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IS MY LIFE
대구에세이포럼
43기-15차시
일시 : 2026년 6월 17일 (수) 6시
장소 : 한국수필문학관 2층 강의실
작품 목록
| 순서 | 제 목 | 작 가 | 편수 | 합평 담당 |
| 1 | 서산(書算), 삶을 새기는 망치질 | 금우동 | 7 | 김태선 |
| 2 | 미늘 | 황무선 | 6 | 김현지 |
| 3 | 인생행로(人生行路) | 서영숙 | 5 | 성경아 |
| 4 | 크럼플 존 | 김봄 | 6 | 서영숙 |
| 5 | 소금꽃 | 윤시오 | 4 | 옥경자 |
| 6 | 시장통 아이들 | 성경아 | 5 | 윤시오 |
합평 담당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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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금우동 김경선 김동식 김 봄 김성문 김영희 김정실 김태선
김현지 서영숙 성경아 오태숙 옥경자 우남희 윤시오 이미란 이은경 황무선
1. 서산(書算), 삶을 새기는 망치질/금우동7
1. 탕, 탕. 쇠망치가 단단한 바윗돌을 때린다. 쉰 번, 여든 번, 아흔아홉 번. 거듭되는 타격에도 바위는 미동조차 없다. 헛된 손짓처럼 보일 무렵, 백 번째 망치가 내리치자 쩍 하고 바위가 속살을 드러내며 갈라진다. 세상을 쪼갠 것은 마지막 한 방이 아니다. 앞서 지나간 아흔아홉 번의 묵직한 내리침이었다.
2. 어릴 적 아버지는 내 손에 글 대신 이 망치질을 쥐어 주셨다. 서당 훈장이셨던 아버지의 머리맡에서 내가 배운 첫 문구는 ‘서산(書算)’이었다. 한지를 겹겹이 붙이고 촛농을 먹여 반질반질해진 그것은 단순한 책갈피가 아니다. 글을 뼈에 새기는 나만의 망치였다. 나는 서산의 눈대를 접었다 하며, 쇠망치처럼 단호했던 아버지의 음성을 들었다.
“백번을 읽고 써라. 그러면 저절로 뜻이 열린다.
3.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왜 백 번이나 읽어야 하는지.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거두지 않으셨다.
매일 새벽,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 앞에 앉았다. 서산대를 따라 한 글자씩 짚어 나갔다. 처음에는 글자의 모양만 눈에 들어왔다. 뜻은커녕 제대로 읽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글을 알려주시지 않았다. 대신 서산의 눈 대를 접으며 반복하게 하셨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글자가 입에 완전히 익어갈 때쯤, 눈대를 접고 펴던 손끝에서 어느 순산 둔탁한 바위가 쩍 갈라지듯 안목이 열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그걸 ‘문리가 트인다’고 하셨다.
"아무리 어려운 공부라도 백 번을 읽고 쓰면 깨닫게 된다."
어릴 적, 그 말이 너무 지겹게 들렸다. 서산의 눈 대를 접고 펼치는 것이 고역이었고, 반복되는 글귀가 따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공부의 본질임을 깨닫게 되었다.
4. 책 한 권을 다 배우고 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책거리 떡을 나누었다. 그것은 작은 축제였다. 속이 꽉 찬 송편은 배움의 결실을 의미했고, 속이 빈 개피떡은 아직 채워야 할 배움을 뜻했다. 나는 떡을 손에 쥐고,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은 언제나 단호하면서도 따뜻했다.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며 스스로 다짐했다. 더 읽고, 더 쓰고, 더 배워야 한다고.
5. 아버지는 전쟁과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빨치산 대원들에게서 총살을 당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 제자 중 한 명이 나서서 자신을 대신 처형하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구해주었다. 그 제자의 결단 덕분에 아버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사건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어머니는 평생 마음의 서산대를 접으며 그 제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때의 미안함과 고마움은 마치 백 번을 읽고 쓰는 것처럼, 어머니의 기억 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었다.
6. 아버지는 시력 장애를 겪으면서도 서당 훈장으로, 처사 선비로의 삶을 사셨다. 안동 지방의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보다는 향리에 남아 학문을 탐구하고 가난을 미덕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선비 문화가 아버지의 도포 자락에 묻어있었다. 아버지는 그 길을 평생 걸어가셨다. 그러나 그 길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고, 기술을 익혀라."
그 말이 처음에는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는 듯해 의아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금융업과 재개발 정비사업에서, 또 염색과 도금 공장의 생산현장에서 나는 점점 더 아버지의 말을 곱씹게 되었다.
7. “글공부로 쌓아 올린 학문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과 맞닿지 않으면, 현실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학문의 단단한 껍질이 현실이라는 메마른 땅과 맞닿지 않을 때, 글공부는 얼마나 무력한가.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단순한 손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이며, 변화를 읽고 적응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처사 선비로서의 길을 걸으셨지만, 그 길이 전부는 아님을 내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8. 세상은 내 다짐만큼 쉬운 곳이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서산을 펼쳐야 할 때를 놓친다. 공부에서도, 삶에서도, 백 번을 읽고 쓰는 인내를 견디지 못하고 쉽사리 포기해 버릴 때가 많았다. 김득신은 독서를 일만 번 이상 하며 둔재에서 천하의 명문장가가 되었지만,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세상을 헤매며, 배움의 길에서 수없이 흔들린다.
