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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포럼 43기

43기-16차시 종강 자료 (6월 24일 수)

작성자홍억선|작성시간26.06.21|조회수71 목록 댓글 0

 

ESSAY IS MY LIFE

대구에세이포럼

43-16차시 종강

 

 일시 : 2026 6 24() 6

장소 : 한국수필문학관 2층 강의실

 

 

 

작품 목록 

순서제 목작 가편수합평 담당
1아버지의 산김경선5  
2일시 멈춤김동식6  
3빌지윤시오5  
4한날한시에우남희4  
5        
6        

합평 담당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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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옥 금우동 김경선 김동식 김 봄 김성문 김영희 김정실 김태선

김현지 서영숙 성경아 오태숙 옥경자 우남희 윤시오 이미란 이은경 황무선

 

 

 

 

 

 

 

1. 아버지의 산 김경선5

 

 

 

1) 아버지의 산이 도시개발구역으로 지정되었다는 공문을 받았다가족의 삶과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 사라진다고 생각하니 섭섭하고 허전한 마음이 불쑥거린다.

2) 형제들과 선산을  찾았다겨울을 넘긴 아버지의 유택은 연한 초록이 물들어 있다추위를 견뎌낸 잔디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부드러운 실바람이 살랑거린다좌판 옆에는 봄 냄새를 맡은 성급한 풀포기가 하늘을 향하고 있다새로운 생명은 아버지의 지난 시간과 우리들의 행복했던 기억을 서로 교차시켰다.

3) 아버지는 맨주먹으로 고향을 떠나 자수성가하셨다돈을 모아 작은 야산과 밭뙈기를 마련했다타향살이는 거리가 멀어 산을 관리하기가 어려웠다아버지는 믿을 만한 이웃에게 산과 밭을 맡겼다어느 날, 믿었던 갓지기는 십 년 만에 한 번씩 시행하는 특별 조치법을 이용하여 산과 밭 명의를 본인 것으로 바꾸었다그것도 두 번이나여차하면 산을 잃을 뻔했다한 번은 용서했으나 두 번째는 그만두게 하고 먼 거리를 오가며 직접 관리했다.

4) 아버지의 산에는 많은 정성과 노력이 들어갔다나라에서 경제부흥을 일으키기 위한 수단으로 나무 심기가 한창일 때소나무 150그루를 심어 자연 보호에 동참했다나무는 시간이 흐를수록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 산을 특별한 공간으로 만들었다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아버지의 나무 그늘에서 놀다 오곤 했다그때의 웃음소리는 이제 들려오지 않지만그 소나무들은 가족과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고 있으리라.

5) 선산은 선조들이 잠들어 있는 곳이 아니던가후손들이 그 자리에 묻히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아버지는 자연의 순환에 대하여 남다른 생각을 했다죽어서는 자연의 일부로 돌아가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매장으로 인해 국토가 훼손되는 것을 안타까워했다.

6) 아버지는 국가에서 장려하는 화장 문화를 남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실천했다부모를 화장하여 봉분을 만들지 않고 유골을 선산에 뿌렸다아내가 세상을 뜨자 역시 화장했다나는 엄마의 흔적이 없어지는 것이 못내 슬펐다화장은 하되 뼛가루를 묻어 달라고 애원했다아버지는 봉분을 만들어 어린 막내의 원을 들어주셨다아버지의 산에 오르면 부모님의 영혼을 느낄 수 있어 포근한 기운이 느껴진다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알콩달콩 살았던 추억이 바람을 타고 가슴에 스며들었다.

7) 새마을 사업이 한창이던 시절아버지는 밭과 산 경계에 있던 땅 일부를 농로로 국가에 헌납했다그뿐만 아니라관혼상제 등 동네 사람들의 생활 의식에 대해서도 자문해 주었다집안에 혼사가 생기면 사성을 쓰기 위해 동네 사람이 툇마루에 앉아 기다리기도 했다아버지는 바쁜 일을 멈추고 대가 없이 정성껏 글을 써 주었다아버지의 가르침은 지금도 내 삶의 중심이 되어 올곧게 살아가는 방향키가 된다남이 꺼리는 궂은일에 앞장서는 것을 마다치 않는 나의 성정이 아버지를 닮아서일까생전에 베풀었던 아버지의 교육열과 정신을 되새기면서 존경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생기는 것은 덤으로 얻게 되는 선물이다.

