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 수필의 성과와 의미-이상규의 《끝내 하지 못한 말 한 마디》
方 旻
1. 자서전과 자전 수필
작가 이상규는 퇴직자다. 은퇴한 후 글쓰기에 매진하여 첫 수필집을 상재했다. 이 대목에서 몇 특징을 찾아보자. 그가 사회 일선에서 물러난 시점에 지난 인생을 돌아본다. 수필의 한 속성이기도 한 과거 체험이 주요 제재란 말인데, 한 가지 더하면 첫 수필집이 갖게 마련인 자전적 내용이고, 이 둘은 동전 양면처럼 거의 동숙한다. 이 《끝내 하지 못한 말 한 마디》는 이상규의 흘러간 삶의 의미를 돌이켜 기록하며 회고하는 개인사가 주조란 말. 일반 독자는 한 개인인 이상규의 삶을 대면할 의욕이 생길 때, 혹은 자신의 삶과 대비하고자할 때만 이 수필집이 나름 의미를 가진다. 단순한 호기심만으로는 평범한 개인 삶은 별로 가치 있는 독서 거리로 다가서지 않을 것. 이 수필집에 등장하는 여러 개인들, 예컨대 작가 가족을 비롯하여 성장기 학창 선후배, 입사하여 퇴사할 때까지 이런저런 인연이 얽히고설킨 회사 동료와 상사, 그 부하 직원들. 40여 년 회사에 근무하면서 일과 관련하여 이리저리 부딪힌 사람들. 작가를 중심으로 그의 삶 문양을 다양한 빛깔로 짜게 만들었던 주인공과 조연들, 뭉뚱그려 작가 지인들과 다른 일반 독자에게 이 책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묻는 일은, 일테면 이상규 수필집이 감당하는 문학과 사회에 관한 의미를 묻는 일과 동궤다. 왜냐하면 작가와 관련된 소수인물을 넘어서 다른 대다수 독자에게도 어떤 의미 스펙트럼을 가질 때 수필가로서 존재 의미를 갖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 자서전 쓰기에 참여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건, 인구 노령화와 함께 벌어지는 하나의 시대 추세다. 여기저기서 관련 강좌도 우후죽순으로 늘어가고 더불어 출간하는 자서전도 점차 세를 불리고 있다. 과거 시대에 자서전에 대한 인식은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 어떤 분야에서 남다른 업적을 남겨 그걸 후세의 바람직한 지침이나 참고할 자료로 삼도록 하는 공익적 가치에 의한 출판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나름 인생을 정리한 정치계, 산업계, 문화인 등 저명인사의 회고록도 같은 범주에서 바라다보았다. 이것이 시대 따라 변화하여 이제는 어떤 특수한 개인을 넘어서 특이한 인생이 아닌 갑남을녀 범인도 하나둘 개인 인생을 남달리 생각하고 그들 나름 의미와 가치를 인식하여 자신 인생을 정리하고 기록하려는 욕구를 하나둘씩 드러내기 시작하였다는 이야기다. 이와 동반하여 서적 출판의 용이한 여러 환경 변화와 기술 발달도 이런 개인 요구를 한층 활성화시킨다. 이즘엔 일반 사회 추세에서 볼 때 평범한 개인이 아니라 수필가란 작가 타이틀을 단 사람의 수필집이 그러한 자서전류 출판물과는 무언가 다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문학에서 보자면 마땅하고 필요한 요구임이 분명하다.