9. 어느 날 문득, 나는 다시 서산을 만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앉아 서산을 접고 초를 먹이던 그때처럼. 손끝에 닿는 그 감촉이 생생하다. 이제 아버지는 곁에 없다. 서산을 손에 쥐고, 아버지의 음성을 떠올린다.
"백 번을 읽고 써라. 그러면 저절로 문이 열린다."
나는 다시 서산의 눈 대를 접고 펼친다. 이제야 아버지의 말씀이 온전히 마음에 스며든다. 비로소, 나는 삶을 새기는 망치질을 시작한다.
2. 미늘/ 황무선6
1. 노란 유채꽃이 산들거리는 사월이 오면 제주도의 달콤했던 신혼여행이 생각난다. 장미빛 인생을 꿈꾸며 동화 같은 결혼 생활을 화폭에 그려 넣곤 했다. 철없는 환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닥이 났다. 우여곡절이 모래알처럼 겹겹이 쌓였고 장애물이 곳곳에서 손짓했다.
2. 결혼해서 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결혼 생활은 시댁의 환경을 끌어안아야 했고 현실의 무게감으로 다가왔다. 오남매의 외아들인 남편은 나와 다른 환경에서 지냈다. 서로의 모난 성격을 아마추어 조각가가 되어 둥근 옥돌로 다듬었다. 흩어진 시간의 파편들 속에서 스스로 남자에게 코를 낚이게 된 놀랄만한 계기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3. 어머님은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안방으로 불렀다. 혼수 비용으로 많은 돈을 지출했으니 월급을 받으면 매달 갚으라고 하셨다. 당시 월급이 십오만 원 남짓했기에 어머님의 제안에 동의할 수 없었다. 어머님의 말씀을 거역한 죄로 미운털이 나무의 나이테처럼 박혔다.
4. 예상하지 않은 고부갈등이 둥지를 틀기 시작했다. 남편은 서늘한 고부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귀가 시간이 늦어졌고 술을 먹고 오는 날이 잦았다. 나는 겨울에 난방이 되지 않은 냉골에서 이불로 몸을 꽁꽁 동여맨 채 창문을 열고 남자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신세계라고 여긴 결혼생활은 쉽게 등을 돌렸고 꼬인 실타래가 되어 현실을 넘나들었다.
5. 첫 딸이 두 돌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머님은 남편과 며느리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가출을 감행하셨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따로 없었고 어린 딸을 혼자 두고 직장에 출근할 수 없었다. 나는 멍하니 암담한 잿빛 하늘을 쳐다보았다. 당장 어린 딸을 맡길 데가 막연했다. 열흘간 올케의 사돈어른에게 딸을 맡겼다. 딸은 낯선 사돈 할머니 손에서 떼를 쓰며 울기 시작했다.
6. 어머님의 가출은 보름이 지난 후에 돌아오셨다. 속상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다짜고짜 손녀를 양육할 수 없다고 딸아이와 함께 시댁에서 나가라고 하셨다. 직장에 다니는 며느리의 상황을 인지한 어머님이 아니었던가? 어머님은 어린 손녀를 볼모로 며느리에게 고생을 해보라는 마음이 가득하셨다. 준비 없이 방을 비우라고 하시니 머리가 하얘졌다. 재형저축으로 마련한 돈이 조금 있었지만 두 칸의 방을 얻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 겨우 부엌이 달린 단칸방을 얻을 수 있었다.
7. 딸은 의도하지 않게 낯선 아이돌보미에게 맡겨졌다. 어느 날 퇴근해서 집에 오니 계단에서 굴러 쇄골뼈가 부러졌다. 작은 몸에 깁스한 걸 보니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고 내 가슴은 시퍼렇게 멍이 들었다. 신은 내게 알 수 없는 시련의 색깔로 시험하기 시작했다. 딸은 개미가 출현하는 성냥갑을 닮은 방에서 개미와 친구가 되었고 벼처럼 훌쩍 자라났다.
8. 어머님은 내가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고 시댁으로 들어올 줄 아셨다. 전세로 얻은 작은 방에서 잘 지내는 걸 보니 화가 단단히 나셨다. 급기야 아들에게 원치 않은 이혼을 강요했고 나에게 처녀장가를 들인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다. 나는 어머님이 외아들을 소유한 대가치고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이혼을 요구하는 어머님 말씀을 듣지 않고 욕바가지를 자처했다. 나는 남편이 착한 성품을 보여 준 덕분으로 스스로 남자의 미늘이 되었다. 유년 시절에는 아버지 말씀을 따랐지만 결혼해서 나를 지켜 준 남자에게 자의로 구속되어 하늘처럼 받들기로 마음먹었다.
