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김병규
김 단
나는 물을 보며 물었다. 무엇 때문에 흐르느냐고. 아마 이만큼 바보스런
물음도 없으리라. 그러나 어쩐지 묻고 싶었다. 얕지만 널따랗게 흐르는 냇물이
물 구빌 흰 이빨처럼 번쩍이면서 마치 웃기라도 하듯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
‘그저 가는 거지 뭐... .
여길 지나 큰 강을 보며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답도 없고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주위의 모든 것은 아랑곳없어 보였다. 강물은 흐르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중에서
그는 이런 분이다. 흐르는 강물을 따라 하염없이 걷다 심심하면 강물에도 말을 건다. 혼자 가지만 외롭지 않은 척 한다. 산과 들과 강과 나무가 다 말벗이 되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지만 난 그의 속마음을 안다. 그래서 더욱 쓸쓸하다. 바람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상관없이 드러누워 잠을 자기도 한다.
무심이며 무위(無爲)다. 그는 하염없어 하염없이 걷고, 산이 거기 있으니 산을 오를 뿐이다. 입산금지구역을 헤매다 간첩으로 오인을 받기도 했고, 산에 이끌려 산 속 깊이 들어가 천연기념물인 검독수리 떼를 만나 겁에 질려 도망을 친 적도 있지만, 그는 오히려 이를 즐긴다. 두 발이 허락하는 한 온 천지를 헤맬 분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의 존재 이유일지도 모른다. 걷는 사람에겐, 걷는 것은 사고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식할 수 있는 정신이며 행동하는 정신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늘 혼자였다. 아니 혼자이고 싶어 했다. 혼자가 되었을 때 외로움을 느끼기보단 혼자일 때 가장 행복해 하는 분이다. 자식도 물론 뒷전이다. 길에서 아버지와 정면으로 부딪쳐도 단번에 알아보지 못한다. 그는 항상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코앞에 있는 딸자식조차 알아보지 못할까. 그는 먼 곳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먼 곳을 그리워했나보다.
일제의 학도병 동원령을 피해 일본에서 북만주로 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그리워했던 곳은 유학을 했던 일본이었던 것 같다.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라 더 애틋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진 사꾸라를 좋아했다. 벚꽃이라는 우리말 예쁜 이름을 두고 굳이 사꾸라냐고 하겠지만, 부모님에겐 벚꽃이 아닌 사꾸라였고, 나에겐 그놈의 사꾸라 때문에 아버지가 사꾸라의 나라 일본에서 먼 곳으로 가셨기 때문에 난 사꾸라피는 춘삼월 호시절을 좋아하지 않는다.
수필, 법학, 철학 등의 저서를 많이 펴냈지만 출판기념회조차 하지 않는 분이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일본으로 가기 직전까지 평소에는 금기시까지 했던 전공서적을 집필했다. 팔십 노인이 신바람이 펄펄 나서 나이 생각도 하지 않고 피곤도 잊은 채 밤샘작업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가가 뒤에서 재촉한 것 같다. 사꾸라에 심취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청천벽력같은 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단다. 정년퇴직을 했어도 대학교 이사장직을 맡았고 학교일과 글 쓰는 일로 바쁜 분이라, 봄 방학 때에 맞춰 부부동반여행 날을 잡았는데, 자꾸 사꾸라 필 때 가겠다고 하시더니, 결국 사꾸라에 목숨을 건 것이 아닌가. 사꾸라가 뭐가 그리 대단할까 했지만 평소의 아버지를 생각하면 분명 깊은 뜻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데, 효도여행이 불효막심한 여행이 될 줄이야! 이러니 나에겐 그놈의 사꾸라가 사달 일 수밖에 없다.
사꾸라가 분분히 흩날리던 날, 아버진 비행기 화물칸에 갇힌 채 걸어갔던 분이 누워서 돌아왔다. 학교장으로 장례를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진정으로 원한 것은 문인협회장일 것 같았다. 사랑하던 제자 조무제 대법관이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버지 책상위엔 미완의 원고지가 번호만 매겨진 채로 수북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치미는 일은 아버지 목숨과 바꾼 그 원고를 누군가가 가져가버렸다는 사실이다. 한마디로 도용했다. 그 후로 책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아버지 이름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학자로서 양심고백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서둘러 허망하게 가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얼토당토하지 않은 연유 때문에, 난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드리지 못했다.