하면 자서전과 자전 수필집이 무엇이 얼마나 다르고 달라야하는지를 조금 더 곰곰이 살필 당위성이 제기된다. 한마디로 자서전은 충실한 개인 역사 기록물이고, 자전 수필은 개인 체험에 기반한 문학물이다. 더 폭을 넓히면 역사와 문학의 차이라고 보겠다. 역사 소설과 역사가 다른 것처럼. 여기서 더 나아가 보자. 글의 제재 면에서 본다면, 한 개인 체험이 글 바탕인 것은 동일하나 자서전은 자서전 주인공 관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을 망라한다. 수필에선 작가 개인과 독자 양면에 의미가 있을 수 있는 체험을 선택하니 자서전보다 그 폭이 좁아진다. 글의 주제 면에서 보아도 자서전은 연대기적 서술 위주이므로 광범위한 주제는 있을지라도 수필처럼 글 한편마다 따로 설정하는 주제는 없기 마련이다. 예컨대 자서전에서는 포괄적으로 세부 개별 장마다 ‘출생은 축하받았지만 성장은 어려웠다.’거나, ‘출생과 성장은 평범했지만 학창 시절엔 각광을 받았다.’ 식이다. 한 편 수필은 이것을 글로 쓴다면 훨씬 더 세분하여 ‘꽃피던 그날’, ‘논길 위 하루’, ‘눈물 흘리는 아이’, ‘무거운 책가방’ 정도의 주제나 제목으로 수필 글감이 될 것이다. 자서전은 대체적으로 연보에 따른 시간 순차별로 평면 구성하는 스토리텔링을 위주로 한다면, 수필은 독자 흥미와 사연 긴장감을 조성하기 위해 시간 순서에 구애받지 않는 플롯으로 구성하여 서술한다. 문장 부면에선 자서전은 상황 이해의 빠른 전달을 위해서 개념적이고 설명적이거나 지시적 문장을 중심으로 서술한다면, 수필은 현장감과 정서 표현을 위해 구체적이고 묘사적이며 함축적 문장을 더 많이 사용하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 경우에 따라서는 자서전과 자전 수필집 경계선을 명확하게 구별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분명한 사실은 자서전 필자는 집필 동기가 개인 인생의 충실한 기록을 가족과 지인에게 전달하려는 목표를 가진다면, 수필가의 집필 지향점은 인생 기록을 문학으로 형상하여 독자에게 감동을 전달하려 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 그렇다 해도 자서전은 얼마든지 문학 작품으로 읽힐 수도 있고, 반면 수필집이 단순 개인 기록물로 전환할 수 있는 여지도 언제나 열려 있다. 해서 수필가는 자신의 글이 문학 자리를 이석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할 것이다. 물론 문학 범위가 날로 넓어지는 추세에 작품 한편을 놓고 문학에 속하느냐 벗어나느냐 하는 논의가 자칫 무의미할 수도 있다. 문학을 바라보는 열린 마음이 물론 필요한 것도 사실이지만 어떤 글이라도 문학이 추구하는 진실 탐색과 미학 추구는 언제라도 소중하기 때문이라 이런 방식 문제 제기는 늘 유용하다. 하지만 자서전 쓰기 열풍이 분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시대 조류에 부응하여 이른바 수필가 작품이 그와 별 차이가 없거나 그게 그거 아니냐는 시선에서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만은 분명 명심해야 할 것이다. 만약 이점이 명쾌하지 않다면 수필 문학이란 명의는 그 존재 의미가 상당히 퇴색할 수 있다는 점도 아울러 강조한다.
이상규 수필집의 문학 의미를 물어보려는 서두에서 두드리고 가야할 돌다리로서 앞에서 다소 장황한 문제를 제기해 본 것이다. 그러면 과연 이 글의 메인 화제인 《끝내 하지 못한 말 한 마디》가 보통 자서전류와 다른 가치 있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문학으로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찾아보아야 하는 소명까지 짊어진 채 이 책속으로 한발 들어가 보기로 한다.
2. 문학적 성과
수필집의 표제작인 <끝내 하지 못한 말 한 마디>는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다. 선친에 대한 불효를 뒤늦게 사죄하고 용서를 빌면서 반성한다. 어머니에 대한 글은 <어머니는 웃고 계시지만>과 <신혼을 빼앗긴 학병의 아내> 두 편 다 역시 회고다. 아내를 대상으로 한 글은 <장미 스무 송이>와 <가로등이 더 환한 것 같았다>뿐이고, <불속에서 건진 두 아들>과 <아들의 둥그런 등>, <삼부자의 마라톤>, <고참이라고 발을 씻겨주더라고요>는 아들 소재며, 손녀에게 애정을 구하는 <손녀 내 편 만들기>가 가족 대상 작품 전부인데 반하여 작가 자신을 다룬 글은 <내 다리는 오다리> 외에 가족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여러 편을 썼다. 또 친구와 교유한 체험 제재 글로는 <비로소 타교생의 옷을 벗다>, <먼저 간 친구에게>의 단 두 편이다. 주변 지인을 대상으로 삼은 글은 <대답 없는 휴대폰>, <순이 누나>, <시가 맨의 미소>, <어느 여 검객 이야기>, <노선배의 검도 사랑> 정도다. 그 나머지 글은 모두 자신이 주인공이다. 등재한 수필집의 전반적 내용을 일별해 보면 작가 개인에 관한 글이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 이것은 제재 선정에서 철저하게 작가 위주 체험 중심이란 점이다. 위 글에서도 작가와 관련된 체험을 중앙에 두고 주변적으로 또는 연계된 면에서만 타인을 그 대상으로 삼는다. 매우 상당하게 작가 위주 선택이 두드러진다는 점에서 보면 다소 주인공 주변 선택을 적절히 배치하는 자서전류와 차이를 보인다. 이처럼 수필집 글감 선정은 이상규 작가 관점에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마디로 작가 중심성이 드러나는 특징이라 볼 만하다. 이 또한 수필 문학의 한 속성이다.