8) 아버지의 산이 없어진다면 선산에 잠든 영혼은 어디로 갈까순간모든 것이 자연의 순환이라던 아버지 말씀이 떠올랐다개발이란 이름으로 물리적인 형체는 사라지더라도 자손들이 느꼈던 사랑의 기억은 오래도록 붙들어 두고 싶다모두가 기대고오르고 싶은 산이었으니까사람과 자연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이어지리라.

9) 산에 오면 언니오빠는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간이 가는 줄을 모른다아버지는 산이고산이 아버지였는데···. 어찌할까애틋한 마음이 드는지 언니가 봉분을 쓰다듬으며 아버지와 담소를 나누었다정성을 담아 큰절을 두 번 올렸다아버지의 산이 허물어지기 전에 다시 찾아오리라눈에 담고 가슴에 새기려고 자꾸 뒤돌아보았다나뭇가지 사이로 실려 온 솔향기가 코끝을 스친다숨을 깊이 들이켜면서 산을 품에 안고 내려왔다.

 

 

 

2. 일시 멈춤/김동식 6

 

 

 

1. 골프공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날아간다힘을 빼고 스윙한 결과이다내가 공을 친 건지 공이 그냥 나르는지 구분 없을 때도 있다골프 동작에서 일시 멈춤과 여유가 요구되듯 그런 마음 여유가 필요하다.

2. 골프 스윙은 리듬감 있는 동작 도중에 쉼이 필요하다자동차가 울컥거리거나 급격한 동작에서 짧은 순간이나마 시간지연이 필요한 것과 같다시간과 공간의 틈새인 유격(裕隔)이라는 틈이 있어야 사용할 에너지를 순간에 집중시킬 수 있다우리가 살아가는데도 숨 돌리는 여유를 가져야 숨통이 막히지 않는 것과 같으리다.

3. 며칠 전 대구에서 시내버스가 급정거하여 몸이 구르는 사고가 있었다운전석과 출입구 사이에 있는 패널에 목허리가 부딪쳤다통증을 느끼면서도 며칠 후에 있는 골프 약속이 떠올랐다동기들과 칠순 여행을 겸한 라운딩이 일본에서 예정되어 있었다여행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병원을 전전하며 치료하였다큰 사고가 아니어서 다행이었다욕심내지 않고 살살 스윙하면서 걷는다는 생각으로 여행에 참여했다.

4. 30대 중반에 시작한 골프가 어느덧 30여 년 세월이 흘렀다처음에 별 재미가 없었고 손목허리등에 담을 달고 살았다목이 부자연스럽고 허리가 엉거주춤한 자세는 일상생활이나 운전에 어려움이 있었다.

5. 처음 골프를 배울 때는 골프붐이 일어나기 전이었다연습장과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았다정식으로 배우지 않아 힘에 의존하였고영상자료도 없어 잘못된 습관에 허우적거렸다인근에 있는 군부대 골프장에서 친구사회 지인직장 동료와 새벽에 운동한 후 출근하였다영일만 바다를 보면서 친 흰공(白球)이 붉은 아침을 밝혔다직장과 사회생활에서 증폭되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안으로 안성맞춤이었다.

6. 골프는 나이에 상관없이 푸른 잔디에서 어울릴 수 있다. 3대가 같이 할 수 있는 운동이며어느 선배는 이제까지 배운 취미로는 최고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흰 공에서 노랑 빨강 초록의 다양한 색깔의 공이 출시되어 사람 직업과 성향만큼 다양해졌다.

7. 정지된 골프공을 치는데 왜 칠 때마다 다를까힘 빼고 호흡조절하고 물 흐르듯 스윙하여 바람을 갈라본다내가 습득한 테이크 백과 팔로워까지 구분 동작을 머리에 그려본다호흡조절로 어깨에 쉼을 더 강조하며적절한 다리의 유격으로 힘을 이용할 수 있다하지만 실제 스윙할 때는 방금 생각하던 동작 순서는 없어진다고개 들지 말고 공을 응시해야 할 눈은 멀리 앞서 내달리면서 어깨는 앞으로 엎는다스윙하고 땅에 침 뱉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배우지만 머리를 드니 떠가는 공에 침 뱉는 격이다.