9. 나는 단칸방에서 벗어나기 위해 저축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남편과 의논하여 월급을 받으면 최소한의 돈을 제외하고 거의 저축했다. 목돈이 모여야 어머님이 좌지우지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 경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좁은 단칸방에 살면서 일찌감치 터득했고 검소의 미덕을 실천하기로 했다.
10. 결혼하고 7년이 지나서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남편과 맞벌이로 시작해서 절약하고 저축해도 입주 금액은 턱없이 부족했다. 은행에 융자를 받아도 모자라서 전세금을 빼기 위해 머리를 숙이고 시댁에 들어가기로 했다. 입주할 때까지 어머님 집에서 2년 동안 군말 없이 조용히 지냈다.
11. 어머님과의 고부갈등은 봄눈 녹듯이 조금씩 해소되고 있었다. 딸아이도 예전처럼 잘 보살펴 주셨다. 무엇보다 남편의 가교 역할이 빛을 발했다. 어머님과 아내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되어 힘들게 버틴 남편을 기억한다. 시댁에서 쫓겨났던 것이 남편과 화합하는 단초가 되었고 역경을 이겨 낸 용기가 되었다.
12. 햇볕이 들어오지 않은 작은 방에서 개미를 만지며 놀던 딸을 회상하면 나도 몰래 소스라치게 놀란다. 딸의 유년 시절 결핍을 경험하게 한 것이 아픈 상처로 남아 있다. 다행한 것은 부모의 돈독한 관계에서 사랑으로 보살핀것이 딸 아이가 성장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을 터이다.
13. 어머님은 79세에 치매로 거동이 불편하여 9년 동안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시누이들이 멀리 있어서 주로 남편과 내가 어머님이 입원한 병원을 찾았다. 남편은 일주일에 한 번, 나는 2주일에 한 번이었다. 요양병원에 있는 다른 가족들이 한마디씩 했다.
“요즘 며느리는 요양병원에 입원한 부모에게 아들을 잘 보내지 않아요”.
“이 댁 며느리가 너무 착해요”.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남편을 어머님이 입원한 요양병원에 자주 보낸다고 칭찬을 하는 것이 의아했다.
14. 나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집을 살았지만 오랜 기간 입원 중인 어머님이 한편으로 측은했다. 어머님은 정신이 있을 때, 나를 지긋이 바라보며 "며늘 아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고 너무 고맙다."라고 하셨다. 남편의 바람처럼 나도 어머님이 어렵게 살아오신 세월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둥근 마음이 되었다. 어머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마음이 편안했고 남편을 잘 키워 주어 감사했다. 어머님과 남편에게 은혜를 입었으니 두 분에게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아름다운 숙제를 소중하게 안았다.
15. 나의 삶은 언제나 일에 쫓기면서 살아왔다. 삶이란 돌아보면 산그늘로 짙어지고 거실의 벽시계는 낙엽 밟은 소리를 냈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즐거움과 고통이 갈라지는 것 같았다. 바람이 불면 몸과 마음도 성글게 구멍이 뚫렸다.
16. 나는 스스로 남편의 낚싯바늘에 코가 꿰여 살아온 삶을 후회하지 않는다. 헤어질 위기에서 선뜻 아내를 선택한 남편을 고맙게 생각한다. 또한 남편을 이세상에 있게 해 준 어머님의 하늘같고 바다같은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3. 인생행로(人生行路) /서영숙5
1. 한 많은 인생을 접고 큰집 사촌오빠가 여든아홉의 연세로 영면에 드셨다. 생의 마지막 장례의식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일일 장으로 간소하게 치러졌다. 상주들은 번거롭지 않아서 편하게 보이지만, 멀리서 늦게 도착한 친척들은 다소 아쉬움이 남았다.
2. 파란만장한 삶의 시작은 4대가 모여 사는 한 집안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오빠는 맏아들에 종손이니 발이 땅에 닿을 여가 없이 층층 여인들의 손에서 귀하게 자랐다. 타고난 총명으로 어린 시절은 온 가족의 기대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으며, 화악산 아래 첫 동네에서 우상에 가까운 존재로 자랐다.
3. 그때 어린 내 눈에 비친 오빠의 모습은 환상 그 자체였다. 각이 반듯한 모자와 군복에 빛이 나는 계급장이 달려있었던 자랑스러운 오빠. 가끔은 우리 집에 며칠씩 머물다 가기도 했는데 그때는 이유를 모르고 좋아하기만 했다. 엄마가 해주는 게장을 맛있게 먹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와는 연차가 많아 대화를 나눠본 기억은 거의 없고 그냥 우러러 보이는 큰오빠였다.
