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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포럼 43기

빌지/윤시오 5

작성자윤시오|작성시간26.06.08|조회수28 목록 댓글 2

빌지

 

 

윤시오

1. 종중 제례를 앞두고 지난해 빌지를 펼쳐 들었다. 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눌러쓴 글씨들이 촘촘하다. 쇠고기 몇 근, 조기 몇 마리, 배와 사과, 창호지 한 묶음까지. 한 줄 한 줄이 그날의 장터를 불러낸다. 비린내와 과일 향이 섞이고, 흥정하던 목소리와 웃음이 종이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 빌지는 물건값을 적은 종이이지만, 지나간 세월의 온기를 눌러 담은 기록이었다.

 

2. 그 속에는 빠진 것이 없다. 무엇을 샀고, 얼마나 썼고, 누구에게 값을 치렀는지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매년 소 한 마리를 잡았으니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빌지는 돈의 크기를 말하기보다, 정성을 얼마나 들였는지를 말해준다. 또박또박 눌러쓴 글씨 끝마다 사람의 손때와 숨결이 배어 있다.

 

3. 제삿날 장에서는 값을 깎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 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던 그 넉넉함 속에, 때로는 슬그머니 얹힌 바가지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장터를 탓하지 않았다. 음식점에서 계산서를 내밀며 이건 서비스입니다하고 음료 값을 빼주던 주인의 말처럼, 삶은 늘 우수리를 얹어 인정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4. 한참 동안 빌지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났다. 사람의 몸에도 이런 빌지가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는 매일 몸을 움직이며 살아간다. 시간과 체력, 젊음과 열정, 그리고 마음까지도. 그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몸 구석구석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5. 요즘 들어 그 기록이 자꾸 몸으로 읽힌다. 텃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허리가 먼저 앉으라 한다. 계단을 오르면 무릎이 낮게 울고, 잠은 얕아져 새벽마다 뒤척인다. 한때는 하룻밤이면 씻겨 나가던 피로가 이제는 며칠을 머문다. 병원을 들락이면서 에서 건네받은 검진 결과표는 말없이 수치로 경고하며, 지나온 세월을 침묵으로 전해준다.

 

6. 건강 검진 결과표는 내 몸이 내미는 빌지였다. 얼마를 썼는지, 얼마나 무리했는지. 얄팍한 종이속에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무리하게 달렸던 날들, 멈추지 못했던 욕심, 절규하는 몸의 신호를 애써 외면하며 지나온 시간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 단 한 줄도 비워두지 않고.

 

7.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나는 늘 서둘렀다. 지금 아니면 늦는다는 생각에 항상 자신을 재촉했다. 조금 더 가려 했고, 조금 더 얻으려 했으며, 조금 더 앞서야 한다고 믿었다. 허리가 뻐근하면 파스로 눌렀고, 피로는 커피로 덮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외상처럼 쓰며 살아왔다.

 

8. 그러나 삶은 외상이 아니었다. 순간순간이 모두 현찰이었다. 언젠가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하는, 한 번도 틀린적 없이 계산하는 정직한 장사였다. 잊고 지내던 빚이 한꺼번에 떠오르듯, 이제와서 내 몸이 그간의 빌지를 내밀며 계산을 요구한다. 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고.

 

9. 마음이 막힌다. 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고, 그때의 선택도 다시 할 수 없다. 후회는 늘 늦게 온다지만, 이렇게 또렷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이제는 숫자 대신 통증으로, 글씨 대신 불편함으로 삶은 나에게 그 값을 정확히 적어 내민다.

 

10. 어느 부분도 부인할 수 없다. 그 모든 것이 내가 살아온 흔적이 아닌가. 무리하게 달린 덕분에 얻은 것들이 있었고,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켜낸 것들도 있었다. 빌지는 나를 꾸짖는 종이가 아니라, 내가 여기까지 걸어왔음을 증명하는 진지한 기록이다.

 

11. 문득 백수를 넘긴 김형석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늙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모습을 만든다고 했다. 거울 속 얼굴도, 몸의 건강도 세월이 적어 내려간 기록이다. 그는 알츠하이머 또한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병이 아니라 오랜 습관이 쌓여 드러난 결과라고 말했다. 임종의 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가족과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인생의 차이는 뛰어난 재능보다 작은 습관에 있다는 그의 말이 빌지를 들여다보던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12. 내 곁에서도 많은 이들이 먼저 떠나갔다. 술을 즐기던 선배는 간질환으로 세상을 등졌고, 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하던 친구는 폐질환으로 생을 마쳤다. 육십 대에 알츠하이머가 찾아와 가족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요양원에서 눈을 감은 벗도 있었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삶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몸은 침묵하는 듯하지만, 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었다.

 

13. 이제는 새로운 빌지를 써야 한다. 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빠른 걸음보다 고른 걸음을, 욕심보다 평온을 선택하려 한다.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를 귀찮은 잔소리로 넘기지 않고, 하루의 피로와 마음의 무게도 세심히 살피려 한다. 남은 삶의 기록만큼은 조금 더 단정하고 따뜻하게 채우고 싶다.

 

14. 그렇게 생각하니 오래전 장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계산서를 내밀던 주인이 슬며시 한 줄을 지우며 웃던 모습이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15. 나도 내 삶에 그런 여백 하나쯤 남겨두고 싶다. 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값을 매기지 않고, 실수와 부족함을 조금은 덜어주며 살아가는 일. 때로는 쉬어가고, 때로는 용서하며, 때로는 욕심을 내려놓는 일. 그 작은 너그러움이 남은 날들을 더 따뜻하게 밝혀줄 것이다.

 

16. 삶의 빌지는 찢어버릴 수 없다. 이미 적힌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아직 비어 있는 줄들은 남아 있다. 무엇을 적어 넣을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오늘도 몸이 내미는 빌지를 받아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 남은 칸에는 후회보다 감사가, 통증보다 평온이, 욕심보다 사랑이 더 많이 기록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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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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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윤시오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08 140번째 올린 글(빌지)을 보완하려니 수정이 되지 않아 다시 올렸습니다.
    앞의 글은 삭제 부탁 드립니다.
  • 작성자고영옥 | 작성시간 26.06.23 빌지를 상징화하고 은유한 글이 매우 탄탄하고 고급진 글이라 여겨집니다

    알츠하이머의 원인이 오랜 습관으로 얻는 병이라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의학적으로 맞나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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