 채 일년이 안되는 기간을 집전하시다 떠나거나 공백을 전도사가 메웠다. 이때는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라 그런가 싶어 살펴보니 다른 연도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조양교회의 백년은 평탄치만은 않았음을 알겠다. 그래도 오래된 연륜만큼이나 성물 한 점이라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서양의 영화를 보면 오래된 교회를 상징할 때는 아치형 고딕형식의 석조건물이나 스테인글라스 창문이 배경으로 등장하지않던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념하거나 내보일 유물이 있느냐고 물었다. 목사님은 보지 못 하였다 답한다.
실망하는 빛을 숨기지 않는 내게 목사님은 “저는 아침 해가 뜰 때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의 은혜가 저 볕처럼 골고루 내리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순박하고 착한 주민들이 무탈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목사님의 눈길을 따라 내다본 창밖은 정말 평화로웠다. 개남산이 지키는 들은 푸름으로 그득하였다. 눈부신 태양 아래 하나의 이파리도 남김없이 하늘로 팔을 뻗친 벼들이 뿜는 팔월의 기운은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목사님의 눈길이 이끌지 않았다면 보지 못하고 지나쳤을 풍경이었다.
“한때 열정으로 교회를 이끌려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깨달았지요. 조부님부터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이 대부분인 교회라는 것을요. 그분들은 유난스럽지도 욕심을 내지도 않으며 만족하는 삶을 사십니다. 그리고 매사에 감사하십니다. 열심히 농사짓고 젖 짜다(목축업을 하시는 신도들) 주일날 아들손자 손을 잡고 교회로 나오십니다. 그분들에게 교회는 주님이 계신 또 다른 집이예요. 주님의 존재에 대해 유난스럽지도 부정하지도 않아요.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신앙생활을 하시지요. 교회에 모여 정을 나눕니다. 어려운 교우가 있으면 위로의 봉사를 하시지요.” 눈길은 여전히 창밖에 둔 채로 말씀을 마치셨다. 목사님의 진실 된 표정이 읽혔다.
“신라인들이 꿈꾸던 불국토의 상징 토함산 밑에 교회를 세운 연유가 따로 있을까요?” 조용한 미소를 답으로 이해하고 교회를 나왔다.
<창밖으로 내다본 조양들 풍경>
우리나라가 기독교를 접한 해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이라 한다. 조선을 침략하려 일본군부대가 웅천에 상륙하면서 일본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천주교 예수교 소속 세스페데스를 초청하면서다. 이후 중국으로부터 한문성경을 접하면서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 위주로 모임이 만들어졌다. 그 중 이승훈은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음으로서 한국천주교의 출발이 되었다. 그리고도 100년 가까이 탄압을 받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순교를 당했지만 믿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와는 조금 다른 종파인 개신교는 네덜란드 선교회 소속 귀츨라프 선교사였다. 중국상선을 타고 충청남도 홍주만 고대도 앞바다에 정박한 선교사가 성서와 전도문서지를 국왕에게 전해 달라 하고 기다리는 동안 주민들에게 감자 심는 법을 가르쳤다. 당시에는 정부에서 허락을 받지 못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다음에 찾아온 선교사는 신미양요의 계기가 된 토마스에 의해서다. 토마스는 평양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중국과 일본을 통한 선교가 다양하게 이루어졌지만 역시나 정부의 탄압은 여전하였다.
기독교는 들어왔어도 우리나라에 최초로 교회를 세운 이는 1885년 언더우드목사와 아펜젤러목사에 의해서다. 그 이전에 예배를 드린 것으로 추정되나 정식으로 선교사업을 시작한 기록과는 이십여 년 차가 있다. 조양교회가 속한 대한장로예수교는 아펜젤러 목사가 세운 1887년 9월 서울 새문안교회가 시초인 셈이다. 그 당시 교회는 선교의 방편으로 사회사업을 겸하였다. 새문안교회도 고아들을 위한 경신학교가 출발이다. 이는 에큐메니컬(세계화. 종교통합) 정신에 입각하여 사회와 융합하려는 선교자세에서 비롯되었다. 각지로 뻗어나간 개신교회들은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학문을 교육하면서 사람들 속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당시의 선교사는 교육사업과 의술 등 앞선 선진문물을 가르쳤고 맹의화도 다르지 않았다. 건천교회사에서도 맹의화가 언급된 것을 본적이 있다.