4. 세월이 흘러 철이 들면서 어른들의 대화에서 오빠의 삶을 듣게 되었다. 귀공자 같았던 오빠에게 이런 아픔이 있음을 이해하기는 아직 어렸다. 그동안 미심쩍었던 일들을 하나씩 알게 되면서 심적으로 분노와 연민이 뒤엉켰다. 한 시대가 낳은 매질 없는 폭력에 가까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5. 오빠는 군 제대를 앞두고 집안이 정해주는 여인과 선도 보지 않고 결혼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지만 가부장제의 정략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내 자식의 행복을 위해 선택한 어른들의 무지가 한 가정을 통째로 삼켜버렸다. 잘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나의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첫날밤을 보낸 새신랑이 다음 날 집을 떠나야만 했던 그 마음은 오죽했을까. 오빠의 군대 복귀는 남은 가족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 길만이 살아남기 위한 도피처였을까. 내가 본 그 빛나던 군복은 명예가 아니었다. 달콤한 신혼은커녕 올케언니는 여자로서 다소 무뚝뚝한 편이어서 그런 신부가 보기 싫어서라고 어른들이 수군 그렸다. 그 길로 직업군인에 몸담아 버린 것이다. 얼마나 싫었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지 나의 시선 둘 곳이 없었다.
6. 정신세계와 관계없이 육체의 만남으로 첫날밤을 보냈으니 아들이 태어났다. 신랑도 없는 층층시하에서 새색시는 아들을 낳고 고된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 아들이 태어나면 오겠거니 기대했던 신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눈물로 아들 하나 키우며 수많은 밤을 어떻게 보내야 했던가 생각하면 기가 막힌 일이었다. 올케언니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잠시도 앉아 쉴 여가 없이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견뎌내었다. 오, 육십년대 우리나라 여성들의 실상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아빠는 오지 않고 아이는 커가니 집안 어른들이 하는 수 없이 며느리를 친정으로 보냈다. 자식을 떼놓고 가는 어미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눈물로 돌아서는 올케언니의 발걸음에 어린 나는 행복을 빌어 주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7. 같은 여자로서 오빠가 원망스러웠으나 한편으로 이해되는 면도 있었다. 신부가 보기 싫어 군에 재입대한 오빠는 자신의 시름을 잊기 위해 최전방 부대를 자청했다.
한 집안의 종손인 처지에 본가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오기는커녕 마음에 번민만 가득했던 오빠다. 남자로서, 아빠로서 책임과 의무감을 동시에 짊어지고 번민하던 어느 날, 서로의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있는 여인이 나타났다. 남매를 키우며 자신을 삶을 가꾸어가는 홀로된 이상적인 여인이었다. 서로 아픈 처지가 있는터라 마음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집안 어른들은 새 여자가 생겼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만 할 뿐이었다.
8. 몇 년의 교제 끝에 새 올케언니와 살림을 차리고 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본가에 내 아이가 있고, 여자에게 두 남매가 있고, 새 생명으로 태어난 우리 아이였다. 키 크고 잘생긴 아이는 오빠의 어릴 때 모습을 보는듯했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갈 무렵이 되어 새 올케언니는 오빠를 따라 고향인 본가에 처음으로 인사하러 왔다. 두 남매를 친정에 맡기고 매서운 시댁의 문지방을 어떻게 넘었을까. 죄인 같은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9. 후에 새 올케언니에게 들은 얘기로는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내는 한 군인이 있었다. 늦은 밤 복귀도 하지 않고 술에 취해 헤매는 것이 안쓰러워 하룻밤을 재워 주었다. 오빠와의 첫 만남이었다. 대화가 통하고 상대방의 처지가 하도 딱하여 처음에는 측은지심으로 만나주었는데 그러다 정이 들었단다. 이제야 오빠의 행복이 시작되는 듯하였다.
10. 올케언니는 본가의 시누가 여럿 있었으나 특별히 사촌 시누인 나와 관계가 좋았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섯 명의 시누이와 사이가 좋지 못했다. 사정을 들어보면 다 이유가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시누와 올케관계인 것 같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부끄러운 얘기지만 집안의 사소한 문제로 큰집에 형제자매들끼리 등을 지고 살았다. 올케언니의 하소연은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도 적군인데 여린 충청도 댁 올케언니는 억센 경상도 다섯 시누를 상대하기에 벅찼다. 나의 오지랖이 올케언니의 마음에 다가가 대화가 시작되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어 주었나 보다.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고 화해시키려고 많이 노력하였으나 결과는 원점이었다.
11. 강산이 몇 번 바뀌는 동안 이제 모두 노인이 되었다. 나를 따라 교회도 잘 나가던 오빠 부부였는데 언젠가부터 소식이 끊어졌다. 친정에 갔다 오는 길에 몇 번 큰집에 들렀으나 갈 때마다 대문이 잠겨있었다. 오빠는 월남 참전용사로서 보훈 가족이다. 몸이 아프면 대구보훈병원에서 치료를 받는다. 연세가 들면서 장기입원을 했을 때도 병문안했는데 거기에도 없어 궁금해하면서 몇 년의 시간이 그냥 흘렀다.
12. 내일이 오빠의 발인이라면서 늦은 오후 시간에 연락이 왔다. 부랴부랴 남편과 길을 나섰다. 올케언니가 데려온 그 남매가 커서 육십 나이가 되었다. 친아버지가 아니어도 모셔와 돌봐주고 장례 모든 절차를 책임지고 하는 남매가 고마웠다. 그동안 오빠가 그들에게 베풀어준 진정한 가족관계를 보는듯하여 가슴이 뭉클했다.
