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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선 작가

생일 축하

작성자자윤김태선|작성시간24.02.29|조회수21 목록 댓글 0

                                                                          생일 축하

 

 

  문학회가 있는 날 저녁 일찌감치 모임 장소에 들어섰다. 회장님과 편집장님이 급히 주방 쪽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따라가니 깜짝 생일 이벤트를 준비 중이라며 케익과 꽃다발을 숨겼다. 방년 81세 원로 회원님의 생신이 바로 그날이었다. 일부러 잡으려 해도 어려운데 맞춘 듯 한날이라 그냥 넘길 수 없다고 했다. 나는 달콤한 케익까지 맛볼 기회를 주는 좋은 인연이라 여겼다. 우리는 큰 비밀이라도 나눈 첩보원처럼 식사 내내 의미심장한 눈길을 주고받으며 때를 노렸다.

  케익에 불을 붙이고 축하 노래를 불렀다. 촛불은 딱 하나였다. 팔십 대 잔치상을 받은 선생님은 판사 망치를 잡은 돌잡이처럼 싱글벙글댔다. 선생님을 포함한 가곡 교실에 다니는 회원들이 사중창으로 멋들어지게 답가를 불렀다. 노래가 끝나기 무섭게 옆에 앉은 나보다 젊은 회원이 happy brithday를 한 번 더 하자 했다. 그녀는 손을 들며 내일 모래가 본인 생일이니 미리 축하해 달라 했다.

  그녀는 당신 생일에 회원들의 축하를 받고 싶다 했다. 초등학생처럼 아까 나눠준 케익 접시까지 들고 서 있었다. 성냥이 떨어져서 탁자의 가스렌지를 점화했다. 가스 불이 활활 타오르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국수가락 만한 생일 초에 불붙이려 켰다 하니 다들 문어라도 한 마리 삶을 기세여서 깜짝 놀랐단다. 촛불은 10월의 사늘한 밤공기와 우리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주었다. 또 한 원로가 말했다. 이미 9월에 생일이 지나갔는데 ‘내년까지 기다리기 지겹다. 우짜꼬, 마! 지금 하자’ 하는 통에 한바탕 웃음보가 터졌다. 어머나,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내가 잊었네! 편집장 생일도 이달입니다. 회장님이 화들짝 놀라며 챙겼다. 더 꽂을 초가 없어도 우리들의 합창은 네 번이나 더 이어졌다.

  나는 갑자기 생일 축하를 받고 싶었다. 젊은 날 나이트클럽에 갔을 때 오늘이 생일이라며 우리 테이블에서 폭죽을 터뜨려달라고 우겼던 추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젊은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그간 남편과 둘이서만 하는 축하가 식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난 것도 아니고 한 달 이내로 다가오는 것도 아니어서 떼를 쓸 수가 없었다. 문득 내 생일을 챙겨주는 아들이 떠 올랐다.

  나는 아들 뜻에 따라 얼마 전 음력 2월생에서 양력 3월생이 되었다. 아들들 장가보내고 나니 내 생일이 두 며느리 생일을 사이에 두고 해가 바뀔 때마다 이쪽저쪽 옮겨붙었다. 시어머니 체신 문제라며 아들이 서둘러 내 생일을 양력으로 환산시켰다.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내 생일이 카렌다에 딱 고정되었다. 아들네 식구들은 생일 때가 되면 직접 오지 못하고 축하 동영상을 찍어 보냈다. 케익 앞에 둘러앉아 축하 노래를 부르고 ‘아빠! 누가 후 불지? 케익은 언때 먹어요’ 곁에 없어도 할머니 생일인 줄 아는 손자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 앳된 목소리로 차린 푸짐한 차반을 띄워 보냈다.

  창문 너머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쳐다보니 방긋 웃는 달님이 아들 어릴 적 얼굴 닮았다. 그 달님이 무어라 무어라 하는 듯했다. 가만히 귀 기울이니 어머니! 저를 왜 12월에 낳으셨나요 하는 것 같았다. 어릴 적 아들의 일기장에 적혔던 투정이 달무리처럼 맴돌며 쳐들어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학년 초부터 아이들은 반 친구들을 초대해서 생일잔치를 열었다. 한 달이 멀다 하고 친구 집으로 축하해주려 다녔다. 12월생인 아들은 생일상 앞에 서는 주인공이 아니라 선물 건네고 노래 불러주는 들러리였다. 그의 생일은 겨울 방학에 가려 식구들끼리 치를 때가 많았다.

  친구를 축하를 해주고 온 아들은 늘 혼자 방에 들어박혀 뭔가 끄적였다. 궁금해도 심기를 건드릴 것아 곁에 가지 않다가 우연히 아들의 일기장을 볼 기회가 있었다. 나도 생일이 빨랐으면 좋겠다는 메모와 함께 이제껏 동화책에서나 본듯한 삼단 케익과 맛난 음식이 가득 차려진 다과상을 그렸다. 선물꾸러미를 산더미처럼 쟁여놓은 풍경도 있었다. 아들이 받고 싶은 생일상인 것 같았다. 반장 선거가 있던 날도 어머니가 학교에 청소하러 오시고 생일잔치에 친구들을 초대했으면 좋겠다고 적혀있었다. 나는 아들이 과학반 반장을 맡았다 하기에 잘됐다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태어나는 날을 내가 어떻게 맘대로 할 수 있나, 아니면 네가 꼭 맞추어 나오지 그랬어, 중얼대며 보고도 안 읽은 척했다.

  돌이켜 보니 아들에게 미안하다. 저 달님에게 핀잔을 들어도 싸다 싶다. 아들아 너무 섭섭해 말아라. 어른이 되면 해마다 생일을 맞는 게 더 중요하더구나. 쌀밥에 미역국 한 사발이면 진수성찬이라 여겼던 나였고 너를 키울 때는 형편이 여의치 않아 너 마음 알고도 모른 척했단다. 진짜 멋진 어른이 되면 지금 이 문학회 행사처럼, 차려놓은 상에다 문우들과 축하를 주고받는 허물없는 사이로 재미있게 지낸단다. 인생은 이런 거다. 아들아!

  저 달님이 내 맘을 아들에게 전해주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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