8. 우리 인체의 관절은 여유와 유격이 필요하다인체 무릎 연골척추 물렁뼈손발 마디 등이 동작할 때 쉼이 요구된다부재(部材간 틈이 너무 크면 정확한 동작이 어렵고여유가 없으면 마찰로 닳아 움직임이 어렵다힘이 바싹 들어간 어깨는 경직되어 타이밍을 놓치는 사례는 골프에만 있을까뒤땅을 치거나 미스샷으로 공이 엉뚱한 방향으로 굴러간다젊고 힘 좋아 하체 튼튼할 때는 스윙 궤도가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몇 홀 지나고 나면 견고한 하체 유지는 어디로 가버리고 다리도 풀린다머리까지 들면 그날 라운딩은 엉망진창이 된다세월이 예전과는 다름을 가장 빨리 알려준다.

9. 골프는 자신과의 동행이면서 홀과는 경쟁이다정신 집중을 한다고 해도 스윙 자세는 바뀌고 타수는 오르락내리락한다몸의 긴장을 완화하고 멘탈을 조절하여 스윙 유격이 일정하게 한다항상 원하는 바대로 되지는 않듯이 가정사회직장에서 오는 트러블도 적절히 조절하려는 미세 조정 능력이 필요하다.

10. 자신 있게 티 박스에서 단숨에 깃대에 붙일 기세다벗어나는 공을 보면서 애꿏게 클럽으로 땅을 때린다그린 중앙을 보고 무상 무념 샷을 하지 않은 자신에 대한 아쉬움이다페어웨이 경계를 벗어났다고 생각한 공이 나무나 말뚝을 맞고 안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살아있네 !”말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요단강 건넜다가 돌아온 기분이다과도한 욕심은 실수로 귀결되는 순간을 자주 접한다.

11. 드라이브는 움츠리지 말고 유연하게 양팔을 뻗어야 한다몸통 회전할 때 다리 리딩과 허리 동작이 하강 타이밍과 적절해야 한다그 사이를 참지 못하고 머리 들면머리 박고!’핀잔 듣는다러프에서 철퍼덕거리거나 공 머리를 찍는 경우머리 들지 말고 어깨 위로 든 클럽에 숨 쉬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자동차에 깜박거리는 구간이 필요하고 브레이크 유격이 필요하듯살아가는 데도 숨돌림과 유격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12. 머리 복잡게 생각하며 정석대로 스윙한다고 하지만 공염불이다체중이동이 적절치 않으면 뒤 땅 앞 땅을 판다살짝 찍으려는 공 머리를 세게 때리기도 한다그린에서 거리를 이리 재고 저리 재 보기도 하고왔다 갔다 해도 굽은 정도는 판단이 어렵다퍼팅 실패하고 나면 그린 상태가 보이고 굽은 라이가 눈에 들어온다왜 그 시점에는 안보일까살아오면서 그때 못 본 오류가 시간 지나 눈에 들어오면 그때가 후회되는 일상과 흡사하다.

13. 울고 웃는 인생사와 같은 18개 홀에서 나는 지금 몇 번째 홀을 돌고 있을까후반전 시작이나 중간쯤에 있을 것 같다경기 후 조촐한 식사는 인간관계를 돈독하게 한다깔끔한 물회나 꽥꽥 고함 대신 묵언하는 날은 돼지 목살로 목을 푼다아직 동료들과 소확행을 나눌 수 있는 취미가 남아있어서 고맙다.

14. 오늘도 집안일에 마음이 급한 샷이 나와 버렸다한 타에 넣을 욕심을 접고 그린 중간을 공략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렸다너무 앞만 세우지 말고 ‘중간치라도 해라는 부모님 말씀이 그린 공략에 적용될 줄이야스윙에서 쉼 여백이 필요하듯 단숨에 이루려는 과욕은 삼가고 무리가 없어야 하는 걸 느낀다바람에 나부끼는 빈 가지 사이로 새싹의 초록빛이 돋아난다쉼이 있는 신중한 샷그를 바탕으로 한 인생 샷이 더욱 필요하다.