13. 대구 어느 요양병원에 입원 중인 올케언니는 남편이 가신지도 모른 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었다. 장례를 마치고 입원 중인 올케언니를 찾아갔다. 올케언니는 올해 여든다섯으로 치매 증세가 있어 정신이 말짱할 때는 사람을 알아보다가 누구냐고 묻곤 했다. 나를 알아보고는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놓질 않았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 마스크를 내리니 치아가 다 망가져서 합죽 할머니가 되어 있었다. 젊을 때 잘 관리하지 못한 탓이리라. 남편이 돌아가신 걸 알면 얼마나 충격이 클까. 마음에 찬바람이 일었다. 올케언니가 입을 열었다.
“올 때가 되었는데 이 양반이 왜 이리 안오는지 모르겠네.”
“언니, 오빠는 다리가 많이 아파 걸음을 걸을 수 없어 못 오신다고 하네요.”
나의 거짓말에 며칠을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고 되풀이하며 울상이다. 장례식을 마친 자녀들이 자기들의 집 가까운 곳으로 올케언니를 모셔가겠다며 왔다.
14. 지금 헤어지면 살아생전에 언제 볼 수 있을까. 세월의 무상함이 가슴을 짓눌렀다. 말속에 인정이 뚝뚝 묻어나는 언니는 몸이 좀 나아지면 밖에서 만나자고 했다.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올케의 마음을 알기에 돌아오는 마음이 허허로웠다. 오빠의 인생행로가 끝이 났다.
4. 크럼플 존 / 김봄6
1)우회 도로는 반월형의 내리막길이었다. 속도를 줄여서 내려오다 4차선으로 진입해야 제 길을 갈 수 있었다. 진입할 대로에는 신호를 받은 차들이 쌩쌩 지나갔다. 자칫하면 사고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느슨한 차간 거리를 노리며 연신 고개를 돌려 좌우를 확인했다.
2)그 순간, 뒤에서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앞으로 쏠렸다. 이어 머리가 시트에 세게 부딪혔다. 전광석화 같은 일이었다. 무방비 상태에서 후미를 들이받힌 충격은 생각보다 컸다. 한동안 멍한 상태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요즘 가성비 좋은 차로 인기를 끈다는 대형 SUV가 위압적인 모습으로 서 있었다.
3)진정을 하려 해도 얼굴로 열감이 치밀고, 온몸이 떨렸다. 목덜미를 부여잡고 차에서 내리자 상대 운전자의 얼굴이 보였다.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린 노인이었다. 놀란 것은 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는 내 상태를 묻기보다 먼저 자기 차부터 살폈다. 순간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교통량이 많은 곳이라 따질 겨를도 없었다. 사고 차량 때문에 도로는 순식간에 밀려들었고, 우선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야 했다.
4)차를 세우고 상태를 확인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트렁크는 찌그러졌고 범퍼는 깨져 있었다. 몸 아픈 건 둘째치고, 멀쩡히 가던 길에 억울한 사고를 당했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내리막길에서 속도도 줄이지 않고 들이받으면 우짭니까. 한 달도 안 된 새 차를…”
그러자 노인은 자기 차의 그릴을 쓰다듬으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차 뽑은 지 일주일도 안 됐어요.”
5)피해자든 가해자든 차를 앞에 두고 속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차 가격믈 따져도 내 차가 훨씬 비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덩치에 밀려 찌그러지고 깨져 있었다. 반면 노인의 차는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다. 뒤에서 받혔더라도 튼튼하고 안전하다고 믿고 샀던 차가 볼품없이 망가진 모습을 보니 실망감이 컸다. 곧바로 영업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불만을 토로했다. 그러자 직원은 담담하게 말했다.
“크럼플 존이 잘 작동한 겁니다.”
6)자동차의 안전 설계에는 ‘크럼플 존(Crumple Zone)’이라는 개념이 있다. 충돌 시 차체 전체가 충격을 받는 대신 특정 부위가 먼저 찌그러지고 부서지며 충격을 흡수하는 구간이다. 다시 말해 부서지도록 설계된 자리다. 차가 사람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상처를 떠안는 영역인 셈이다.
7)그 말을 듣는 순간 크럼플 존이라는 단어가 새롭게 다가왔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관계도 크럼플 존이 있다. 우리는 흔히 단단해야 오래간다고 믿는다. 쉽게 흔들리지 않고, 웬만한 충격에도 끄떡없는 사이가 성숙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짜 오래가는 관계는 의외로 단단하기만 한 관계가 아니다. 때로는 기꺼이 찌그러질 줄 아는 관계다. 먼저 사과하는 사람, 험악한 분위기를 수습하는 사람, 갈등이 폭발하기 직전 한걸음 물러서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관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충격을 대신 받아낸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마음 한편에는 접힌 자국이 남는다.