가장 많은 편수를 보인 작가 개인에 대한 글에서, 자서전류 글과 다른 점을 읽어낼 수 있는 꽤 두드러진 것은 주제에 따른 화제를 플롯 구성으로 다룬 데 있다. 결코 시간 순서에 의한 순차 구성은 거의 없다. 그만큼 작가는 글의 문학 구성 기법에 대한 이해와 실제에 충실한 편이다. 이점은 수필집이 자서전류로 떨어지지 않고 문학 수필임을 입증하는 유력한 증거의 하나다. 또 다른 문학성을 입증하는 문장 특성을 드러내는 글로 <어머니는 웃고 계시지만>을 들 수 있다. 어머니 임종 체험을 다룬 글에서 보이는 작가의 절절한 심정을 주변 묘사로 간접화 시켜 드러낸다. 사실을 꼼꼼하게 적시하면서 객관 상관물을 통한 내면 심리 상황 묘사는 실제 현장의 비탄에 잠긴 정황과 어두운 분위기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키는 문학적 성취를 이룬다. 잠시 그 장면을 인용한다.
“어둠이 깔린 초겨울 저녁, 납덩이 같은 정적을 뚫고 메마른 하늘에 번갯불이 번쩍였다. 이어서 터지는 천둥소리, 하늘에서 포탄이 쏘아지는 것 같았다. 나는 숨을 죽였다. 굵은 빗줄기가 사납게 사위를 두들겨댔다. 세상의 종말이라도 올 것 같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비가 그쳤다. 불과 5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었다. 아득히 고모의 기도소리가 들렸다.”(<어머니는 웃고 계시지만> 중에서)
쉰을 채 넘기지 못하고 일찍 임종하는 어머니를 마주하고 있는 순간에 아들 심정은 어떨까 하는 상상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비장한 순간은 당시 군기가 바짝 든 초급 장교인 군인 신분이었어도 차오르는 슬픔을 자제한다는 것은 불가한 일이다. 그것을 조금도 문면에 드러내지 않고 그 현장 상황과 무관한 듯 냉정한 카메라 앵글처럼 하늘과 병상 주변을 훓듯이 묘사한 그 필력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물론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기록이라 당시 감정 상태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 거리를 획득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점을 감안해도 당시 기억을 되돌려서 넘치는 감상에 빠지지 않고 일정 간격을 유지하여 현장감을 이렇게 무표정한 채 건조하게 그려낸다는 것은 나름 문학 인식과 필력 없이는 나오기 어렵다.
3. 수필로서의 가치
작가 이상규는 책의 서문에서 수필집을 펴내게 된 속내를 털어놓는다. “직장 생활 40년을 마감할 무렵 ~ 문학에 재도전‘한 것인데, ”영문학 전공“자로 ”평생 책을 옆에 끼고 살“아서 글쓰기 과정의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인생 이모작“에 ”의미를 두고 살아가고 싶“다고 한다. 여기서 관심을 끄는 바는 ’40년 직장 생활‘이다. 70세 초반인 그에게 40년은 성장기를 빼면 인생 전부라 해도 빗나간 말은 아니다. 해서 자전 수필에서 직장 중심의 사회생활은 중요하고 좋은 수필감이다. 당연하게 신입사원부터 최고 경영자까지 오르는 동안 수많은 사연이 있었을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 가운데 몇을 글로 써서 독자에게 전하며 공감을 시도한다. 일반 자서전류에서도 유사한 경험을 글로 다룬다. 때문에 그 소소한 사연을 여기서 살피는 것보다 자서전과 다른 문학성을 찾아보는 것이 이 책의 가치를 발견하는 일이고 수필이 일반 산문과 차별성을 확인해보는 자리며, 아울러 이상규의 수필가로서 가치를 확인하는 일이 될 것이다.