또 동리목월문학관 관장을 지낸 장윤익 관장이 경북신문에 발표하신 김동리선생의 유년기에 관하여도 맹의화의 이름이 있었다. “선생은 할머니 손을 잡고 예기청소에 가서 굿을 보았지만 어머니의 권유로 경주제일교회의 유년주일학교에 나가게 된다. 곧 이어 맹의화 선교사가 경주제일교회의 부설 초등학교로 설립한 계남학교에 입학했다”는 대목이다. 권사였던 어머니가 동리선생을 『무녀도』 『을화』 『사반의 십자가』 『부활』 같은 명작에 영향을 준 셈이다. 그 모태는 맹의화가 세운 교회와 학교다.
조양교회의 처음은 후에 집사가 된 백현숙 중심의 여자들 중심이었다. 출입에 제한을 받던 유교사회에서 어떻게 가능하였을까하는 의문이 들었다. 파란눈동자의 낯선 남자 말을 귀담아 듣기까지 했으니 분명 강단 있는 성격이었을 것 같다. 그래도 처음 발생한 곳에서 여러 차례 옮겨 다닌 연유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교회를 알고 싶은 만큼 조양동을 살피게 되었다. 불국지역에서 발간된 불국향토사에 실린 자료들을 검토했다. 『조양동은 조역이라는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큰길 가운데 첫 번째 원이 있었던 곳이다. 『광여도』의 영남경주부지도에 18세기초에 역참이 설치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하 경부선 협궤 열차가 생기고 7번국도가 된 도로가 닦이면서 조역은 조양리가 되었다. 마역꾼들은 역에서 말을 바꿔 탔다. 』
당시로 역참은 사람이 모이는 상업 지역이었다. 덕봉정사에 내려오는 『역하유고』에서 사평장터의 아침 풍경이라는 한시를 찾을 수 있었다. 사평은 조양들을 일컫는다. 천갈래 갈림길 열려있는 사평장터라 하며 저녁연기 흐릿하게 엉겨들면 바쁘게 돌아가는 모습을 묘사했다. ‘아침저녁 사람들 일상이 아니겠는가’ 대목에서 알 수 있듯 조양동은 아침저녁 수많은 상인이 천 갈래 길에서 모이고 돌아가는 교통의 요지였다. 장터는 역관 안에 있었고 지금의 조양교회 터 부근이라 한다. 교회가 조양동에 세워지게 된 연유가 이해되었다. 그렇다 해도 교회가 유지되기에는 지금의 조양동은 작은 동리다.
조양교회 초창기부터 온 집안이 교회를 다니는 분을
<손재근 영수>
청했다. 손복돌 장로님은 영수를 지내신 조부 손재근부터 손삼목 부친에 이어 장로를 지내시며 사시는 토박이다. 말 그대로 조양교회의 역사인 셈이다. 약속한 날이 마침 주일이라 여러 장로님과 같이 교회 앞에 있는 찻집으로 나오셨다. 말끔하게 양복을 입은 모습과 달리 볕에 그을린 얼굴과 뭉툭한 손마디에서 여섯 날을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예수님을 위해 기도하는 생활을 실천함을 알 수 있었다.
먼저 교회의 역사에 대해 여쭸다. 손복돌 장로님은 조부에게 들은 이야기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처음 교회를 옮겨온 곳은 역참의 한쪽에 초가를 빌리면서라 한다. 조선 초 만들어졌다가 말(고종 33년)에 철폐된 후 비어있는 건물이 있었다. 우리나라 초기 세워진 교회 형태는 거의가 다 초가였으니 이해가 되었다. 배반에 그대로 있었다면 배반이나 다른 이름으로 칭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란 농을 하며 잠시 웃었다. 교회는 한때 백오십 여명의 신도들이 모일만큼 번성하여 오전 오후로 나눠 예배를 본적도 있을 정도였다. 당시 인구비율을 따지면 아주 많은 숫자라 짐작된다. 남녀구분이 엄연한 때라 가운데 칸막이를 치고 남자와 여자로 나눠 예배를 봤다. 영수가 예배를 주관하다가 후에 전도사들이 돌아가며 시무를 보았다. 처음 듣는 영수라는 직급을 찾아봤다.