 

 

3. 빌지 /윤시오5

 

 

1. 종중 제례를 앞두고 지난해 빌지를 펼쳐 들었다누렇게 바랜 종이 위에 눌러쓴 글씨들이 촘촘하다쇠고기 몇 근조기 몇 마리배와 사과창호지 한 묶음까지한 줄 한 줄이 그날의 장터를 불러낸다비린내와 과일 향이 섞이고흥정하던 목소리와 웃음이 종이 위에서 다시 살아난다빌지는 물건값을 적은 종이이지만지나간 세월의 온기를 눌러 담은 기록이었다.

2. 그 속에는 빠진 것이 없다무엇을 샀고얼마나 썼고누구에게 값을 치렀는지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다매년 소 한 마리를 잡았으니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았을 터이다그러나 빌지는 돈의 크기를 말하기보다정성을 얼마나 들였는지를 말해준다또박또박 눌러쓴 글씨 끝마다 사람의 손때와 숨결이 배어 있다.

3. 제삿날 장에서는 값을 깎지 않는 풍습이 있었다부르는 대로 값을 치르던 그 넉넉함 속에때로는 슬그머니 얹힌 바가지도 있었을 것이다그럼에도 사람들은 그 장터를 탓하지 않았다음식점에서 계산서를 내밀며 “이건 서비스입니다” 하고 음료 값을 빼주던 주인의 말처럼삶은 늘 우수리를 얹어 인정을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4. 한참 동안 빌지를 들여다보다가 문득 생각났다사람의 몸에도 이런 빌지가 있지 않을까눈에 보이지 않을 뿐우리는 매일 몸을 움직이며 살아간다시간과 체력젊음과 열정그리고 마음까지도그것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내몸 구석구석에 낱낱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5. 요즘 들어 그 기록이 자꾸 몸으로 읽힌다텃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허리가 먼저 앉으라 한다계단을 오르면 무릎이 낮게 울고잠은 얕아져 새벽마다 뒤척인다한때는 하룻밤이면 씻겨 나가던 피로가 이제는 며칠을 머문다병원을 들락이면서 에서 건네받은 검진 결과표는 말없이 수치로 경고하며지나온 세월을 침묵으로 전해준다.

6. 건강 검진 결과표는 내 몸이 내미는 빌지였다얼마를 썼는지얼마나 무리했는지얄팍한 종이속에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무리하게 달렸던 날들멈추지 못했던 욕심절규하는 몸의 신호를 애써 외면하며 지나온 시간들이 빠짐없이 적혀 있다단 한 줄도 비워두지 않고.

7. 돌이켜보면 젊은 날의 나는 늘 서둘렀다지금 아니면 늦는다는 생각에 항상 자신을 재촉했다조금 더 가려 했고조금 더 얻으려 했으며조금 더 앞서야 한다고 믿었다허리가 뻐근하면 파스로 눌렀고피로는 커피로 덮었다그렇게 하루하루를 외상처럼 쓰며 살아왔다.

8. 그러나 삶은 외상이 아니었다순간순간이 모두 현찰이었다언젠가는 반드시 값을 치러야 하는한 번도 틀린적 없이 계산하는 정직한 장사였다잊고 지내던 빚이 한꺼번에 떠오르듯이제와서 내 몸이 그간의 빌지를 내밀며 계산을 요구한다이제는 더 미룰 수 없다고.

9. 마음이 막힌다지나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고그때의 선택도 다시 할 수 없다후회는 늘 늦게 온다지만이렇게 또렷하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이제는 숫자 대신 통증으로글씨 대신 불편함으로 삶은 나에게 그 값을 정확히 적어 내민다.

 10. 어느 부분도 부인할 수 없다그 모든 것이 내가 살아온 흔적이 아닌가무리하게 달린 덕분에 얻은 것들이 있었고포기하지 않았기에 지켜낸 것들도 있었다빌지는 나를 꾸짖는 종이가 아니라내가 여기까지 걸어왔음을 증명하는 진지한 기록이다.

11. 문득 백수를 넘긴 김형석 교수의 말이 떠오른다사람은 어느 날 갑자기 늙는 것이 아니라 살아온 날들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모습을 만든다고 했다거울 속 얼굴도몸의 건강도 세월이 적어 내려간 기록이다그는 알츠하이머 또한 하루아침에 찾아오는 병이 아니라 오랜 습관이 쌓여 드러난 결과라고 말했다임종의 순간까지 맑은 정신으로 가족과 인사를 나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은 채 생을 마치는 사람도 있다결국 인생의 차이는 뛰어난 재능보다 작은 습관에 있다는 그의 말이 빌지를 들여다보던 내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12. 내 곁에서도 많은 이들이 먼저 떠나갔다술을 즐기던 선배는 간질환으로 세상을 등졌고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하던 친구는 폐질환으로 생을 마쳤다육십 대에 알츠하이머가 찾아와 가족의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한 채 요양원에서 눈을 감은 벗도 있었다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삶은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몸은 침묵하는 듯하지만우리가 치러야 할 값을 한 줄도 빠뜨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었다.