앞에 언급한 바 같이 자서전처럼 시기별 순차 체험을 그대로 쓰지 않는다. 작가가 시기별로 글을 썼지만 책을 편집하면서 이리저리 흩어 놓았다고 볼 수는 있다고 해도, 이 책에는 직장 체험을 다룬 글이 대략 <고마운 동방박사 중동인>을 비롯하여 10여 편에 이른다. 전 분량의 1/4 정도로 인생 반이 넘는 시간으로 치면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셈이다. 물론 직장 생활 40년의 논픽션이 아니니 당연하다 할 수 있지만, 분명 자서전과 다른 분량 선택이다. 요점은 개인사로선 가치가 있는 체험이나 문학 관점에서 이를 취사선택한 결과로 해석하게 한다. 이 중 필자 눈길을 끄는 것은 <테헤란의 포성>과 <벽 앞에서> 두 편이다. 전자는 이란과 이라크 중동 전쟁을 배경으로 해외 상사원의 “수출 목표 달성을 위해 자기 안전을 걱정하거나 가정을 돌볼 여유가 없었”던 긴박한 시대, “쿵쿵, 포성 울리는 테헤란 거리를 내닫던 그때의 열정”을 그리워하고 회상하며 “무역부에 근무하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불가능한” “체험 상속”을 꿈꾼다. 이를테면 과거 험난한 시대를 넘어선 고난과 열정 체험을 기록하는 것에 멈추지(자서전류) 않고 이를 상속하려는 불가한 꿈(문학)을 담아내려 하는 점에 있다.
이보다 공감지수를 더 높이는 것은 <벽 앞에서>다. “말레이시아의 밀림 속 ‘깜뽕’ 지역에서 농부들”에게 “화려한 꽃무늬 장판”을 팔기 위해 “서류 가방을 들고 무거운 견본철을 둘러메고 어깨가 빠지는 것 같”은 일을 하였다. 그는 일을 마치고 지사가 있는 “싱가포르”로 돌아오던 길에 “대형 트럭”과 충돌하여 죽을 뻔한 사건을 체험한 것이 이 글의 핵심 스토리다. 여기까지는 논픽션 서사다. 그가 자정이 넘어 “소중한 존재들”인 “집”과 “가족”에게 돌아온 다음 상황이 압권이다. 늦은 시각이어서 자다가 깨어 “졸음에 겨운 눈”의 “아내”가 보인 반응인데, 이 대목까지는 그야말로 벌어진 팩트(fact)다. 그 다음 작가를 덮친 생각이 문학답게 하는 정서 반응 요체다. “30년도 더 지난 일” 역시 사실이지만 아직도 그에겐 “그때의 광경이 어제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그건 40여년 직장 생활에서 달게 된 훈장 아닌 상흔, 혹은 트라우마로 남은 “소통되지 못한 영혼의 아득한 단절감”이 그것이다. 이것은 “지금도 나는 가끔 무너지곤 하”게 하는 “벽”인 것이다. 사건 현장을 실제 겪은 체험 자아와 그것을 말로 전해 듣기만 하는 타자(가족 혹 친지)에게서 만나는 그 무덤덤한 틈새에 버티고 선 ‘단절감’을 극복하기 위한 진정한 소통은 이런 글로 가능하고 필요하며 문학 형상화가 존재할 가치가 있는 셈이다. 이 형상화가 성공할 때 글을 읽고 간접 체험하는 경험자아인 독자도 시공간 벽을 넘어서 상호간 벌어진 인식 거리를 좁혀 공감이란 소통을 이루게 한다. 이것이 사건 체험 당사자이며 동시에 서술 자아인 수필가 역할이다. 물론 이런 것을 펼치는 마당이 문학이고 작가가 존재할 이유이기도 한 셈이다.
