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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포럼 43기

Re: 사제의 정 (師弟의 情) / 이미란6

작성자이미란|작성시간26.06.12|조회수28 목록 댓글 0

사제의 정 (師弟)

 

동해안 후포항에 대게 축제를 찾았다. 오래전, 교사 생활 첫 근무지였던 곳이라 감회가 새롭다. 그 시절에는 길옆이 바로 모래사장으로 바다와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 해변에 둑을 쌓고 시멘트로 바닥을 정리하여 시가지 모양새가 갖추어져 상점이 즐비한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직접 잡아서 파는 곳이라 생선과 대게가 신선하다며 호객하는 횟집에 자리를 잡는다.

선생님, 저 기억 나세요?

머리에 된서리가 내리고 얼굴에 세월의 계곡이 골골이 자리 잡은 초로의 주인 남자가 반가워한다. 해삼을 가져온다, 소라를 가져온다, 바쁘게 움직이며 반가운 정을 낸다. 나도 반갑게 응대한다. 내가 고등학교 근무할 때 제자였다고 한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의 장에 더벅머리 남학생 얼굴이 흑백사진으로 겹친다.

자기를 알아보는 것이 고마운지 싱글벙글하며 좋아한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의 묶음이 수북하게 쌓인 시간이 흘렀지만, 서로가 마냥 반갑고, 고맙다. 이런 것이 사제의 정이 아닐까. 가슴이 뿌듯하고 친구들 앞에서 어깨가 으쓱한다.

제자는 주먹을 잘 쓰는 농땡이 학생으로 나한테 매를 많이 맞았다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 수업 시간에는 잠만 자던 말썽꾸러기였다. 수업 분위기를 이끌기 위해 그 학생의 협조가 필요하기도 하여 특히 신경을 쓴 면도 있었다.

가며 오며 어깨를 툭툭 치며 관심을 보이기도 하고, 매를 들어서라도 수업에 참여시켰다. 자기를 학생으로 인정해 주고, 이끌어 주는 선생이었으니 수업 시간에 나름 열심이었고, 다른 학생들의 반항까지 막아주었던 학생이었다. 그 학생의 가슴 깊이 사제의 정이 쌓였음이 분명하였다.

내가 근무한 학교는 동해안에서 역사가 깊은 학교였다. 남녀 공학에 중고 병설의 제법 규모가 컸다.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어 학생들은 집의 바닷일을 거들며 자라다 보니 거친 학생들이 많았고,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지역이라 상급학교 진학하는 학생도 많은 편이었다.

나는 고3 국사와 고1 세계사 수업을 담당했다. 여선생이 고3 수업을 한 경우는 개교 이래 내가 처음이었다고 했다. 교무실에서 선생님들이 걱정스러워하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수업 중 절대로 웃지 말고, 무섭게 학생을 대하라는 등 여러 가지 충고가 줄을 이었다.

 

까짓것 하면 되지어금니를 깨물었다.

 

자연 쌀쌀맞게 경직된 얼굴로 수업하게 되었고 조금만 말썽을 부려도 아이들에게 매를 들었다. 물론 체벌이 좋은 교육 방법은 아니었다. 요즘 같으면 폭행 교사라고 고발이 들어갔을 것이다. 내가 훈육한 것이 사랑의 매로 알았을까. 솔직하게 나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기에는 자신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바닷바람에 훈련된 거친 남학생들을 그렇게 다루는 것은 참 위험한 방법이었다.

그때는 선생님인데라는 교권이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었다. 예비군 훈련을 받는 늙은 학생도 불평 한마디 없이 매를 잘 맞아 주었다. 요즈음 같았으면 폭력 교사라고 신고가 들어갔든지 아니면 학생들 스스로가 반발이 있었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수업에 열성적이었던 점이 학생들의 마음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았다. 진학을 꿈꾸는 학생들을 새벽 일찍 따로 불러내어 특별 수업을 해주는 등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다. 당시에는 복사기가 없어 촛농이 발린 프린트지를 철필로 직접 써서 등사기로 밀어 프린트했다.

손과 얼굴에 잉크 물을 묻힌 상태로 수업하는 처녀 선생이 눈여겨 보였던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초임으로 와서 열심히 지도하는 초년생 여선생님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자취하는 방 앞에는 수시로 신선도 높은 생선이 한 상자씩이나 놓여 있었다.

점차 사제師弟의 정이 조금씩 쌓여갔고, 교권도 지켜졌다. 동네 나가면 학부모들까지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나도 첫 제자들이다 보니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대하면서 열심히 가르친 덕분에 아이들이 좋은 평을 한 모양이었다.

주요 과목의 기초가 부족한 그들에게 암기과목으로 성적을 올리는 것이 핵심이었다. 그해 예비고사에서 내가 지도한 과목의 성적이 비교적 좋았다. 선배들의 한두 마디의 칭찬으로 그다음 해부터는 수월한 학교생활이 이어져 4년 의무 기간을 그 학교에서 마치고 결혼하면서 사표를 내고 왔다. 지금까지도 처음이자 마지막 그때의 제자들이 잊지 않고 스승의 날이면 연락해 온다. 물론 나도 그 시절 교직 생활을 아름다운 추억으로 귀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요즘 아이들은 하나, 둘밖에 없는 가정에서 귀하고 귀한 왕자요, 공주니 거슬리는 말도 함부로 못 한다. 선생님은 고사하고 부모가 한 대 때려도 경찰에 신고하는 실정이다. 이래저래 학부모나 학생으로부터 과도한 피해당한 교사가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삼십여 년 이상 근무한 학교에서 시대적 사건에 대하여 몇 마디 실수하였다고 학생들이 경찰에 고발하여 학교에서 파면당하였다. 그 억울함이 병이 되어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내는 지인도 있다.

더구나 몇몇 교사가 현장에서 학부모들의 시달림 때문에 가지 말아야 하는 길을 가는 안타까운 일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사태다 보니 교사들도 피켓을 높이 쳐들고 교권 보장을 요구하며 집회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보인다. 마음이 착잡하다. 허약해진 교권과 살벌한 교육 현장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쪽은 사랑으로 가르치고 한쪽은 믿음과 존경심을 가지고 배우는 사제간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바람직한 교육이 이루어질 것이다. 학생들도 좀 심한 아픔이 있더라도 교육에 필요해서 체벌이 이루어졌다고 선생님을 믿고 따르면 얼마나 좋을까.

매로 아프게 맞고도 불평 한마디 없이 사랑의 매로 여기는 그때의 제자들이 보고 싶다. 맛있는 것을 챙기느라 땀을 뻘뻘 흘리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초로의 주인 제자가 고맙다. 그때와 같은 사제의 정은 다시 올 수 없을까. (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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