『영수(領袖,leader)는 아직 장로로 안수 받지 않은 상태로 교역자가 없는 교회를 담당하여 이끌어가는 직분으로서, 설교와 목회를 책임졌고 학습자와 수세자를 일차로 심사하는 일도 하였다. 그 후 선교사가 일년에 한두 차례 방문하여 간단히 문답한 후 예식을 집행했다. 영수는 선교회나 지교회로부터 생활비를 지급받는 목사 대신 직업을 가진 상태에서 무보수로 교회를 전담관리 및 목회하였다. 주로 지역적으로 교역자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먼 곳이나 시골등의 교회에 영수가 임명되었다. 이러한 직분에 해당하는 여성 직제를 굳이 말한다면 권사(勸師)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 교회 초기의 직분들
분회에 대해 들었다. 소정동에 살던 박화준을 중심으로 신도 일부가 분회를 해 나갔다. 철도역이 소정동으로 옮겨가면서다. 당시 마을의 어른들이 역 주변으로 도둑이 들끓을까 염려하여서 철마가 마을에 머무는 것을 반대한데서 비롯되었다. 역과 함께 시장도 옮겨갔다. 소정분회는 지금의 구정교회다. 소정역은 불국역이 되었다. 이듬해 남산에도 분회를 시켰다. 장로님이 기억하는 백년사는 목사님이 가지신 자료와 별반 다름이 없었다.
장로님들이 비교적 명확하게 기억하는 대목은 교회가 다시 이전하게 된 근래였다. 교회의 본디 자리는 지금의 터가 아니란다.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었으나 원래자리는 조금 더 바깥이었고 사라호 태풍에 물난리를 겪던 해 옮겼다고 한다. 1959년 그 해에는 전 국토가 수마에 시달렸지만 특히 조양동 인근인 시리는 동네가 통째로 떠내려가는 불상사를 겪을 정도였단다. 지붕이 내려앉은 교회를 비어있던 건물로 옮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마침 일본인이 살다 떠나고 주인이 불분명한 건물이 있었다. 본래 세관자리였다.
<100주년 기념 화보>
그 밖에 교회와 관련하여 어떤 사건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드렸다. 모두 고개를 저으신다. 어려서 들은 것을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기억에 남을 만한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조차 모르신다. 아마도 직접적 사건에 연루된 적이 없는 듯하다.
<금한승 목사>
“조양교회와 연관해 내세울만한 인물이 있으세요?” 장로님들은 이구동성 금한승 목사님이라 꼽았다.
조양교회사에 기록된 인물 중 금한승 목사님은 1988년 부임하여 2005년 퇴임하시기까지 가장 오래 시무하시기도 했지만 지금의 성전을 짓는 역사를 성공시킨 분이다. 부임하실 당시 협소하던 본당을 벽돌 건물로 올리는데 기여하셨다. 교회를 짓기까지는 기성회 주도로 성금의 일부를 저축하여 준비하였지만 여러 난관이 있었고 그 중 공사대금 문제가 가장 컸다. 이때 신도들은 기꺼이 특별헌금을 내었다. 그러고도 모자란 부분은 농협에 대출을 내었고 갚기까지 제법 긴 시간이 더 필요했다. 지금의 조양교회 건물이 세워진 내력이다. 단층본당은 허물지 않고 현재에도 사용 중이다. 소임을 다하신 후 금한승 목사님은 조양교회에서 은퇴를 하셨다.
교회에서 특별히 하는 활동이 있냐는 질문에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에는 예배를 드린 후 국수를 삶아 점심을 나누었어요. 매년 여름마다 청소년수련회를 하고 봄가을에 어르신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갔답니다. 그밖에도 수시로 이웃의 어려움을 위로하고 보듬는 기도를 드립니다.”