4. 자기 성찰과 현실 순응
자서전은 살아온 인생 치적을 대부분 포장하게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나름 업적으로 인정할 만한 것을 많이 열거하고 그걸 자랑거리로 독자에게 내세운다. 주인공 인생을 긍정적인 것이나 성공담 위주로 이끌어 가면서 때로는 과오에 대해 변명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의 단점을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띈다. 이에 반해 자전 수필은 장점보다 단점을 노출하길 즐긴다. 즐긴다기보다 그걸 과감하게 드러낸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가 판단하는 인간 본성의 발현, 인간 탐구라는 문학 지향점을 향하기 때문이고, 자기 성찰이란 수필 본질에 근원하기 때문이다. 이상규, 그는 수필집 첫 작품인 <내 다리는 오다리>라고 신체 약점을 독자에게 그대로 노출한다. 일반인이라면 그것을 감추려고 할 터인데, 오히려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는 인간에겐 숙명인 유전 본질과 그 문학적 진실 탐구라는 관점에 서있기 때문이다. 감추고 싶은 것, 불편한 진실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진실, 자신을 남 앞에 약점으로 비칠 수 있는 것은 자서전에선 쉬 만나기 어렵다. 오직 수필에서만 자주 접할 수 있는 단골 품목이다.
이처럼 그는 자서전류와 달리 여러 작품에서 부끄러워 감추려 하는 민낯을 화장하고 치장하여 분식하고 겉꾸밈 하는 것을 배제한다. 잘 알다시피 수필은 개인 단독자로서 인간 성숙을 전제하지 않고는 진실한 글을 쓰기 어렵다. 시와 소설처럼 허구 자아를 내세워 자기 인생 체험을 포장하거나 번지르르하게 변장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 수필 문학의 속성을 충분히 그는 인지하고 진솔한 한 인간의 내면과 행위를 글로 다룬다. 이런 부류 작품으로는 <아들의 둥그런 등>, <정년 퇴직자의 생존법>, <버릇도 유전인가>, <어느 주말 하루>가 있다. 여기서 필자눈길을 잡아채는 글은 <정년 퇴직자의 생존법>이다.
“할 말을 잃은 나는 멍하니 서서 걸레질이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소파 앞에 밥상을 편다. 미리 알았으면 그 정도는 못 도와줄 일도 아닌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려본다.”
“오늘 모임에서는 내 말을 줄이고 사회자로서 친구들에게 안부를 묻고 각자 얘기를 하게끔 유도해야지 하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한다.”
“평소 아내가 혀를 힘차게 문지르는 모습이 머리에 떠오른다. 나는 더 이상 말을 못 하고 속으로만 뇐다. ‘그래, 알았어.’”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 구석을 살펴보니 플라스틱 통에 꽂힌 솔대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저것이 언제부터 저지 있었지?’ 의아한 생각이 든다. ‘글쎄 알겠는데… 꼭 솔질을 해야 하나?’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다짐한다.”
“언젠가 아버지께 대들었던 내 모습이 떠오르고, 내가 한없이 작아지면서 아련한 비애감이 젖어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정년 퇴직자의 생존법은 그밖에 없는 것을.”(<정년 퇴직자의 생존법>에서, 밑줄 필자)
그는 40년 다니던 직장에서 퇴직했다. 그동안 소홀했던 가정으로 돌아와 아내와 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며 산다. 그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화장실 ‘솔대’도 처음 본 듯하고, 아내가 지적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 자신과 가정에서 뭉텅이로 그 앞에 떨어진다. 늘 있어 왔는데 그만 모르거나 외면하고 있던 진상과 하나둘 대면한다. 곳곳에서 갖가지가 물밀 듯 닥쳐오는 현실에서 당황스러움과 부적응에 힘든 그는 끝없이 왜소해지고 가벼워진다. 위에 밑줄 친 부분에서 그의 힘겨운 대응이 가감 없이 잘 드러난다. 혼자 속으로 중얼거리고, 되뇌고, 또 다짐하며 비애감에 젖어들지만 마땅히 뾰족한 탈출구는 없다. 그렇게라도 적응하며 생존할 밖에 없다는 걸 마침내 깨닫기에 이른다. 맞서 대적하지 않고 순응의 길을 선택한다. 이런 현실 순응은 일찍이 직장 생활에서 터득한 바 있다(<승진의 기쁨 탈락의 아픔>). 이러한 현장 문제를 빠르게 파악하고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서 적응하는 순발력(<시가맨의 미소>)은 이미 학창시절부터 내재한 그의 사회화 자세로부터 연유한다(<비로소 타교생의 옷을 벗다>). 이와 같은 빠른 두뇌 회전에 따른 실제적 행동력은 검도 운동으로 다져졌고, 40년 직장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년퇴직을 하게 한 원동력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5. 자전 수필의 문학 의미
