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민경준
현란한 불빛과 탬버린이 사람들과 화음을 맞춘다. 심장 소리도 박자에 맞춰 고동친다. 나도 마이크를 들고 폼 한번 잡아 보려는데 화면 속 가사는 무정하게 나를 앞질러 버린다. 애절한 트로트를 부르건만 스피커에서는 녹슨 경운기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잘해보겠다고 지르는 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은 듯 컥컥거릴 뿐이다. 점수판에 '60'이라는 숫자, 그날 이후 내 별명은 '기차 화통'이 되어버렸다.
노래를 잘하고 싶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발성 연습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때 깨달았다. 나의 성대는 투박한 직선인데, 세상의 노래들은 너무나 유려한 곡선이라는 사실을, 접점을 찾지 못하니 음치를 벗어날 재간이 없다. 나는 노래를 못해 괴롭고, 듣는 이는 귀가 괴로워서 웃는다. 그런데 어느날, 술기운을 빌려 투박하게 뱉어낸 노래에 친구가 눈시울을 붉혔다. 음정은 불안하고 박자는 가출한 지 오래였지만 그 가사는 내 처지와 너무도 닮아 나도 모르게 울부짖듯 불렀던 노래였다. 내 처지만이랴. 이 땅에 살아가는 인간의 숙명 같은 애환이 담겼기에, 그놈도 따라 울어버린 게지.
그때 알았다. 노래는 기교가 아니라 가슴으로 부르는 것임을, 악보대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속에 맺힌 말을 토해내는 것이 진짜 노래라는 것을 말이다.
세상에는 수만 곡의 노래가 있어도 자신과 주파수가 딱 맞아떨어지는 노래는 따로 있다.
나에게는 김성환 가수의 <인생>이 그렇다.
"세상에 올 때 내 맘 대로 온 건 아니지만은 이 가슴에 꿈도 많았다. 내 손에 없는 내 것을 찾아 낮이나 밤이나 뒤볼 새 없이 나는 뛰었지" 이 구절을 읊조리다 보면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면서 목울대가 뻐근해진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왔건만, 기고 앉고 서고 걷는 것부터가 내 의지 없이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인생은 마음먹은 대로 될 줄 알았다. 하지만 눈을 떠 보니 삶이라는 거대한 파도 위에 배 한 척 띄워져 있었고, 나는 노 젓는 법도 모른 채 허둥대고 있었다. 그렇게 떠밀리듯 살아왔다. 욕심을 낼수록 나아가기보다 뒤로 밀리거나 제자리걸음이었다. '인간은 계획을 세우지만 결과는 신의 허락에 달려있다'는 말처럼,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이치이거늘, 젊은 날엔 그걸 인정하지 못해 발버둥쳤다. 사랑도 돈도 자식도 내 계획표대로 착착 진행되어야 직성이 풀렸다. 일이 꼬일 때는 서러워 밤잠을 설치기도 했고, 하늘을 원망하며 가슴을 쳤다.
노래는 이어진다. '손아귀에 힘을 줄수록 소중한 것들은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고 인생살이는 항상 후회속에 살고 있다'라고. 시작이 내 선택이 아니었듯 흘러가는 과정 또한 순리에 맡기라고 말한다. 파도를 거스르기보다 몸을 맡기는 법을 배울 때 비로소 인생의 참맛이 느껴지는 것이라고. 머리카락에 서리가 내리고서야 이 구절들이 가슴에 박힌다.
이제 된소리로 한가락 뽑아본다. "두 번 살 수 없는 인생 후회도 많아, 스쳐간 세월 아쉬워한들 돌릴 수 없으니 남은 세월이나 잘 해봐야지, 돌이 본 인생 부끄러워도 지울 수 없으니 나머지 인생 잘해봐야지"
땅을 치고 후회해도 되돌아갈 수 없는 길, 진퇴양난의 절망 속에서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한없이 부끄러운 날은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었다. 시간이 흐르고서야 깨닫는다. 삶을 너무 완벽하게 살아내려 했던 강박이 도리어 독한 욕심이었음을,
문득 내 삶 자체가 '음치'였다는 생각을 한다. 성공이라는 박자를 맞추려고 버둥거리고, 행복이라는 고음을 내기 위해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여전히 음은 이탈해 있었다. 그러면 좀 어떤가. 행복과 성공은 생각하기 나름인데, 악보대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삶을 소음이라 하겠는가.
나는 노래방보다 혼자 운전하며 부르는 노래를 즐긴다. 거기엔 점수도, 비웃음도, 눈치 볼 관객도 없다. 오직 내 노래와 주파수를 맞추고 목청껏 소리 지를 뿐이다. 세상이 정해 놓은 박자를 무시하고 나만의 박자로 사는 배짱, 그거 참 괜찮다.
부족하고 서러운 삶이라 여겼으나, 돌아보니 이미 충분히 잘 살아온 인생이다. 비바람이 치면 젖은 채로 걷고, 햇살이 나면 옷을 말리며, 묵묵히 걸어가리라. 손자들의 맑은 웃음소리, 고운 저녁 노을빛, 그리고 고단한 하루 끝에 건네는 "수고했어"라는 한 마디,
그런 소박한 것들로 인생의 빈칸을 채우고 싶다.
발끝에 차이는 작은 기쁨들 하나씩 줍다 보면, 내 노래의 음률도 어느덧 부드럽고 잔잔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