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가을 사이/ 박희자 6
1. 공원 벤치에 앉았다; 푸르름으로 더위를 식혀주던 나무가 어느새 단풍으로 물들고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에 속절없이 염록소를 빼앗겼다. 빛바랜 나무를 보는데 한 여인의 모습이 겹친다.
2. 잠결에 인터폰 소리에 눈을 떴다. 시계가 새벽 3시를 알리고 있었다. 한밤중에 무슨 일일까 놀라 옷을 걸치고 거실로 나왔다. 긴장하며 인터폰에 귀기울였지만 더는 울리지 않았다.
3. 1층인 우리 집 문은 엘리베이터와 나란히 있다. 누군가 잘못 눌렀거나 아니면 잠결에 내가 잘못 들었거니 생각했다. 찝찝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는데 다시 벨이 울렸다.
4. 두려운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누구세요. 무슨 일이세요?' 물으려다 입을 닫았다. 말이 필요 없었다. 60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잠옷 차림으로 영혼 없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
5. 기억을 잃은 사람을 처음 마주했다. 더구나 한밤중이라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뒤늦게 잠든 남편을 깨워야 하나 관리실로 연락을 해야하나 멈칫하는 사이 여자의 모습이 화면에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서 사라지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 잠자리에 누웠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기억을 잃은 사람이 집을 잃고 헤매고 있다. 절박한 사람을 한밤중의 소란함이 싫어서 외면했다. 마음이 무거웠다. 누군가가 그녀를 도와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7. 잠 못 들고 뒤척이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1층이 아닌 2층쯤 거리에서 나는 소리였다. 온몸이 긴장되었다. 시간 차를 두고 들려오는 소리로 미루어 볼 때, 이집 저집 벨을 누르는 듯했다. 누군가가 문을 열어 도움의 손길이 닿기를 바랐지만 내가 그랬듯이 도와주지 않는 듯했다.
8.‘어쩌면 저 모습이 내 모습일 수 있다는 하는 생각을 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더는 부끄럽지 않으려 문을 박차고 나왔다. 벨 소리의 짐작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출입문 밖으로 나섰다.
9. 초가을의 날씨가 닫힌 사람들의 마음만큼이나 차가웠다. 허술한 잠옷 차림의 여자가 염려되었다. 도움이 간절했던 사람을 외면한 것이 짐이되어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녔으나 보이지 않았다. 차도에서도 여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10 이제 갈 만한 곳은 지하 주차장이었다. 엘리베이터 승강기가 16층에 있었다. 기다리지 못하고 지하 주차장으로 계단을 타고 뛰어 내려갔다. 다행히 그곳에서 여자와 마주쳤다. 나를 보더니 반색하며 말했다.
"실례하겠습니다. 지하 2층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11. 손을 공손히 모으며 정중한 말씨에 놀랐다. 비록 늘어진 잠옷 차림이었으나 얼굴에서 뭔가 모를 기품이 느껴졌다. 기억의 세포들이 퇴색되어 푸른 빛을 잃었으나 그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는 교양이 뵈어 있었다.젊은 날,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던 한때의 모습이 그랬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여기는 지하 1층 밖에 없는데요. 2층이 없어요. 그런데 지하 2층은 왜 가려 하나요?“
나 역시 정중히 말했다.
"지하 2층에 우리 집이 있어요."
12. 어디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서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찾는데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젊은 남자가 뛰어내렸다.
" 아! 장모님! 여기 계셨군요. 얼마나 찾아 다녔는지요."
남자가 연신 고개를 꾸벅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여자를 보았다. 입을 굳게 닫은 여자의 목소리를 더는 들지 못했다. 여자의 기억이 길을 잃었어도 젊은 날 몸에 봰 자세가 그녀 인생의 푸르렀던 여름의 한때를 이야기 해 주었다.
13. 점점 가을로 물들고 있는 나뭇잎에 아직 녹색이 띄엄띄엄 남아 있다. 여름의 끝을 놓지 못하고 있는 나무처럼 그날 밤, 긴 여운을 남긴 여인의 인생이 다시금 처연하게 느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