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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희 작가

작성자서소희|작성시간24.03.07|조회수33 목록 댓글 0

 

 

 

  창고 구석, 컴컴한 곳에 있는 것은 낡은 자루다. 자루를 풀자 그 속에 까맣게 녹을 입은 놋그릇이 들어앉아 있다. 이상하다. 그릇은 황금색일 때보다 더 당당해 보인다. 녹 쓴 놋그릇은 어머님이 사용했던 제기다.

  어머님을 처음 본 것은 사진을 통해서다. 아니다, 결혼식 날을 잡고 꿈에서 먼저 만났다. 정말 영혼이 존재하는 것일까. 짧은 파마를 하고 나타나 아들과 결혼해줘서 고맙다했다.

  어머님은 살아생전 전 재산이 소멸되는 두 번의 화재를 겪었다. 처음 화재를 당했을 때 가계와 집이 모두 불타버렸다. 절망의 나락에서 몸을 일으켜 할 수 있었던 것은 행상이었다. 하루를 살기위해 꼬박 하루를 걸어야했던 삶이다.

  행상이 잘되는 날은 약간의 돈을 만질 수 있었다. 그것을 악착같이 모아 허름한 집을 얻어 가게를 겸했다. 비바람을 피하고 밥도 해 먹을 수 있으니 그나마 사는 것에 힘이 났다. 다행히 장사가 잘되었다. 살만해지니 욕심이 났다. 이미 넷이라는 자식이 있었지만 또 셋을 더 낳은 것이다.

  살아가는 것이 마음먹은 것처럼 술술 풀리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깝게도 삶은 너그럽지 못했다. 또 화재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우환이 당신에게 달려드는 것 같았다. 허방을 딛는 것 같은 시간들, 어찌해볼 수 없는 삶의 무력감······.

  당신은 사는 게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했다. 눈물이 몸속에서 물처럼 차올랐지만 어린자식들 앞에서 마음껏 쏟아 낼 수도 없었다. 눈물을 안으로 삼켜야 했던 당신, 삼킨 눈물이 머물다 나오는 곳에 습한 바람이 불었던 모양이다. 그 바람이 당신의 폐에 까만 점을 자리 잡게 했을 것이다.

  사는 게 힘들어도 제사가 돌아오면 어김없이 놋그릇을 꺼냈다. ‘휴우긴 숨을 토하면서도 정성스레 제기를 닦았다. ‘잘 되면 제 탓, 못 되면 조상 탓이라 했던가. 아무리 조상 탓을 해도 허한 마음을 기댈 때는 조상밖에 없었다.

어머님은 시장에서 모양 좋은 과일을 사고, 빛깔 좋은 고기를 준비하여 제사상에 정들을 들였다. 정갈한 제기에 제물을 담으며 부디 조상 덕 좀 보게 해 달라 소망도 함께 담았을 것이다. 그 시간과 시간 사이 당신 몸속에서 불던 습한 바람이 손끝을 통해 제기에 닿았다. 제기에 묻었던 삶의 흔적 손때, 그것은 녹의 근원이 되었다.

  어쨌든 살아 있는 한 시간은 흘렀다. 힘든 삶의 행간에 누군가 담배를 권했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질 것이라 속삭였다. 달콤한 속삭임처럼 쓴맛의 담배연기는 잠시 편안함을 주었다. 하지만 담배연기는 당신의 폐에 차곡차곡 달라붙었다. 그뿐 아니라 까만 점의 진군을 도왔다. 결국 폐암말기라는 진단을 가져다주고 말았다.

  어머님은 병원에 입원하자마자 여러 가지 검사를 했다. 치료도 시작되었다. 그에 맞추어 몸은 가파르게 야위어 갔다. 이상한 것은 당신의 입원과 함께 놋그릇 또한 더 이상 제기로 사용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멈추어버린 어머님의 삶처럼 놋그릇의 삶 또한 그러했다. 놋그릇에 자리 잡은 녹은 어둠의 공간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깊이 뿌리를 내렸을 것이다.

  몇 달 후, 어머님은 세상을 떠났다. 일곱 자식 중 셋은 아직 어렸다. 눈을 감으면서도 어린 자식들이 가장 눈에 밟혔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나는 그 어렸던 자식 중 하나와 결혼했다. 신혼시절 남편은 혼수처럼 놋그릇을 챙겨왔다. 일찍 보내야만 했던 어머님을 기억하려 했던 모양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리움이라기보다는 회한이었을 것이다.

