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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김치 한 통에 담긴 사랑

작성자담비|작성시간26.06.11|조회수37 목록 댓글 0

열무김치 한 통에 담긴 사랑
― 엄마랑 4,000일 그리고 앞으로 4,000일


며칠 동안 밤을 꼬박 새웠다.
『왕릉 가는 길, 인생을 배우다 ― 여든 노인들의 조선왕릉 40기 답사기』 원고를 다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원고를 쓰는 일은 즐겁지만, 때로는 몸이 먼저 신호를 보낸다. 그래서 오랜만에 안양예술공원 김중업박물관 앞 명당커피숍을 찾았다.

창가에 앉아 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큰 구도를 다시 살펴보았다. 목차도 손질하고, 답사 소회도 다듬고, 빠진 부분도 채워 넣었다. 창밖에는 초여름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고 있었다.

그 순간 문득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열무김치가 먹고 싶다." 며칠 전부터 하셨던 말씀이다.
나는 노트북을 덮고 일어섰다. 원고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게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어머니가 드시고 싶어 하시는 열무김치를 담아드리는 일. 나는 곧장 단골 채소가게로 향했다.
주인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말씀하셨다.
"오늘도 김치 담으세요?"
"예. 어머니가 열무김치가 드시고 싶다 하셔서요."
가게 한쪽에는 싱싱한 열무와 얼갈이가 놓여 있었다.
나는 열무김치 한 박스와 얼갈이 한 단을 골랐다.
그러나 열무김치는 처음 담아보는 김치였다.
주인아주머니도 잘 모른다며 뒤에 계신 어르신께 여쭤보라고 했다. 잠시 기다렸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열무김치 맛있게 담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배나 사과를 갈아 넣어 보세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배와 사과를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참 가벼웠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머니가 좋아하실 모습을 상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행복이다. 더구나 그 사람이 어머니라면 더욱 그렇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엄마, 열무김치하고 얼갈이 사 왔어요. 배도 샀어요."
그리고 총금액까지 말씀드렸다. "7,500원입니다."
어머니는 아이처럼 웃으셨다.
"잘했다." 

나는 정중하게 부탁드렸다.
"엄마, 이것 좀 다듬어 주세요." 어머니는 흔쾌히 열무를 다듬기 시작하셨다. 잠시 후 요양보호사 여사님도 오셨다.
여사님은 얼갈이를 다듬어 주셨다. 세 사람이 함께 김치를 준비하는 풍경. 그 모습이 마치 작은 가족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요양보호사님과 함께 안양천 뚝방으로 산책을 나가셨다. 오늘도 오리와 왜가리를 보러 가신다고 했다. 어머니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밖에 나가신다. 밖에만 나가시면 얼굴이 환해지신다.
아마도 사람은 자연 속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존재가 되는 모양이다. 

어머니가 나가 계시는 동안 나는 본격적으로 김치를 담기 시작했다. 열무를 씻고 또 씻었다. 깨끗이 씻어낸 뒤 양념을 만들었다.
고춧가루.
마늘.
새우젓.
까나리액젓.
그리고 밀가루풀.
배까지 넣어 믹서기에 갈았다.
양념을 만드는 동안 부엌 가득 고소한 냄새가 퍼졌다.
나는 김장용 비닐장갑을 끼고 조심스럽게 버무렸다.
그러면서도 걱정이 앞섰다. '맛이 없으면 어떡하지?'
'너무 짜면 어떡하지?' '어머니 입맛에 안 맞으면 어떡하지?'
그래서 끝내 한입도 먹어보지 못했다.
김치통에 담아 김치냉장고에 넣고 나니 마음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하지만 이미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나는 밥을 지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흰쌀밥. 그 밥 냄새만으로도 행복했다.
잠시 후 어머니와 요양보호사님이 돌아오셨다.
산책을 다녀오신 어머니 얼굴은 한결 밝아 보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열무김치를 꺼냈다.
그리고 밥상에 올렸다. 세 사람은 나란히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어머니가 먼저 김치를 한입 드셨다.
나는 긴장한 채 어머니 얼굴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맛있다."
그리고 또 한 번. "참 맛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놓였다. 어머니는 밥 한 공기를 다 드셨다.
그리고 연신 말씀하셨다. "우리 아들 최고."
"우리 아들 최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세상의 어떤 상보다 값진 상을 받은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깨달았다.
행복은 거창한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비싼 음식에 있는 것도 아니다.
김치 한 통.
밥 한 공기.
그리고 "맛있다"는 어머니의 한마디.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종종 큰 성공을 꿈꾼다.
큰 집.
큰돈.
큰 명예.
하지만 내게 가장 큰 행복은 어머니가 밥 한 공기를 맛있게 드시는 모습이다. 어머니가 웃으시면 내가 웃는다.
어머니가 행복하시면 내가 행복하다. 어머니의 자존감이 곧 나의 자존감이다. 어머니의 건강이 곧 나의 기쁨이다.
오늘 나는 열무김치 한 통을 담았다. 

그러나 사실은 사랑을 담았다.
효도를 담았다. 감사를 담았다. 그리고 함께 살아가는 하루의 행복을 담았다. 다음에는 총각김치를 담아 드릴 생각이다. 어머니가 또 맛있게 드셔 주시면 좋겠다.
나는 앞으로도 세 끼 식사를 챙겨 드리고 싶다.
약도 챙겨 드리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사랑을 먹고 살아간다. 관심을 먹고 살아간다.
대화를 먹고 살아간다. 오늘도 나는 배웠다.
김치를 담는 일은 단순히 음식을 만드는 일이 아니다.
사랑을 버무리는 일이라는 것을.
어머니. 항상 건강하십시오. 만수무강하십시오.
그리고 오래오래 제 곁에 계셔 주십시오.
사랑합니다. 정말 사랑합니다.

2026년 6월 9일

백절 황인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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