난 사실 아버지의 세계에 별 관심이 없었다. 이것이 이유가 될 리는 만무하지만, 공부하는 것만이 지상최대의 목표라고 여기는 분이라 싫었다. 그래서 일부러 공부도 설렁설렁했다. 심지어 아버지를 관찰하기도 했다. 고백하건대 난 좀 삐딱한 편이다. 그는 법정대 교수, 난 영문과 학생이었지만, 학교에선 철저히 모르는 사이로 일관했다. 우리에게도 이런 면이 있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가 강의하는 교양불어를 강의실 구석진 곳에서 친구들 몰래 들었다. 그는 수업은 차치하고 불란서 문학, 영화, 샹송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창문을 활짝 열고선 눈을 감고 빗소리를 들으라고 했고, 춘색이 만연할 땐 강의실을 박차고 나와 학교 뒷산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그는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였다. 난 이 교수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한 일이,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그땐 (1972년 이후) 시국이 혼란했다. 크든 작든 시위가 끈일 날이 없었다. 그날도 도서관 앞으로 모이라는 대자보가 붙어 있었지만, 난 시국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방관하는 것을 즐기던 어느 날, 삼삼오오로 뭉친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을 빙빙 도는가했는데 순식간에 의기충천하여 격하게 대로로 뛰쳐나갈 찰나였다. 운동장엔 흙먼지가 앞을 분간 하지 못할 정도로 자욱했다. 그런데 이게 웬 조화인가! 갑자기 주위가 찬물을 끼얹은 듯이 조용해졌다. 그들이 운동장바닥에 차분하게 앉기 시작했다. 먼지로 가득 찬 무리 속을 들여다보다 난 기절초풍 할 뻔했다. 아버지가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소심하고 겁 많은 양반이 무슨 배짱으로 폭도(?)들 앞에 버티고 서 있는지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들은 이미 총장실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그 여세를 몰아 운동장으로 뛰쳐나온 판국이었다. 아버지를 빼 내 와야 하는데, 흥분한 학생들이 무슨 짓을 할 지 모르는데, 가슴은 콩닥콩닥 뛰는데, 내 몸은 미동조차 없었다.
이럴 수가! 세상에 이런 일이! 학생들이 하나둘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리 긴 시간이 걸린 것도 아니었다. 미쳐 날뛰던 무리들을 아버지가 무슨 힘으로 제압을 했는지 난 아직도 정확하게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한다. 세상이 거꾸로 돌아갈지언정 이 분 말은 들어야한다고 그들 스스로가 인정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조용히 세상을 바꾸는 사람. 말은 하지 않아도 너무도 많은 말을 하는 사람.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어도 그 장소가 빛나는 사람이라고들 말한다.
제 7회 현대수필문학대상을 받을 때의 일도 생각난다. 그렇게 좋은 날에도 아버지는 울었다. 학문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날이 서 있는 분인데 마음은 소년같이 여리고 순수했다. 오죽했음 나 같이 못난 자식이 아버지 걱정을 다 할까.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하고. 돈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사신 분이란 것도 알 만 한 사람은 다 안다. 도덕과 상식이 실종되어 버린 작금의 세상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이지만, 그래도 난 이런 용한 분이 버티고 있어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평소에도 난 아버지의 머릿속이 정말 궁금했다. 어떨 땐 용량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우리에겐 아버진 아버지라고 하기보다는 책 읽고 공부하는 선생님이라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맨날 먼 산을 바라보며 글 쓰는 아버지가 싫었는데, 아버지가 좋아했던 이 길에서 나도 아버지처럼 방황한다. 나를 닮지 않았으면 했는데 아들이 또 닮아간다. 나의 아버지와 나와 내 아들의 감성이 닮았다. 삼대는 강한 축에 끼지 못한다. 아들은 할아버지를 인생의 멘토로 여긴다. 세습자본주의가 고착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더욱이 이 세상을 떠난 분을.
아직도 그를 그리워하는 분들이 꽤 많다. 그의 행보가 적극적이지 않아 다수의 독자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철학에세이에 대한 평판은 전국적이었다고들 말한다. 무엇보다 자신의 전공보다 수필을 더 사랑하신 분이다.
2000년에 부산문인협회와 수필가 정경 선생님의 도움으로 부산 대신공원 초입에 현석 김병규 선생 문학비가 만들어졌고 2014년 11월에 평론가 박양근 선생님의 도움으로 현석 김병규 수필문학상이 만들어졌다. 올핸 아버지 20주기다. 이젠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다.
그는 한 곳에 있어도 마음은 다른 곳에 두고 온 바람 같았다. 허무와 고독이 몸에 배었는데도 애써 그렇지 않은 척 했다. 그는 그 쓸쓸함을 즐기며 그 속에 숨어서 글을 썼다. 그가 존경한 사상가 존 로크처럼, ‘훌륭하게 숨는 사람이 훌륭하게 살았다’ 는 좌우명을 음미하며. 그는 글에서처럼 바람을 그리워하다 바람이 부는 곳으로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