8)자동차의 크럼플 존은 한 번 크게 망가지면 교체가 필요하다. 사람의 마음도 다르지 않다. 계속해서 충격을 흡수하다 보면 언젠가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른다. 그래서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크럼플 존이 되느냐가 아니라, 서로 번갈아 그 자리를 맡을 수 있느냐일지도 모른다.
9)그런 의미에서 피해자인 내 입장에서 본다면, 이번 사고에서 크럼플 존이 되어야 할 쪽은 분명했다. 차간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책임, 속도를 줄이지 못한 책임, 위험을 예측하지 못한 책임은 충돌을 일으킨 쪽에 있었다. 충격을 완충하는 몫은 들이받힌 사람이 아니라 들이받은 사람이 감당해야 한다. 피해자인 내가 먼저 먼저 이해하고 양보해야 할 도덕적 의무는 없다.
10)양쪽 보험회사 직원들이 도착해 사고를 수습했고, 곧이어 견인차가 왔다. 내 차는 처참한 몰골로 거대한 견인차 등에 업힌 채 어디론가 떠나갔다. 마치 다친 병사가 들것에 실려가는 모습 같았다. 노인의 차도 정리가 끝날 무렵이었다. 그는 실려 가는 내 차를 한참 바라보다가 조용히 내게 다가왔다.
“많이 놀랐을 텐데, 우선 병원부터 가서 치료 잘 받으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정중한 그의 말투에 굳어 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서로 운이 나빴다고 생각해요. 액땜했다고 치지요.”
말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맺힌 응어리가 조금 가벼워졌다.
11)성숙한 관계란 서로의 찌그러짐을 알아보고 그 상처를 함부로 지나치지 않는 관계인지도 모른다. 크럼플 존은 단지 자동차에만 있는 장치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관계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기꺼이 찌그러질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날의 사고가 가르쳐 주었다.
5. 소금꽃 /윤시오4
1. 큰비가 온다는 예보에 마음이 바빠진다. 텃밭 도랑이 막혀 물이 고여 있으니, 비라도 쏟아지면 순식간에 작물이 잠길 것이다. 후덥지근한 공기가 숨을 막듯 달라붙고, 옷은 금세 땀범벅이 되었다. 삽을 들고 정신없이 흙을 퍼내며 도랑을 쳤다. 벗어놓은 상의를 집어 드는 순간, 군데군데 하얗게 얼룩이 보인다. 소금꽃이다.
2. 어머니의 등에는 소금꽃이 자주 피었다. 한여름 뙤약볕 아래서 밭을 매고 돌아오시던 날이면, 물기 머금은 적삼은 얼룩져 있었고, 마른 자리에는 군데군데 하얗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3. 어린 나에게는 신기하게 보였다.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던 그 무늬가, 들판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꽃처럼 보였다. “엄마, 등에 하얀 얼룩이 졌어요?”하고 물으면, 당신은 웃으며 등을 털어내셨고, 그때마다 하얀 가루가 바스러지듯 떨어졌다. 어머니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셨지만, 나는 그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4.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난 뒤, 어머니는 가장의 멍에를 썼다. 여러 남매의 끼니와 빨래, 집안일은 물론 계절마다 바뀌는 농사일까지 도맡았다. 이른 봄 못자리를 시작으로 누에치기와 밭농사까지, 새벽부터 밤까지 쉴 틈이 없었다. 여름에는 밭고랑에서 풀을 매고, 겨울에는 얼음을 깨고 빨래를 하였다. 그런 인고의 시간 속에서 우리는 자라났다.
5. 고된 노동으로 흘러나온 땀은 햇볕에 마르며 흔적을 남긴다. 그것은 단순한 땀자국이 아니라 하루의 고단함이 말라붙은 자리이고,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조금씩 덜어낸 증표였다. 어머니는 꽃을 피운 것이 아니라, 자신을 소금처럼 녹여 우리를 키워낸 것이다.
6. 나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따뜻한 밥상이 차려져 있었고, 깨끗한 옷이 개켜져 있었다. 필요한 것은 늘 제때 채워지고, 손만 내밀면 용돈이 쥐어진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수고 위에 놓인 것인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7. 어머니의 등은 늘 햇볕을 향해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일하다 보면 얼굴보다 등이 먼저 타 들어간다. 그 위에 맺혔다 마르기를 반복하던 땀방울들. 그것이 쌓이고 쌓여 하얀 꽃무늬를 이루었을 때, 어머니의 하루는 비로소 끝났다. 하지만 그것은 다음 날의 시작이었다.
8. 결혼을 하고 어머니 곁을 떠나 살았다. 농사일과 멀어진 삶이 이어졌고, 여름이 되면 더위를 피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시원한 공간에서 보내는 하루가 이어지고, 땀 흘릴 일 없는 생활에 익숙해졌다. 당신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았다.
9. 나는 호강은 못 해도 고생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편하게 살아왔다. 자식들을 위해 나름 희생했던 일도 있지만 어머니처럼 한생을 헌신하지 않았다. 다만, 그 모습을 기리며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 애쓸 뿐이다. 더위를 견디고,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나의 일부를 조용히 덜어내는 일들. 어머니가 아무 말 없이 해왔던 방식으로, 아주 조금씩 흉내 내려고 노력하고 있을 뿐이다.