무언가 숨겨진 이야기를 기대했으나 밋밋한 답이 성에 차지 않아 툭 던지듯 근원적 질문을 했다.
“주님의 존재를 믿으십니까? 귀찮다거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으셨나요” 잠시 당황하신 표정이시던 장로님들은 입을 모아 모태신앙을 꼽는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발생된 믿음에 대해 한 번도 의심을 가져 본적이 없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녔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생활을 이어갈 뿐입니다.” 말씀을 하시는 동안에 얼굴에 어린 무한한 자긍심이 보였다. 저 믿음의 근간은 무엇일까?
금한승 목사님이 쓰신 백주년 기념 발간사를 살폈다. “서라벌 옛 땅 고요한 농촌 마을에 교회가 설립된지 어언 100년이 되었습니다. 1903년 5월 20일 창립된 교회가 걸어온 10년의 세월은 세계사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간에 세계 제2차대전이 있었고 국내적으로는 일제신사참배 강요로 인해 교회가 성장하기에 매우 어려운 때였으며 해방 후 평화가 오는 것 같았으나 6.25 동족 상쟁으로 인해 교회 부흥에 막대한 장애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시대적으로 혼란할 때 사이비 종교의 물결이 일면서 교회는 또 한번의 시련을 겪은 것이 100년의 교회사였습니다. 이러한 중에서도 교회가 지속되어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0년을 지내오며 여러 차례 교회를 옮겼고 교회도 여러 차례 건축하였습니다. 모든 성도들의 한없는 봉사였습니다.“ 이하 중략
조양교회가 이어져오는 동안 배경을 간과한 것이다. 내동초등학교가 개교한 일제강점기 시절, 내동초등학교 내에는 신사가 있었다. 학생들은 운동장에 지어진 신사에 아침저녁 참배를 드리도록 강요당했다. 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일본 앞잡이 순사는 예배중인 교회에 찾아와 성경 대목에 간섭을 하고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해방이 된 가을 어느 날 주민들은 곡괭이로 신사를 파괴하고 꽹과리와 북을 치며 춤을 췄다. 비단 다른 종교에 참배하라는 강요에 대한 복수였겠는가. 그간 쌓인 핍박과 고통에서 오는 울분의 표출이었으리라. 이때 미처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일본인 교장은 군복에 일본도를 차고 멀찍이서 지켜보았다.
<폐교 전 내동초등학교 전경>
내동초등학교는 1929년 7월 23일 내동공립보통학교로 인가되었다. 불국동에서는 유일한 보통학교였다. 1999년 폐교하기까지 많은 사연과 아픔을 같이 했다. 더 살펴보면 내동초등학교의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49년 학생들 중 일부를 분리하여 구정동과 동방에 분교를 내어준 후다. 1학년때 같이 입학했던 학생들이 6학년이 되었을 때 유명을 달리하는 사건이 터졌다. 1955년 미공군 소속 F51 ‘무스탕’ 전투기 한대가 추락하면서 교실을 덮친 것이다. 사상자는 엄청났다. 학동 14명이 사망하고 중상자도 22명이었다. 직원 2명을 포함한 경상자는 62명이나 되었다. 한 마을에 살아도 다니던 학교가 갈리면서 생사가 달라진 사건이었다.
<비행기 사고 추모비>
학교 안에서는 아니지만 연관된 사건들도 많다. 주민들은 가족 중 교통사고를 당하지 않은 집이 없을 정도라는 말이 돈다. 그것은 학교 뒤로 놓인 철로와 학교 앞으로 난 도로 때문이다. 학교에 가려면 학생들은 철로가 높인 둑을 건너야하였고 도로를 건너야 했다. 울산으로 향하는 화물차들은 작은 촌동에서 속도를 늦추려하지 않았고 신호등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감시 카메라가 달린 것은 근 몇 년 전이다. 가슴에 자식을 묻은 주민 중 몇몇은 동네를 떠났다는 이야기를 끝으로 장로님과는 헤어졌다.
