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상소持斧上疏
연전에 이리저리 정당을 옮겨 다니던 철새 정객이 국회의원 공천을 받지 못했다고 도끼를 들고 나서는 것을 보았다. 한 떼의 노인들이 국민연금 수급 문제를 해결하라면서 도끼를 들고 소란을 피우기도 했다. 지부상소의 참 뜻도 모르고 숭고한 정신을 훼손하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니 참으로 부끄러웠다.
연둣빛 봄기운에 이끌려 서원에 들어서니 제주가 원산인 왕벚나무 한 그루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담 밖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왜색기 넘치는 벚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몽글몽글한 꽃숭어리가 크고 탐스럽다.
낙동서원의 중심에 배향된 우탁禹倬 선생은 동방 성리학의 시조라고 일컬어지거니와, 충선왕의 패륜을 서릿발 같은 기개로 꾸짖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충선왕이 부왕의 후궁인 숙창비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자 거적때기 위에서 흰 옷차림으로 도끼 한 자루를 들고 간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역사에서 처음 나오는 지부상소持斧上疏이다. 지부상소는 말 그대로 도끼를 들고 상소를 올리는 것인데, 상소한 내용이 틀리거나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자신의 머리를 도끼로 내려치라는 강경한 의미가 담겨 있다.
지부상소하면, 중봉中峯 조헌 선생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기록으로 남은 몇 마디로 영웅의 깊은 속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열 배가 넘는 왜적을 맞아 허허벌판에다 진을 치면 곧바로 죽음이라는 것을 병법을 읽은 중봉이 어찌 몰랐으랴.
금산전투는 중봉과 700 의사의 목숨을 하늘에 올린 피의 지부상소였다. ‘義’자가 아로새겨진 붉은 깃발과 칠백 개의 도끼와 장검을 곧추세우고 수리치재 아래에서 적을 막아섰다. 왜적은 3대三隊로 나누어 학익진을 펼치며 쳐들어왔다. 중봉과 700 의사는 학의 날개를 딛고 하늘로 올라가 누란의 조선을 지켜달라고 아뢰고 또 아뢰었다. 그들의 애끓는 지부상소가 기어코 받아들여져 마침내 호남과 이순신의 전라좌수영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러한 내 생각이 헛된 망상만은 아닐 것이다.
임진왜란 일 년 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겐소를 사신으로 보내 명나라를 치겠으니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때 중봉은 도끼를 들고 엎드려 사신을 처단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사흘이 지나도 비답批答이 없자 대궐의 주춧돌에 머리를 찧어 선혈이 낭자했다.
중봉은 2년 전에도, 조정의 폐단을 지적하고 왜란을 예견하는 지부상소를 한 적이 있었다. 선조는 중봉의 열다섯 가지 대비책 가운데 단 한 가지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두 차례 모두 귀양 보내는 것으로 답했다.
중봉은 우탁의 충정을 받아들인 충선왕과 달리, 자기의 뜻을 가납嘉納하지 않은 선조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麗君曾不畏天威
禹子深思補袞衣
伏藁危言驚一世
荃心莫何悟前非
※禹子: 우탁선생을 말함
고려는 일찍이 하늘도 두렵다 하지 않았는데
우탁의 깊은 생각 언제나 임을 보필하고자 했네
한 세상을 놀라게 한 멍석 위의 곧은 말
임은 어찌 옛날의 잘못을 깨닫지 못했던가
중봉의 예측대로 왜란이 일어나자, 유약한 선비와 장수들은 도망가거나 항복하기 바빴다. 하지만 중봉은 방비책 하나 마련하지 못한 임금과 관리들을 대신하여 왜군을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모았다. 승병장 영규와 합세하여 청주성을 탈환했다. 곧이어 금산전투에 출정하여 왜병 일만 삼천과 싸웠으나 아쉽게도 칠백의사들과 함께 순절하고 말았다.
금산전투에서 입은 왜군의 피해도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왜군은 의병들의 처절하고 결연한 용감성에 겁을 집어먹고 다시는 호남을 넘볼 엄두도 못 내었다. 그런데도 용렬한 선조는 중봉이 명예를 탐한 나머지 무리하게 공격해서 전멸한 것이라고 평가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니던가.
중과부적으로 패할 줄 뻔히 알면서도 의병의 기개를 왜군에게 심어주고자 700 의사에게 부르짖은 중봉의 마지막 외침은 이러했다.
“장부가 국란을 당해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 어찌 구차하게 살기를 바라리오. 오늘 이 땅이 바로 내가 죽을 곳이다!”
금산전투는 중봉에게 충忠을 실천하는 것이었을 뿐, 구차한 명예욕이 티끌만큼이라도 있었다면 어찌 옥쇄를 택하였겠는가.
중봉은 의병장이기 전에 유학자였다. 그는 유학자의 덕목인 충忠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효孝도 몸으로 실천했다. 부친이 병석에서 소고기를 찾았으나 구할 길이 없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 이후로 중봉은 소고기만 보면 눈물을 흘렸고 평생토록 소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계모가 낳은 아들이 넷이나 있었지만 중봉이 모시고 살았다.
충효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바로 애민愛民이 아니겠는가. 중봉은 평소 사람을 대할 때, 반상班常과 귀천貴賤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어느 날 하인이 중봉과 한 자리에서 밥을 먹는데 두 사람의 음식이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칠백의사 중에는 천민과 양민이 많았다. 중봉의 성품에 감읍했던 이들이었기에 기꺼이 그의 휘하에 들어왔고,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아무런 동요 없이 하늘에 지부상소를 올릴 수 있었던 밑바탕이 된 것이었다.
목숨을 걸고 왕의 잘못을 간했던 우탁, 유비무환을 부르짖으며 도끼를 든 중봉의 정신은 구한말 면암勉菴 최익현으로 이어졌다. 면암은 일본과의 병자수호조약 체결에 반대하는 병자지부소丙子持斧疏를 올리고 대마도에 끌려가서 단식 끝에 순절하였다. 이렇듯, 지부상소는 우리 역사의 중요한 고비마다 민족의 정의로운 얼을 밝히는 횃불 역할을 다 하였다.
왕벚나무 아래에서 하얀 꽃비를 맞으며 생각해 보니, 함부로 도끼를 들고 시위 아닌 시위에 나서는 세태를 내가 탓할 자격이나 있는지 모르겠다. 지부상소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서원을 바로 곁에 두고 살면서도, 크고 작은 못된 버릇이나 허물을 잘라낼 도끼 하나 제대로 벼르지 못한 나도 부끄러운 후손임이 틀림없으니.
『사람과 문화』 제17호 (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