10. 이제야 깨닫는다. 소금꽃은 아름다움으로 피어나는 것이 아니라, 견딤 끝에 남는 것이라는 것을.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조금씩 내어줄 때 비로소 생겨나는 흔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의미는, 피우는 사람보다 바라보는 사람이 더 늦게 알아차린다는 것도.
11. 어머니의 등에 피었던 소금꽃은 이미 오래전에 바람처럼 흩어져 형체마저 없어졌다. 그러나 그 꽃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모습으로 내 가슴에 피어 있다.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작은 결들 속에, 보이지 않게 스며 있다.
12. 오래된 사진첩을 넘기다 밭 한가운데 서 계신 어머니 모습을 보았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 거칠어진 손. 사진 속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는 그 등에 소금꽃이 피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내가 기억하는 그 꽃은 한순간의 장면이 아니라, 수없이 반복된 시간의 층이었다는 것을.
13. 아직 마무리는 안 되었지만 대충 정리된 도랑을 보니 속이 확 트인다. 도랑 입구부터 찬찬히 둘러보고 남은 흙을 퍼내며 정리하였다. 막혀 있던 물길이 트여 고여 있던 물이 흐르는 소리가 선율 연주처럼 들린다. 땀이 이마를 타고 등줄기를 적신다.
14. 집으로 돌아와 벗어둔 상의를 다시 집어 든다. 그 위에 드문드문 피어난 하얀 얼룩들. 한참을 바라보다가 생각에 잠긴다. ‘나는, 그 소금꽃 속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6. 시장통 아이들/ 성경아 5
1. 휴일 아침이었다. 남편이 오랜만에 장구경을 가자고 제안했다. 지난 출장길에 봐두었다는 칼국숫집 이야기를 꺼내며, 봄나물을 살 겸 점심이나 먹고 오자는 거였다. 말끔하게 손질되어 진열대에 오른 나물이 아니라 흙 묻은 햇나물이 아른거렸다. 어린 시절 시장통에 살았다. 남편 역시 동네는 달라도 시장에서 나고 자랐다. 우리에게 시골 오일장은 어린 날을 그대로 펼쳐놓은 곳이었다. 갖은 나물을 넣고 한입 가득 비벼 먹자는 남편 말에 얼른 옷가지를 챙겼다.
2. 강원도 오지 동네에서 자란 내게 오일장은 닷새마다 돌아오는 잔치마당이었다. 적막하던 골목이 사람으로 북적였고, 난전마다 생선들이 비릿하게 쏟아졌다. 우리 양품점까지 손님이 들어차면 엄마 눈을 피해 슬그머니 집을 빠져나왔다. 익숙한 골목마다 구경거리가 넘쳤다. 찐빵 하나를 손에 쥐고 흥정판 사이를 서성이다가 약장수의 농담에 붙들리기 일쑤였다. 그 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이 다가와 슬며시 어깨를 쳤다.
3. 아이들과 장터를 뛰어다니다 보면 어느새 대폿집 골목이었다. 평소에는 얼씬도 못 하지만 장날만큼은 달랐다. 술청 밖에 쪼그린 채 젓가락 장단을 훔쳐보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술 취한 어른들의 싸움마저 신나는 구경이었다. 완벽한 자유였다. 아이들을 살피는 시선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시장에 활기가 넘칠수록 우리를 둘러싼 적막도 깊어졌다. 어디선가 “떨이요.”하는 소리가 들리면 약속이나 한 듯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바쁜 부모 곁에서 아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빈자리를 견뎌냈다.
4. 장터는 여전히 북적였다. 온 골목을 누비며 원추리와 어수리, 고들빼기를 한 아름 사고 나니 제법 출출했다. 남편이 이야기한 칼국숫집으로 향했다. 점심때를 지났는데도 가게 입구까지 손님이 빼곡했다. 빈자리를 찾아 겨우 앉았다. 종업원 없이 부부 둘이서 꾸려가는 집인지 손님들이 상을 치우고 있었다. 나도 앞사람이 밀어 둔 그릇을 추려 주방으로 가져갔다. 뜨거운 김이 솟는 주방 구석, 아이 하나가 밀가루 포대 옆에 반쯤 기대어 널브러져 있었다. 아직 예닐곱도 되지 않아 보였다. 바닥에는 노란 유치원 가방이 아무렇게나 굴러다녔다.
5. 자리에 돌아와서도 주방 쪽으로 자꾸 눈이 갔다. 국수 냄비가 아이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렀다. 두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아이가 게슴츠레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열이 나는 듯했다. 엄마가 오갈 때마다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지만, 아이 엄마는 손을 떼어내고 다시 손님들 사이로 들어갔다. 손에 쥔 휴대폰에서는 만화 영화 소리가 흘러나왔지만, 아이 시선은 줄곧 엄마 등만 따라다녔다.