<조양동에 위치한 고인돌>
교회 앞에서 사방을 둘러봤다. 멀리 청소가 있어 붙여진 청소미기 가로 새롭게 형성되어지는 마을이 보였다. 기존의 기와지붕들과는 확실히 차이가 나는 서양식 건물들이 이채롭다. 그 곳에 못 미쳐 우람한 나무가 섰다. 바로 교회에서 나오는 골목 앞이었다. 나무 밑에는 마을 쉼터라는 팻말과 쉴 수 있는 벤치가 놓였다. 그리고 석탑이 앉았다. 석탑은 앉았다는 표현도 무색 할 만큼 작고 볼품이 없는 상태다. 탑리길이라는 지번이 붙기에는 궁색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왜 이곳에 불탑이 놓였을까? 혹 절이 있었나?
<조역터 삼층석탑>
석탑이 놓인 자리는 역참에서도 역건물이 있던 자리다.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인근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는 설명문이 붙었다. 탑과 나무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었다. 석탑을 보호하던 김경출의 부친이 심은 나무가 태풍에 쓰러지면서 당시에는 삼층이던 석탑도 부서졌다. 그리고 곧 부친이 돌아가시는 우연이 겹치자 동네사람들은 다시 느티나무를 심고 탑 조각을 모아 동제를 지낸다.
위쪽으로 난 길 끝에 고인돌이 보인다. 고인돌은 다소 생뚱맞게 놓였다. 동네사람들은 토끼바위라 일컫는다. 그러고 보니 둥그런 뒤태가 머리를 숨긴 토끼가 앉은 모습 같기도 하다. 바위는 여느 고인돌과는 다른 모습이다. 고임돌의 흔적은 찾을 수 없이 마치 새끼를 품은 어미처럼 땅에 몸을 말았다. 밑둥은 이끼 때가 붙어 검다. 등에는 성혈자국이 선명하다. 별자리를 보던 시기에는 하늘이 더 가까웠으려나? 국자모양이 뚜렷한 칠성판에서 북두칠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두 개의 별까지 뚜렷하다. 아마도 아주 옛날 석기시대에 이 자리로 바위를 옮겨온 듯하다. 기중기도 없던 시절 저렇게 큰 바위를 옮기려면 많은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가능했을 것이고 사람이 아주 많이 살았으리라 짐작되었다.
고인돌과 왕릉, 이 밖에도 산기슭마다 지석묘와 청동기시대 유물을 비롯한 돌덧무덤, 널무덤 고분군이 발견되었고 용담골에서는 당삼채골호가 나왔다. 조선시대까지 이어지다 근래에는 전염병으로 죽은 소들을 묻은 무덤까지 생활 곳곳에는 시대를 달리하였으나 죽음의 흔적이 존재한다. 죽음은 과거이다. 현재일수가 없다. 사람이 사는 어느 땅인들 다를까만 조양동도 삶과 죽음이 한자리에 공존하며 수천 년을 이어진다. 그런 동네 중심에 교회가 있다. 하늘로 툭 불거진 듯 어우러지며 조양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조양교회의 나이는 올해로 백열여덟 살이다. 인간이 관여하는 백년은 수차례 소멸과 생성이 일어나고도 남을 시간이다. 더구나 조양교회가 지나온 시기는 소멸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여건이었다. 그런데 교회는 사라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꾸준히 살아 숨을 쉰다. 매일 매일이 새롭기까지 한 현재진행형이다. 그 이유를 교회표어에서 찾았다. “천대까지, 땅 끝까지” 다음 세대와 열방에 말씀을 전하는 교회를 위해 나아가는 중인 것이다. 물론 큰 인물을 배출해 명성이 자자해진다거나 규모가 큰 건물에 많은 신도가 모여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말에 모여 음식을 나누고 정을 쌓는 지금이 더 주님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믿음으로 뭉쳐진 조양교회가 애초 이 땅에 교회가 세워진 목적과 가장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조양교회가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 이어졌듯 그렇게 손자와 손자가 다니는 교회이기를 바라며 글을 맺는다.
그리고 불국지역 향토사 편찬위원인 이형우 선생님한테서 사진 자료를 협조 받았음을 밝힌다.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