13. 이제는 새로운 빌지를 써야 한다무엇을 더하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빠른 걸음보다 고른 걸음을욕심보다 평온을 선택하려 한다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를 귀찮은 잔소리로 넘기지 않고하루의 피로와 마음의 무게도 세심히 살피려 한다남은 삶의 기록만큼은 조금 더 단정하고 따뜻하게 채우고 싶다.

14. 그렇게 생각하니 오래전 장터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계산서를 내밀던 주인이 슬며시 한 줄을 지우며 웃던 모습이다.

이건 서비스입니다.”

15. 나도 내 삶에 그런 여백 하나쯤 남겨두고 싶다스스로에게 너무 엄격한 값을 매기지 않고실수와 부족함을 조금은 덜어주며 살아가는 일때로는 쉬어가고때로는 용서하며때로는 욕심을 내려놓는 일그 작은 너그러움이 남은 날들을 더 따뜻하게 밝혀줄 것이다.

16. 삶의 빌지는 찢어버릴 수 없다이미 적힌 것은 지워지지 않는다그러나 아직 비어 있는 줄들은 남아 있다무엇을 적어 넣을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오늘도 몸이 내미는 빌지를 받아들고 스스로 다짐해본다남은 칸에는 후회보다 감사가통증보다 평온이욕심보다 사랑이 더 많이 기록되기를.

 

 

 

 

4. 한날한시에 / 우남희4

 

 

 

1) 제삿밥을 먹는다. 나물을 넣고 비빈 커다란 양푼을 가운데 놓고 여섯 명이 먹는다. 여섯 명이 앉기엔 비좁은 평상이지만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며 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2) 앞집 민아 형님은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씨라 귀찮을 법도 하련만 제삿밥을 비벼 골목 네거리에 있는 평상으로 가져왔다. 말이 제삿밥이지 산채비빔밥과 다름없다. 형님은 알다시피 바쁜 철이 지나고 조금 한가해 나물을 넉넉하게 했다. 맛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누어 먹고 싶어서라고 말끝을 흐린다.

3) 먹더라도 누구 제사인지 알고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니 시할아버지 제사라고 하더니 이내 조상들을 한날한시에 모신 날이라고 했다. 시할머니 두 분에 시부모님, 설과 추석 명절까지 7번 지내왔는데 코로나 때부터 시할아버지 제삿날에 한목 지낸다고 했다.

4) 우리 마을의 주요 농산물은 수박이다. 11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는 부지깽이 일손도 빌려야 할 만큼 바쁜 농사철이다. 농사를 짓지 않는 나도 얼마나 바쁜지 잘 안다. 그런데 그 시기에 시할머니 두 분과 시부모 제사에 설 명절까지 있어 부담스러웠다고 한다.

5) 누군가는 말한다. 제사는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지내더라도 정성을 다하면 된다고. 간소하게 차리고 정성을 다했다고 하면 믿을까. 물론 믿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사 음식을 먹든 안 먹든 나부터도 차려진 상을 보고 정성이 있고 없고를 판단한다. 그러니 말이 간단하게 하라고 하지만 며느리로서는 그렇게 할 수 없는 형편이다.

6) 나는 둘째 아들인 아버님의 맏며느리다. 장남인 큰아버님 슬하에 시숙이 세 명이나 있다. 그들이 지내야 할 할아버지와 할머니 제사를 어머님이 지냈고, 며느리인 내가 물려받아 30년 이상을 지내고 있다. 명절까지 다섯 번의 제사에서 어머님의 제사까지 더해 일 년에 여섯 번을 지낸다. 설 명절은 조상들에게 새해가 되었다고 알리는 문안 인사이고, 추석은 농사를 잘 지었다고 감사드리는 추수감사절의 의미가 있다. 다과를 차려도 되지만 옛날부터 제사상과 똑같이 음식을 차렸으니 차례를 지내는 게 아니라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7) 어머님은 살아계셨을 때 할아버지 할머니를 한날한시에 모시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그때마다 남편은 했다. 장 보고 음식 만들고 상 차리고 뒷정리까지 하는 사람이 나인데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고 차려진 상에 절만 하는 절맨인 사람이 라고 하니 서운했다.