  남편은 그것에 밥과 국을 담아 먹고 싶어 했다. 얼룩덜룩 녹이 쓴 놋그릇은 보기에 흉하다. 무엇보다 흉한 그릇에 음식물을 담지 않는 법이다. 그릇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녹을 제거하는 일이 먼저였다. 남편은 거친 수세미로 녹을 닦았다. 안타깝게도 깊숙이 뿌리내린 녹은 아무리 닦아도 지워지지 않았다. 결국 녹을 없애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곱씹어 보면 어머님과 생사를 함께 했던 제기다. 삶의 고통과 고독, 소망을 함께 담았던 그릇이다. 당신의 간절했던 마음이 손끝을 통해 지워지지 않는 녹을 피우게 한 것이 분명했다. 그것을 쉽게 지울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 모른다.

  녹이 쓴 유기는 쓸모가 없다. 버리기는 아쉬웠는지 남편은 다시 낡은 자루에 담아 왔던 모습 그대로 창고 구석에 놓아두었다. 나는 남편의 심장에 무엇이 자리하는지 몰라 그저 묵묵히 지켜보았다.

  나는 놋그릇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그래서 그날의 시간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무심히 흘러 보냈다. 희한하게 삶에서 치워두었던 놋그릇은 우리부부 곁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운명이 또 한 번 우연을 만든 것이다.

  낡은 자루 밖으로 놋그릇을 꺼낸다. 그릇 전체가 새까맣게 변해 있다. 녹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마치 생명을 지닌 존재처럼 화려한 꽃을 피워낸 모양새다. 어머님의 손때가 녹이라는 이름을 빌려 시간의 퇴적을 겪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까맣게 변한 제기에 쉽게 마음을 빼앗긴다. 어쩌면 무심했던 며느리의 마음을 훔치기 위해 이끼 같은 세월을 버티며 황금빛에서 까만빛으로 탈바꿈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당신의 삶 어디쯤에서 나는 태어났고, 당신이 생을 마감할 때 우리는 타인이었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었지만 남편이라는 매개체로 가족이 되었다. 가족이라고 정의 되지만 우리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고 서로를 기억할 추억조차 갖지 못했다.

  결혼 전, 꿈속에서 어머님과의 만남처럼 놋그릇의 존재는 남편의 손을 빌어 우연처럼 나에게로 왔다. 놋그릇과 나는 긴 세월 동안 적당하게 끌어당겼다 밀어내기를 반복하며 서로를 놓지 않았다. 마침내 두터운 녹을 피우고서야 우리는 해후한다.

  알고 보면 녹이 딱히 흉하고 나쁜 것만은 아니다. 녹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물건을 부식시키기도 하지만 반대로 녹을 가득 생기게 하여 물건을 더 강하게 보호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녹은 생존을 위해 때로는 필요조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천년의 불상이나 향로 혹은 유기를 보라. 땅속에 묻혔던 유물이 천년이라는 시간을 통과하고도 온전한 모습을 유지하는 것은 바로 녹 때문이다. 녹이 가득 쓸었기에 오랜 시간의 풍파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모양을 간직한 채 세상 밖으로 나타날 수 있었다.

  까만 녹이 아름답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름답다는 것은 어떤 잡다한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추억도 사연도 필요 없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애착이 간다. 곁에 두고 싶은 집착이 생긴다. 어머님의 제기는 빈틈없이 녹을 피우고서야 다시 쓸모를 찾은 것이다.

  놋그릇은 어머님이 조상을 위해 밥과 국을 담던 용기다. 그것이 유산처럼 내 차지가 되었다. 어쩌면 물건도 아껴줄 사람을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나의 곁을 떠나지 않고 악착같이 남아있었는지 모른다. 이제는 두터운 녹이 어머님과 나를 단단히 이어준다.

  다행히 나는 오래되고 낡은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다. 오래된 물건에는 쇠락함에서 풍겨나는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다. 뿐만 아니라 긴 세월을 인내하며 퇴적된 색깔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의 잉걸 같은 화려하면서도 끈질긴 무엇을 지니고 있다.

  폐부가득 숨을 들여 마셔본다. 쐐한 쇠 비린내가 난다. 해묵어 쌓이고 쌓인 시간의 냄새는 아닐까. 사람이 남기고 간 물건은 사람처럼 남아서 속마음을 표현하고 있는 듯 하다. 녹이 쓴 놋그릇을 보면 꿈속에서 보았던 뽀글 파머를 한 어머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고맙다.” 꿈속에서 남긴 말이 녹 속에 함께 묻어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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