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영상 수필

영상 수필/ 스님의 신발/ 신금철

작성자유동진|작성시간21.04.11|조회수175 목록 댓글 10

  개심사 뜰, 소담스러운 연분홍 눈꽃 송이를 매단 가지초리가 힘겹다. 고단한 삶에 굽은 노인의 등처럼 휘어진 가지가 애처롭다. 등이 휘도록 찬바람을 견디고 인내로 환한 꽃을 피워 올린 매화 송이를 바라보니 마음까지 환해지는 느낌이다.

  소곳소곳 고개 숙인 왕벚꽃 아래 자갈자갈 웃음꽃을 피운 다정한 몸짓들이 분주하다. 얼마 만인가? 코로나라는 불청객 때문에 온 세상이 뿌연 안개 속을 헤매느라 봄이 손짓을 하는데도 선뜻 찾아오지 못했다. 겨우겨우 걷히는 안개를 뚫고 모처럼 봄을 찾은 대웅전 뜰 안에 행복한 웃음들이 활짝 피어난다.

  대웅전 요사채 뜰엔, 내 어머니처럼 넉넉한 품으로 피어난 목련이 자비롭다. 반듯한 문살이 판화처럼 걸려있는 툇마루 앞, 목련을 배경으로 넉넉한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앉았다. 서너 달, 나들이의 유혹을 짓누르며 살다 해방된 마음이 날개를 달고 훨훨 난다. 조롱조롱 매달린 소원등所願燈도 들뜬 마음처럼 행복해 보인다. 원하는 것은 다 이루어질 것 같은 마음에 소박한 소원 하나 매달며 등을 단 사람들의 바람이 다 함께 이루어지길 빈다.

  인파 속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꽃들을 배경으로 주인공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몸짓이 꽃물결을 가르듯 날렵하다. 나 또한 주연이 되고 싶은 마음에 불쑥 나타나는 조연들을 향해 보이지 않는 눈총을 보내며 인색하던 웃음을 불러낸다. 사진 속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착각이 나이를 잊고, 염치없는 사람으로 몰아넣을 때가 있다. 많이 남지 않는 세월의 조급함 때문이리라.

  회색빛 가사 장삼을 입은 스님이 사진을 찍기 위해 어색한 몸동작을 놀리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신다. 조금 전까지 들떠있던 마음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을 잃는다. 흐드러지게 핀 청매화 가지를 부여잡고 포즈를 취하는 내 또래 여인의 웃음이 허허롭다. 나는 무엇을 남기려 어색한 몸짓을 연출하는 것일까? 사람들 사이를 헤집으며 주인공이 되고 싶던 마음에 볼을 붉히며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을 찾았다.

  스님의 눈에 비치는 중생들의 행위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나는 짐짓 사진 찍기를 멈추고 스님을 향해 합장한다. 스님의 발에 시선이 멈춰진다. 계절을 모르는 낡은 검정 털신이 태연하게 스님의 발길을 따라나섰다. 오만하던 내 마음이 돌부리에 걸려 고꾸라진다. 남편의 만류에도 고집을 부리고 멋을 차리느라 신었던 빨간 구두가 부끄럽다고 슬며시 꽁무니를 뺀다. 일찍 찾아온 봄 날씨에 송골송골 땀이 맺히고, 하늘하늘 화려한 옷차림으로 멋을 부리고 꽃놀이를 즐기는데 털신을 신으셨다니….

  계절과 이목에 무관심하고 패션 감각이 뒤떨어진 스님의 낡은 털신은 신발 이상의 의미로 나를 잡아끌었다. 세상과의 인연을 뒤로하고 탈속한 스님에겐 오직 도를 깨닫고 수행하며 중생과 나라의 평안을 위해서 희생의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계절 따라 유행 따라 어울리는 의복도, 육을 살찌우는 산해진미도, 세속의 유혹을 끊고 절제하는 삶이 배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스님의 얼굴은 복잡한 세상을 모르는 아기처럼 평온해 보인다. 삶이 부끄럽지 않거늘 계절을 잃은 털신이 부끄러울 리 없으실 게다.

  개심사 지붕 밑에 매달려 가끔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가 허영으로 들떠있던 내 마음에 회초리를 든다. 꽃 속에 묻힌 사람들의 고운 신발들이 자꾸 시선을 끌어 심기가 불편하다. 스님의 신발이 온종일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내 신발 위에 겹쳐진다.

  신발장을 열고 보니 햇빛을 자주 보지 못해 창백한 신발들이 뽀얗게 먼지를 덮고 울상을 짓고 있다. 계절 따라 날씨 따라 수북이 사다 놓은 신발들이다. 내 허영과 욕심을 채우기 위해 신발장에 갇혀있는 신발들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신발의 본질이 무엇인가, 신발을 신어야 하는 이유를 생각한다. 신발은 반짝이는 빛깔과 세련된 모양의 겉치레가 아니라, 발을 보호하고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이 우선이요,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앞장서는 인도자이다. 아무리 예쁘고 멋진 신발도 편하지 않다면 신발의 가치를 잃은 것이요, 고급 신발을 신고 바른 행동을 하지 못한다면 바른길을 걷는 이들의 짚신보다도 못하지 않겠는가? 그동안 내가 신었던 신발들은 내가 걸어온 길을 잘 알고 있다. 신발장 가득 들어있는 신발 중에서 바른길로 인도해준 신발은 몇 켤레나 될까?

  어찌 신발 욕심뿐이랴. 나보다 더 가진 자들이 부러웠고, 나보다 높이 있는 자들을 시샘했으며, 욕심의 그릇이 채워지지 않아 분노에 찬 날도 많았다. 요란한 포장으로 나를 드러내며 겉치레로 살아온 날들을 세어본다. 스님의 털신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어떻게 사는 삶이 가치 있는 삶일까? 속을 다 비우면서도 하늘을 향해 떳떳하게 자라는 푸른 대나무처럼 욕심을 버리리라.

  수행의 길을 걷고 있는 스님의 털신이 수많은 인파를 유혹하는 개심사 뜰의 왕벚꽃보다 더 짙은 잔영으로 남는 하루였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유동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4.11 고맙습니다. 선생님도 낭독 연습해보심이 어떨지요?
  • 답댓글 작성자김정옥 | 작성시간 21.04.12 유동진 목소리가 텁텁하고 쉬지근해서 낭독을 하면 잘 될까요? ㅎ
  • 답댓글 작성자유동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4.16 김정옥 네, 선생님 꺼꾸리 낭독 아주 좋습니다. 영상 준비 중입니다.
  • 작성자신금철(수산나) | 작성시간 21.04.12 유동진 선생님
    감사합니다.
    만드시느라 무척 고생하셨겠습니다.
    빈약한 몸에 고운 옷을 입히니 달리 보이네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유동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4.16 에고, 글이 아름다우니까요. 영상은 글을 돋보이게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감사드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