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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포럼 43기

Re: 서산(書算), 삶을 새기는 망치질/금우동7-서산(書算)을 펼치며

작성자금우동|작성시간26.06.18|조회수0 목록 댓글 0

서산(書算)을 펼치며

 

금우동

 

  탕, . 쇠망치가 단단한 바윗돌을 때린다. 수십 번의 거듭되는 타격에도 바위는 미동조차 없다. 헛된 손짓처럼 보일 무렵, 쩍 하고 바위가 속살을 드러내며 갈라진다. 바위를 쪼갠 것은 마지막 한 방이 아니다. 앞서 지나간 아흔아홉 번의 내리침 때문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는 내 손에 글 망치 하나를 쥐어 주셨다. 서당 훈장이셨던 아버지의 무릎 앞에서 배운 첫 문구는 서산(書算)’이었다. 한지를 겹겹이 붙이고 촛농을 먹여 반질반질해진 그것은 단순한 책갈피가 아니었다. 글을 뼈에 새기게 하는 나만의 망치였다. 아버지는 서산의 눈대를 접었다 하며,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백번을 읽고 써라. 그러면 저절로 뜻이 열린다.

  그때는 몰랐다. 그 말이 왜 그렇게 중요한지, 왜 백 번이나 읽어야 하는지. 하지만 아버지는 단 한 번도 그 말을 거두지 않았다.

  매일 새벽,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아버지 앞에 앉았다. 서산대를 따라 한 글자씩 짚어 나갔다. 처음에는 글자의 모양만 눈에 들어왔다. 뜻은커녕 읽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글을 가르쳐주시지 않았다. 대신 서산의 눈 대를 접으며 반복하게 하셨다. 열 번, 스무 번, 서른 번. 글자가 입에 완전히 익어갈 때쯤, 눈대를 접고 펴던 손끝에서 둔탁한 바위가 쩍 갈라지듯 안목이 열리는 순간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그걸 문리가 트인다고 하셨다.

  "아무리 어려운 공부라도 백 번을 읽고 쓰면 깨닫게 된다."

  그때는 그 말이 너무나도 지겹게 들렸다. 서산의 눈 대를 접고 펼치는 것이 고역이었고, 반복되는 글귀가 따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공부의 본질임을 깨닫게 되었다.

  책 한 권을 다 배우고 나면, 마을 사람들과 함께 책거리 떡을 나누었다. 그것은 작은 축제였다. 속이 꽉 찬 송편은 배움의 결실을 의미했고, 속이 빈 바람떡은 아직 채워야 할 배움을 뜻했다. 나는 떡을 손에 쥐고,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눈빛은 언제나 단호하면서도 따뜻했다. 나는 그 시선을 받으며 스스로 다짐했다. 더 읽고, 더 쓰고, 더 배워야 한다고.

  아버지는 전쟁과 격변의 시기를 지나며, 빨치산 대원들에게서 총살을 당할 위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운 제자 중 한 명이 나서서 자신을 대신 처형하라고 말하며 아버지를 구해주었다. 그 제자의 결단 덕분에 아버지는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 사건은 우리 가족에게 커다란 교훈을 남겼다. 아버지는 평생 마음의 서산대를 접으며 그 제자의 이름을 되새겼다. 그때의 고마움은 마치 백 번을 읽고 쓰는 것처럼, 기억 속에 오랫동안 각인되었다.

  아버지는 시력 장애를 겪으면서도 서당 훈장으로, 처사 선비로의 삶을 사셨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보다는 향리에 남아 학문을 탐구하고 가난을 미덕으로 후학을 양성하는 선비 문화가 아버지의 도포 자락에 묻어있었다. 아버지는 그 길을 평생 걸어가셨다. 그러나 그 길이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언제까지 유효할 수 있을지를, 누구보다 깊이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내게 이렇게 말씀 하셨다.

  "너는 글공부를 열심히 하지 말고, 기술을 익혀라."

  그 말이 처음에는 아버지의 삶을 부정하는 듯해 의아했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그 뜻을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금융업과 재개발 정비사업에서, 또 염색과 도금 공장의 생산현장에서 나는 점점 더 아버지의 말을 곱씹게 되었다.

  “글공부로 쌓아 올린 학문이 세상을 살아가는 기술과 맞닿지 않으면, 현실 속에서 무력할 수밖에 없다.” 학문의 단단한 껍질이 현실이라는 메마른 땅과 맞닿지 않을 때, 글공부는 얼마나 무력한가. 기술을 익힌다는 것은 단순한 손기술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아는 것이며, 변화를 읽고 적응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임을 이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처사 선비로서의 길을 걸으셨지만, 그 길이 전부는 아님을 내게 전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세상은 내 다짐만큼 쉬운 곳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서산을 펼칠 때를 엿보고 있다. 세상을 은퇴하고 인생 2막을 살면서 공부에서도, 삶에서도, 백 번을 읽고 쓰는 인내를 견디지 못하고 쉽사리 포기해버릴 때가 많았다. 김득신은 독서를 일만 번 이상 하며 둔재에서 천하의 명문장가가 되었지만, 나는 과연 무엇을 남겼을까. 세상을 헤매며, 배움의 길에서 수없이 흔들린다.

  어느 날 문득, 나는 다시 서산을 만들었다. 아버지와 함께 앉아 서산을 접고 초를 먹이던 그때처럼. 손끝에 닿는 그 감촉이 생생하다. 이제 아버지는 곁에 없다. 서산을 손에 쥐고, 아버지의 음성을 떠올린다.

  "백 번을 읽고 써라. 그러면 저절로 문이 열린다."

  나는 다시 서산의 눈 대를 접고 펼친다. 이제야 아버지의 말씀이 온전히 마음에 스며든다. 비로소, 나는 삶을 새기는 인생 후반기의 망치질을 시작한다.

 

 

 

{20255월 한국수필 등단작}내용을 일부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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