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 광장
조정순
또 왔다. 얼마 전에 왔다가 너무 아파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오늘 또 왔다. 무덤 속에 갇힌 내 소중한 시간을 찾아온 것이다. 산은 여전히 짙푸른데 내 젊은 시절 그곳은 아니다. 어느 시인은 소나무 한 그루 베어 없어진 것을 보고도 아파했는데 여기는 사람의 편리함이 내 추억을 송두리째 묻어버린 것이다. 진달래꽃이 흐드러지게 피고 다람쥐가 놀라 도망치던 그 골짜기 위에 시멘트 지붕을 덮고 아래는 대형 강당을 만들었다. 성당 마당에서 성모 광장까지 전체가 시멘트 포장이 되어있어 넓은 광장은 성지를 찾는 많은 사람이 사용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이 편리함이 내겐 아픔이 된 것이다.
콘크리트 지붕 위에 서서 회색 무덤 속에 갇힌 내 기억과 추억을 찾아 두리번거린다.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던 산기슭은 저 아래 어디쯤일까? 더 내려가야 할까? 골짜기를 돌아 성모 광장으로 가는 길가에 14처 앞에서 기도하던 마을 사람들의 모습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저 무덤 속에 서리서리 쌓인 내 젊은 시절을 그려보는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휴전이 되면서 아버지는 막내딸을 매괴학교에 보내기 위해 감곡성당 아랫마을에 피난 보따리를 푸셨다. 나는 그곳에서 학교에 다니고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살았다. 어린 시절 내 놀이터는 주로 학교와 성당이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 “우리 신사 터 가자” 하면 우리는 쪼르르 몰려갔다. 봄에는 길가에 진달래꽃을 따 먹고, 가을이면 도토리를 줍기도 했다. 내 기억에 있는 삶의 절반을 여기 감곡에서 보냈고 감곡에서의 삶은 성당을 떼어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곳에서 나는 기쁨과 아픔을 차곡차곡 쌓으며 성장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은 성당 옆 산등성이에 신사를 지으려 했다. 매산은 성당 소유이지만 일본의 강압 앞에 교회는 산을 까 뭉개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임 가밀로 신부님은 아무도 모르게 이곳에 기적의 패를 묻고 “이곳을 성모님을 공경하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장소가 되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셨다. 해방이 되면서 일본은 쫓겨갔고 그 터는 신부님의 뜻대로 성모상을 모시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장소가 되었다. 이곳을 지금은 성모광장이라 부르지만 나 어린 시절 사람들 머릿속엔 아직 신사터가 더 익숙한 말이었다.
감곡성당에 성체대회는 100년 넘게 이어오는 중요한 행사다. 성당 마당엔 톱밥을 물들여 꽃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성체를 모시고 성모 광장으로 간다. 성모 광장에 모여 기도하고, 산 정상에서 성체를 들어 올려 기도하고, 산을 한 바퀴 돌아내려 오며 기도한다. 성체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본당 신자는 물론 공소에서 오는 신자들로 마을은 온통 잔치 분위기다. 집집마다 공소 신자들을 맞을 준비로 분주하다. 방 하나로 살던 가난한 우리 집에도 어김없이 손님이 와서 주무신다.
동네 언니들은 습자지를 오려 꽃을 만들고 화동들이 쓸 화관을 만들었다. 머리에 화관을 쓰고 흰 드레스를 입은 화동은 돌아가며 성체 앞에서 꽃을 뿌린다. 나는 그 화동이 너무너무 부러웠다. 내 딸이 내가 그토록 부러워하던 화동이 되어 성체 앞에서 꽃을 뿌리며 앞서갈 때 얼마나 좋았던지…. 지금은 성체대회 때 시멘트로 포장된 광장에서 간이 의자를 놓고 행사를 하니 더없이 편하다. 하지만 나는 골짜기를 돌아 올라가 잔디밭에 쭈그리고 앉던지 휴대용 자리를 깔고 앉아 기도하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다.
10여 년 전 이탈리아 여행 코스에 시골에 작은 마을 아씨씨도 있었다. 우리는 도심에 근사한 호텔이 아닌 아씨씨의 허름한 호텔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갔다. 가이드 말이 여기엔 중세 시대에 축조된 성벽과 성문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마을 길을 따라 얼마를 내려가니 정말 성문이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동대문이나 남대문 같은 성문이 있고 상당산성에 올라가도 성문이 있지만 지금 사용하는 문은 아니다. 여기 성문은 여전히 자동차와 사람들이 드나드는 성 안팎을 연결하는 물리적 통로다. 물론 여닫지는 않고 문을 성벽에 고정해 놓았지만, 유적으로 남아있는 우리 성문과는 느낌이 다르다. 말 탄 군사들이 몰려올 것만 같다. 창을 든 군사들의 함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더 인상적인 것은 ‘칼렌디마조’(Calendimaggio)축제다. 마을 사람들은 전통의상을 입고 깃발을 들고나와 함성으로 축제를 연다. 이 축제에 참여한 수백 명의 사람은 외부에서 동원된 배우가 아니고 여기 아씨씨 주민들이라고 한다. 우리는 운 좋게 축제 기간에 거기서 하룻밤을 묵으며 축제를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축제는 절기가 되었고. 성문과 성벽은 자연의 일부가 된 것이 아닐까?
부럽다. 자연처럼 느끼게 되는 그들이 보존한 구조물과 정신이. 시멘트 포장으로 묻혀버린 내 추억을 생각하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어쩌랴. 식구가 늘어 집이 좁으면 무쇠솥 걸고 아궁이 불 때던 초가삼간의 추억을 헐고 새로 필요에 맞게 집을 짓듯 여기도 필요에 따라 골짜기에 지붕을 덮고 대형 강당을 만들었다. 아무쪼록 더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기도하고 언제까지나 그 기도가 이어지기를 바라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봄이면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고 아카시아 향기 그윽한 골짜기를 돌아 성모 광장에 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