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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집(破閑集)

작성자손님|작성시간06.06.12|조회수275 목록 댓글 0

이인로

 

파한집은 고려 명종 때의 학자인 이인로가 남긴 우리나라 최초의 시화집이다. "한가로움을 깨치기 위한 책'이란 제목처럼 심심할 때 읽기 위해 여러 가지 글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말 그대로 심심풀이 땅콩과 같은 글을 싣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파한집에는 고려 시대까지의 유명한 시인들의 작품들과 그와 관련한 일화, 작품평, 기타 재미있는 전설 등이 실려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 문(文)을 바라보는 관점 등이 드러나 있기에 오늘날과는 다르게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을 추론해 낼 수 있는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동시에 한시의 비평은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비평을 위해 무엇을 중시했는지 등이 잘 드러나 있다. 이러한 시화집의 출현은 문학을 반성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등장하였음을 의미하며, 그만큼 문학이 발전했음을 말해준다.

 

 

●작품의 구성 및 의의

 

<파한집>은 목판본으로 이인로가 사망하기 직전에 지은 책으로 그의 사후 40년간 1260년 (원종1) 3월에 초간되었으며, 현재 당시의 초간본은 전하지 않으며 1659년 (효종10) 각판한 중간본이 남아 있다.

이인로의 <파한집> (3권)은 현전하는 최초의 패설집으로 3백여편의 작품들을 수록하고 있다.

구성은 권상은 시평 12조, 서필담 1조, 수필 7조, 시화 1조, 문담 2조, 기행문 1조, 권중은 시평 13조, 수필 13조, 권하는 시평 15조, 수필 18조 등 도합 83조로 되어있다.

<파한집>의 "파한"이란, 글자 그대로 한가함을 깨뜨린다는 뜻이나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우리 고전 시학의 귀중한 연구 자료로서, 세상사에 마음을 두지 않고 산림에 은둔하며 온전한 한가로움을 얻는 것이 장기, 바둑을 두는 것보다 낫다고 하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거기에는 시화와 시평을 비롯하여 조선 전래의 민속과 문물제도에 관한 이야기, 원효, 김유신, 최치원, 정지상 등 이름난 역사 인물들과 작가들에 대한 일화, 명승고적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천관사 전설과 같은 설화 작품들과 민요와 같은 민간 예술에 대한 이야기 등 다양한 내용들이 수필, 잡문적 형태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파한집>은 시화와 시평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당시 문단을 풍미하고 있던 모방주의와 형식주의 문풍등을 맹목 답습하던 도시적 경향에 대한 비판과 함께 그의 진보적인 문학관이 피력되어 있으며 최치원, 정지상, 오세재 등 조선 역대의 진보적 시인들과 두보와 기타 중국의 이름난 시인들의 작품에 대해 다각적인 정확한 평가가 주어지고 있다.

곧 <파한집>은 조선 패설문학의 선구로 되어있으며 또한 조선 중세 평론 문학의 확고한 전통을 이루어 놓은 첫시평집으로 되었다. 이 패설집이 갖는 문학사적 의의도 여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읽기1. 예종과 강일용

 

예종은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고, 우아함을 숭상하여 특히 청연각을 개설하고 날마다 학사들과 더불어 분전을 토론했다. 일찍이 사루에 나아가니 앞에 목작약이 만개한지라 궁중의 모든 유생들에게 명하여 각촉하고 칠언육운시를 짓게 하니 동궁의 요좌 안보린이 수석을 차지했고, 등급을 따라 은총의 비례가 더욱 컸다. 그 때 강일용 선생은 시명을 세상에 떨치던 터라 임금님께서 속으로 그가 짓는 것을 기다려 보려 했다. 촛불이 다 타서야 겨우 한 연을 지어 그 시 쓴 종이를 소매에 넣고 어구에 엎드렸다. 임금님께서 환관에게 명하여 급히 가져오게 하여 보니 그 시에 이르기를.

 

머리 흰 취옹은 꼴찌를 보고 白頭醉翁看殿後

눈 밝은 유로는 난간 가에 기댔도다. 眼明儒老倚欄邊

 

하였다. 그의 고사를 사용하는 정묘한 재치가 이와 같은지라 임금님께서 탄복하여 칭찬하시기를 그치지 않으시며 "이는 옛 사람이 이른 것처럼 흰 머리에 꽃비녀 꽂은 얼굴이 서시의 반화장한 이만 못하다는 격이로다"하시고 위로하고 타일러 보냈다.

 

(중략)

 

시의 잘 짓고 못 짓는 것은 더디 짓고 빨리 짓거나 먼저 짓고 나중 짓는 데 달린 게 아니다. 그러나 창하는 이는 먼저 하고 여기에 화답하는 이는 항상 나중에 하므로 창하는 이는 여유 있고 한가해서 재촉받는 게 없으나 여기에 화답하는 사람은 억지로 끌려 어려운 데 빠지게 되는 것을 면치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남의 운을 이어받아 화답하는 것은 비록 이름 있는 재주라 해도 가끔 못 해내는 경우가 있으니 사리가 정말 그러할 만하다 하겠다.

 

읽기 2. 시 속의 그림

 

 

전에 내가 계양에 수령으로 가서 안렴사의 부를 받들고 용산에 이르러 상국 한언국의 서재에서 묵었다. 산봉우리들의 돌고 꾸불꾸불한 모양이 푸른 뱀이 서리고 있는 것 같은데 서재가 바로 그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강물은 그 밑에서 두 갈래로 나뉘었고 강 밖으로는 멀리 묏부리가 있어 바라보니 산(山)자 같았다.

