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蘭이 있기에, 겨울이 맑다 / 신노우 - 좋은수필 2026년 여름호

작성자신노우(南園)|작성시간26.06.10|조회수49 목록 댓글 3

이 있기에, 겨울이 맑다

 

                                                                                                                                                                                                   신노우

 

겨울 아침은 늘 고요하다. 밤새 얼어붙은 공기가 창밖에 내려앉아 있고, 베란다 유리에는 살얼음이 얇게 퍼져 있다. 그 적막 속에서 나는 종종 선잠을 깬다. 특별한 꿈을 꾼 것도 아닌데 문득 눈을 뜨게 된다. 이유를 굳이 찾자면, 그 자리에 있을 무엇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조심스레 베란다 문을 열면 차가운 기운이 먼저 손등을 스친다. 그리고 그 한기 속에서 푸르게 서 있는 난이 나를 맞는다.

난은 겨울을 견디는 법을 알고 있다. 잎새는 얇고 길지만 쉽게 꺾이지 않는다. 유연한 선은 긴장을 풀어 주고, 단단한 결은 마음을 바로 세운다. 말없이 서 있기만 해도 주변의 공기가 달라진다. 난 앞에 서면 하루 동안 묻어 온 세속의 먼지가 조금씩 가라앉는다.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난은 제 몸으로 이미 많은 말을 하고 있다.

백화소심이 꽃을 올리던 날을 잊지 못한다. 힘차게 솟은 꽃대 끝에서 순백의 꽃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방 안의 시간마저 잠시 멈춘 듯했다. 향은 요란하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느껴지는 맑은 청향이었다. 그 향은 오래 머물렀고, 사라진 뒤에도 마음 한쪽에 남았다. 나는 그날 삶도 이와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크지 않아도, 지나간 뒤에 기억으로 남는 향기 같은 삶을.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점점 비워진다. 예전엔 가득 차 있던 일정표에 빈칸이 늘어나고, 함께하던 얼굴들은 하나둘 기억 속으로 물러난다. 처음에는 그 공백이 낯설고 서늘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비워진 자리는 상실이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를 들일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나는 그 자리에 난을 두었다. 작은 분 속이지만 그 안에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생의 리듬이 있다.

난은 꺾이지 않는다. 바람에 흔들릴지언정 중심을 잃지 않는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수수하지만 결코 초라하지 않다. 더 드러내려 애쓰지 않으면서도 스스로를 낮추지 않는다. 그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는 나의 삶에 대한 다짐처럼 느껴진다. 남보다 앞서기보다 제 속도로 살아가는 일, 요란한 박수보다 스스로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선택하는 일이다.

가끔은 마음 맞는 문우들이 찾아온다. 우리는 작설차를 우린다. 말수는 예전보다 줄었지만 침묵이 어색하지 않다. 차향이 퍼지는 동안, 우리는 각자의 시간을 조용히 꺼내 놓는다. 성과를 말하기보다는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남은 계절을 어떻게 건너갈지 이야기한다. 그 자리에 난이 있다. 말없이, 그러나 모든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얼굴로.

밤이 깊어도 서두를 필요는 없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잦아들고, 각자의 마음에는 여운이 남는다. 난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낮과 밤을 가르지 않고, 계절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 꾸준함 앞에서 나는 나 자신을 돌아본다. 얼마나 많은 것에 흔들렸고, 얼마나 쉽게 마음을 소진해 왔는지를.

이제는 안다. 삶은 더 채우는 일이 아니라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을. 난이 가르쳐 준 것은 화려함이 아니라 지속이었다. 작지만 꺼지지 않는 불씨를 품고 살아가는 태도였다. 겨울 아침마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난을 바라보는 일은, 나에게 하루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조용한 의식이 되었다.

난이 있기에 내 겨울은 흐려지지 않는다. 얼어붙은 창밖 풍경 속에서도 마음이 맑아지는 이유를 이제는 안다. 더 많이 가지지 않아도, 더 크게 흔들리지 않아도 괜찮다는 확신이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베란다 한켠에 서 있는 난을 바라보며 나는 오늘의 겨울을 건너며, 큰 기쁨이 없어도 곁에 있어 주는 존재 하나로 충분히 미소 지을 수 있다는 삶을 배운다. 꽁꽁 언 계절 속에서도 푸르게 서 있는 난처럼, 나 또한 남은 시간들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난이 있기에, 이 겨울은 끝내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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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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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신노우(南園)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2 '좋은수필' 2026년 여름호에
    우리 수필사랑문학회 신노우.박경대.조이섭 자문위원님(날마다 이별)의 작품이 실렸습니다.^^
  • 작성자정충양 | 작성시간 26.06.11 수필사랑의 보배들이십니다. 축하합니다 ^^.
  • 답댓글 작성자신노우(南園)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1 좋게 봐 주시니 그냥 기쁜 마음입니다.
    隨筆生 隨筆死.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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