이 수필집은 자전류에 따르는 개인 체험 서술의 질량에 따라 글마다 다루고 있는 시공간의 길이와 폭은 길고 넓다. 때문에 작품별 평균 서술 분량이 대체로 많다. 어떤 얘기라도 풀어가다 보면 그 연속성에 치중하기 마련이고 하나둘 서로 상관되고 연결된 화제가 많으니 자연 늘어지거나 확장하게 된다. 이런 방식 스토리 전개는 흥미를 끌 수는 있지만 작품의 주제 통합에 자주 문제를 일으킨다. 그 결과로 통합 주제가 길을 잃고 헤매거나 여러 곁가지 소주제가 뒤섞여 혼선을 부른다. 왜 이런 얘기를 하는가 하는 집필 출발 시에 설정한 주제는 어느 새 사라지고 얘기의 연속성에 빠져 애초에 예상하지 못한 길, 이른바 ‘삼천포로 빠진다.’ 이것은 작품성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자전 수필이 대개 쉽게 빠지게 되는 함정의 하나가 된다. 이상규 수필집에서도 개인 체험 스토리를 다루면서 이런 의심을 받는 작품을 더러 발견한다. 수필 문학성을 살리기 위해 충분히 유의해야할 대목이다. 말하자면 <겨울 새벽 강변에서>나 <수능 날 아침 풍경>, <라이스 리>에서 만나는 함정을 벗어나야 한다. 이 작품들 공통 문제는 스토리텔링에 집중하다 연관성이 미약한 화제를 문어발식 뷔페 구성으로 엮어서 주제 통합을 이루지 못한다는 점이다. 서로 고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나 연관되는 화제를 단순하게 열거하다보면 어떤 의미를 제시해 독자와 소통하고 전달하려 했는지를 망실하고 스토리 자체 확장성에 휘둘린다. 이야기 본연의 놀라운 자생 번식력인데 이는 자칫 애초 목표로 의도한 길을 놓치게 되는 소이다. 자전류 여러 수필집에서 자주 발견하는 오류의 하나이고 대체로 분량이 많고 회고적 사연을 제재로 삼을 때 쉽게 빠지기 마련이다.
이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상규 작가의 능력은 다음 작품이 충분하게 입증한다. <공생>은 화장실 안에서 발견한 벌레를 집중 관찰하며 나름 해석하고 사유하는 인식의 확장이 눈에 띈다. ‘공생’으로 설정한 주제로 통합하는 집중력이 두드러진다. 또 <정년을 앞둔 K 목사님>에서 주변에 시선을 돌려 타인의 행위를 관찰하고 자기 삶 주변만 치중하는 데서 벗어나 관심 폭을 넓히는 시야 확장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는 <세월 따라 제사 문화는 바뀌고> 류에서처럼 세태 변화를 파악하는 관점 확대 또는 인식을 심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는 앞에서 다룬 <어머니는 웃고 계시지만>에서 보여준 문학 형상화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면 앞날은 분명 매우 희망적이다. 이 길은 작가 이상규에게 열려 있는 길이다. 이 책에서 보여준 역량과 말레시아 정글을 누빌 때 보여준 열정이 <엉덩이와의 전쟁>의 도전적 끈기나 <함박눈 내리는 날>의 다짐으로 이어진다면 충분히 극복할 거라 예상한다. 나는 그 진전된 성과를 조만간 확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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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이상규 작성시간 18.09.16 내가 쓴 글을 제3자가 읽고 그 감상을 얘기해 준 경우는 있었지만 이렇게 자세히 분석하여 내놓은 글은 처음이다. 글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자의 것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자서전과 자전수필의 차이점을 명쾌하게 구분해주셔서 '자서전이드만'하는 몇몇 사람들에게 설명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작품들을 주제와 테마별로 나누어 그 내용을 정리하고 의미를 분석해 주심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작가의 내면을 더 깊이 들여다 보는 통찰력에 고개가 숙여진다. 말미에 스토리텔링에 치우쳐 불필요한 사족를 많이 넣어 주제를 흐린 점을 지적하셨다. 명심하고 개선해 나가려 한다. 글 평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