나는 소리내어 읊조리며 일어서서 붓 가는대로 벽에다가 시를 써서 이르기를,

 

두 갈래 강물은 질펀히 흘러 제비꼬리 나뉜 것 같고 二水溶溶 分嚥尾

세 산은 아득아득 오두에 실린 듯하다 三山杳杳駕鰲頭

다른 해에 만약 구장을 뫼시도록 허락한다면 他年若許陪鳩杖

한 가지로 창파를 향하여 백구와 희롱하리로다 共向蒼波狎白鷗

 

하였다. 천수인 역락은 바로 한상국의 문생인데 상국을 뵙고 술을 하며 이 시를 외우니 상국이 잔을 멈추고 읊으며 말하기를,

"한양에서 노닌 지 이제 벌써 50년이나 되었지만 이 한 구절을 들으니 그 산광수색이 눈앞에 있는 듯 역력하다. 이것이 바로 옛날 사람들이 말하는 '시 속의 그림'이다." 하였다.

 

읽기 3. 오세재의 시

 

세상의 일 중에 빈부나 귀천으로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는 것은 오직 문장뿐이다. 대개 훌륭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을 곱게 하고 구름과 연기가 하늘에서 모이고 흩어지는 것 같아서 눈이 있는 사람이면 보지 않을 수 없고 가릴 수 없다. 그러므로 갈포를 입은 비천한 선비로도 넉넉히 무지개처럼 찬란한 빛을 드리울 수 있으며, 조맹의 귀함이야 그 세도가 나라를 부하게 하고 집안을 넉넉하게 하는 데 부족이 있으랴만 문장에 있어서는 칭찬할 바가 못 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문장은 그 자체로서 일정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부로써도 그 가치를 경감시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양영숙은 '후세에 정말 공정하지 못하다면 지금까지도 성현이 없었을 것이다'하였다.

복양 오세재는 재주가 넘치는 문사(文士)였으나, 여러 번 과거에 실패하였다. 그는 갑자기 눈병을 앓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늙음과 질병이 서로 따르니, 老與病相隨

마지막 나이의 가난한 선비로다. 窮年一布衣

현화는 밝음을 가리는 게 많고 玄華多掩映

자석은 비치는 게 적도다. 紫石少光輝

등 앞에 글자 보기 겁을 내고 怯照燈前字

눈 온 뒤에 달무리 보기 부끄럽도다 羞看雪後暉

금방이 끝남을 기다려 보다가 待看金榜罷

눈을 감고 앉아 기회를 잊는도다. 閉目坐忘機

 

세 번이나 장가를 들었으나 바로 버렸으므로, 자식이나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이 밥 한 그릇, 물 한 그릇도 이어갈 수 없었다. 나이 오십에야 과거에 한 번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동도에서 객지 생활을 하다가 죽었다. 이처럼 곤궁하게 살았지만, 어찌 그의 문장까지 버릴 수 있겠는가.

 

읽기 4. 과거 장원

 

세상에서 과거로써 선비를 뽑는 것을 숭상해서 한나라, 위나라에서부터 시작해서 육조를 거쳐 당나라, 송나라 때 와서 그 제도가 가장 번성했다. 본조(고려 왕조)에서도 역시 그 법을 좇아 삼 년마다 한 번씩 대비를 보여 수천 년간의 문장으로 청사에 오른 사람은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먼저 급제한 선비는 많으나 뒤에 대배(의정 벼슬을 임명받음)가 된 사람은 대단히 적었다.

대개 문장은 천성에서 얻어지는 것이나 작록(벼슬과 녹봉)은 사람이 소유하는 것이므로 순리대로 구한다면 쉽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세상의 만물에게 그 아름다운 것만을 독점하게살 수는 없었으므로 뿔이 있는 것에게는 이(齒)를 버리게 하고, 날개가 있으면 두 다리만 있게 했으며, 이름있는 꽃에게는 열매가 없고, 채색 구름은 흩어지기 쉽게 되었으니, 사람에게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다. 뛰어난 재예(才藝)를 주면 빛나는 공명은 주지 않게 되는 이치가 이렇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자 맹자 순자 양자로부터 한유 유종원 이백 두보에 이르는 분들은 비록 문장이나 덕예(德藝)로써는 넉넉히 천고에 치솟을 수 있을지라도 지위는 경상(卿相-재상)에 오르지 못했으니, 장원으로 높이 뽑히고 태형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실로 고인이 말하는 '양주가학(楊州駕鶴)'이라 하겠으니, 어찌 흔한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본조(고려 왕조)에서는 장원으로 재상이 된 사람이 열여덟 분인데, 이제 최홍윤, 금극의가 이어서 이미 승상에 이르렀고, 나와 시랑 김군수가 함께 고원에서 벼슬했으며, 그 외에 청와한 지위에 올라 있는 사람이 역시 열다섯 분이나 되니, 그 얼마나 많은가. 지금 임금님께서 즉위하신 지 육 년째 되던 기사년에 김공이 남주에 원으로 나갈 때 제공들의 회리에 모여 전송하니 세상에서 '용두회'라 하여 신선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바라보았다. 내가 시 한 편을 지어 기록해 두었다.

 

용이 날아 구오에 오르니 龍飛位九五

그 아래 뭇 용이 모이도다. 下有 龍聚

명월주를 삼켰다 뱉었다 하며 呑吐明月珠

청운 길에 올라 뛰도다 騰躍靑雲路

이미 이응의 문에 올랐으니, 旣登李 門

마땅히 은상의 비를 흠뻑 내려야 하리로다. 堂 殷相雨

다만 화흠의 머리를 귀히 여기니, 但貴華 頭

허리와 꼬리를 어찌 넉넉히 헤아리랴. 腰尾奚足數

 

시어가 비록 거칠고 보잘 것 없으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본조에서 많은 인재를 배출한 것이 비록 당우 시대라 할지라도 따를 수 없었음을 알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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