8) 어머님이 돌아가신 뒤 열 번째의 추석을 맞은 2년 전, 큰아이가 선언했다. 제사를 지내지 않을 테니 알아서 정리하라고. 장손이 안 받겠다는데 무슨 수로 물려준단 말인가. 나도 물려줄 생각은 없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한날한시에 모시라고 할 때도 한 남편이었는데 아들이 안 받겠다니 생각이 복잡해진 것 같았다. 말수가 적은 남편이 더 말이 없었다.

9) 내 목소리를 낼 때가 되었다. 우리 세대까지만 지내고 나머지는 결정되는 대로 따르겠으니 각자의 생각을 말해보라고 했다. 시동생은 아버님 제사에 맞춰 한날한시에 모시자고 하고, 동서는 우리 세대까지만 지낼 거면 바꾸지 말고 지내오던 것처럼 그대로 다 지내자고 했다. 부부라도 생각이 같을 수는 없다. 남편은 두 사람 중 누구의 손을 들어줄까 궁금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어머님도 뵌 적 없다니까 당연히 아닐 테고, 아버님 또한 남편이 초등학생 때 돌아가셨으니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같이 산 날이 가장 많은 어머님 제삿날이 아닐까 추측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남편이 단답식으로 짧게 말했다. 명절. 명절이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이 거기에까지 미치지 못했음을 알았다. 왜 명절을 택했는지를.

10) 시동생은 2시간 거리의 경남 지역에 산다. 아버님 제사나 어머님 제사가 있는 날이면 퇴근하고 저 혼자 밤길을 달려온다. 남편은 지금까지 운전 조심하고 다음에 보자라든가 그냥 잘 가라는 다정한 말 한마디 한 적 없다. 비단 시동생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러나 그는 밤길을 운전하는 동생을 걱정하고 있었다. 또 두 가족 모두 한자리에 모인 적이 자주 없어 명절 때만큼은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또한 있었다. 남편의 선택은 당연했다. 시동생과 동서는 남편이 왜 명절을 택했는지 그 속 깊은 마음을 알까.

11) 아버님 제사는 섣달이다. 아버님 제사까지만 지내고 새해부터 정해진 대로 하기로 했다. 이 사실을 형제들과 함께하는 단체 톡에 올리니 막내 시누이가 먼저 댓글을 올렸다. 명절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누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못을 박는단 말인가. 정답은 없다. 단체 톡에 올린 건 알고 있으라고 일방적으로 통보를 했을 뿐이지 의견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의 생각을 구구절절 말할 필요도 없었다. 서운해서 그런다는 걸 알지만 시누이들은 친정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발언권이 없는 출가외인이었다.

12) 남편이 내린 결정으로 결국, 모든 제사를 없애고 한날한시인 명절에 지내고 있다. 어머님 기일 때 가까이 사는 막내 시누이와 삼촌에게 잘 지내느냐고 안부 전화했다. 삼촌도 남편처럼 무뚝뚝해 자분자분 말을 하지 않지만 어머님 기일이라 전화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은데,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서운해하던 시누이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언니야, 전화한 그 날이 엄마 제삿날이었지, 그래서 생각나 전화한 거지? 나도 깜빡했다.” 한다.

13) 시대가 바뀌면서 제례 문화도 바뀌고 있다. 시대의 변화를 무슨 수로 거스른다는 말인가. 민아 형님네나 우리처럼 조상들을 한날한시에 모시기도 하고, 산소에 가는 것으로 대신하기도 하고, 종교단체에 이름을 올리는 가정도 있다. 전통이라고 반드시 지켜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점차 사라지고 있으니 서운하기는 하다.

14) 어느새 양푼에 담은 비빔밥이 바닥을 보인다. 배가 불러도 디저트인 수박에 손이 간다. 형님이 땀으로 키운 수박의 붉은빛이 먹기도 전에 온몸으로 퍼진다. 내 안에 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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