6. 남편 역시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숟가락을 놓으며 남편이 낮게 한숨을 쉬었다. 시장통에서 자란 우리에게 저 풍경은 낯선 남의 사정이 아니었다. 바쁜 부모를 눈으로만 쫓으며 덩그러니 남겨졌던 아이들은 안다. 밀가루 포대 옆이든, 흙바닥이든, 달아오른 얼굴로 부모 등만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우리들의 어린 날이었다.
7. 주문한 칼국수가 나왔다. 진한 멸치 육수 냄새가 구수했지만 선뜻 젓가락이 가지 않았다. 국숫발을 두어 번 들어 올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유를 묻듯 바라보던 남편이 내 시선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길을 내어주었다. 손 바쁜 아이 엄마에게 다가가 아이를 잠시 데리고 나가도 되겠냐고 물었다. 여자는 난처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밀려드는 주문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8. 낯선 아이는 내 등에 업히자마자 이마를 묻었다. 가게를 나와 몇 발짝 떼지도 않았는데 금세 잠들었다. 그러면서도 조막만 한 손으로 내 옷자락을 꼭 붙들었다. 뼈마디가 만져질 만큼 마른 몸이 들썩일 때마다 쇳소리 섞인 숨이 등을 타고 흘렀다. 분명 해열제를 먹었을 텐데도 식은땀으로 젖은 아이의 옷가지가 축축하게 달라붙었다. 불덩이 같은 체온, 낮게 가라앉은 몸. 등이 먼저 알아보았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9. 네 살 터울의 동생도 장날이면 유독 열이 올랐다. 마시는 해열제는 번번이 게워 내는 통에 엄마는 아침부터 서스펜 좌약을 밀어 넣었다. 누군가 가게 문을 밀었다. 서둘러 동생을 내 등에 올린 엄마는 “어서 오세요”를 외치며 방과 가게 사이 미닫이를 닫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밀려들었고, 곧 웃음도 터졌다. 동생을 방에 뉘고 슬그머니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장터를 맴돌면서도 등 뒤에서 동생이 부르는 듯했다. 돌아갈 때면 늘 동생이 좋아하는 핫도그를 샀다. 장날에만 파는 특별식이었다. 핫도그를 내밀어도 동생은 그저 설탕만 핥아 먹었다.
10. 국숫집 근처 골목을 대여섯 바퀴쯤 돌았을 때 등 뒤에서 아이가 나를 불렀다. “아줌마, 오줌 마려워요.” 아이 눈이 아까보다 조금 맑아져 있었다. 가게로 돌아오니 여전히 수선스러웠다. 화장실로 데려가 소변을 누이고, 가지고 있던 가제 손수건을 적셔 땀으로 얼룩진 아이 얼굴과 목덜미를 가만가만 닦았다. 그때 아이 엄마가 화장실로 들어왔다. 얼른 가서 식사하라며 고맙다는 말을 이었다.
11. 자리로 돌아오니 국수가 다 불어 있었다. 남편이 등을 토닥이고는 김치통에서 겉절이를 떠 주었다. 미지근하게 식어도 국물은 진했다. 면발도 오히려 술술 넘어갔다. 숟가락으로 국수를 밀어 넣으며 주방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이는 언제 갈아입었는지 깨끗한 새 옷을 입고 주방 옆에 앉아 빵을 베어 물고 있었다. 아이 엄마는 여전히 뜨거운 국수를 양손에 들고 테이블 사이를 누볐다.
12. 어린 날 내가 살던 시장에서도, 오늘 들른 오일장에서도 엄마의 시간은 늘 모자랐다. 생업의 열기가 뜨거울수록 아이를 품에 안고 달래는 여유라는 건 사치에 가까웠을 것이다. 돌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뜨거운 불구덩이 앞에서 국수를 삶고, 칭얼대는 울음을 자르며 매정하게 미닫이를 닫는 것은 자식을 먹여 살리려는 또 다른 형태의 사랑이었다. 엄마가 닫았던 문과 국숫집 여자의 분주한 등이 겹쳐 보이는 것은, 나 역시 먹고 사는 일의 무게를 알아버린 까닭이다.
13. 마지막 국물까지 다 들이켰을 때 남편이 계산을 마치고 테이블로 왔다. 손에는 포장한 국수 두 봉지가 들려 있었다. 하나는 옆집, 하나는 뒷집 몫이랬다. 국수 솥이 조금이라도 빨리 비워져야 저 부모가 아이를 안아줄 시간이 앞당겨진다는 걸, 시장통에서 자란 남편은 몸으로 알고 있었다.
14. 차에 올라타려는데 주인 여자가 따라와 겉절이 한 봉지를 더 얹어주었다. 남편이 부지런히 날라 주던 접시를 눈여겨보았던 모양이었다. 봄나물과 멸치 육수, 겉절이 냄새로 돌아오는 차 안이 푸근했다. 장터를 떠나온 지 오래지만, 울다 잠든 흔적을 등판에 새긴 채 살아왔다. 어린 내 등 뒤로 엄마의 답변이 도착한 것 같았다. 그 시절 고단했을 엄마 손을 이제야 잡아본다. (16.5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