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과의 화해와 시대적 성찰
-이영도의 문학 세계
1. 이영도의 삶과 생애
정운(丁芸) 이영도(李永道)는 1916년 10월 22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당시 대성면 내호동) 259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경주이고 선산군수를 지낸 아버지 이종수와 어머니 구봉래 사이의 1남 2녀중(실제로는 3남 2녀였으나 장남과 3남이 일직 사망)은 막내로 태어났다. 아호는 초기 정향(丁香)으로 쓰다가 정운(丁芸)으로 고쳤다.
아버지가 지방 군수로 집을 자주 비웠지만 할아버지 이규현은 한학과 서화에 능하여 일찍부터 그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천자문과 소학을 배우는 한편 타고난 문재(文才)를 키웠다. 1924년 밀양보통학교에 입학하여 기차로 통학하는 한편 조부가 운영하는 의명학당에서의 공부도 계속하였다. 그의 여러 수필에 의하면 지나친 총명과 곧은 성격이 오히려 조부모의 염려를 사서 더 이상의 객지로 나가서 공부하는 대신 학당의 현창식 선생에게 사숙을 하였다.
이영도의 유년기는 급변하는 주변 상황들 가운데서도 특별한 데가 있었다. 증조할아버지는 망국의 한을 달래기 위해 승복으로 갈아입고 마을 뒷산에 대운암(大雲庵)이라는 암자를 지어 속세를 등졌다. 할아버지 또한 증조할아버지의 정신을 이어 농촌에 신학문을 가르치기 위하여 <의명학당>이라는 사학을 세워서 후진들을 가르쳤다. 할아버지는 이영도의 아버지를 의명학당 1회 졸업생으로 키웠으나 결국은 집안의 기대를 져버리고 일제의 협력자가 되고만 것이다.
부모를 모셔야하는 그의 어머니와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에 대한 실망과 원망으로 점철되었다. 상대적으로 조부모가 숭상한 불교와 전통적 가치관에 대한 믿음과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정을 키워준 시간이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어린 시절 이영도의 정신을 키운 자양분은 조부모였고 몸을 키운 요소는 어머니였다. 말하자면 아버지를 두고 옳고 그름에 대한 자신의 판단력을 저울질하였으니 운명치고는 유별난 운명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경성고등보통학교를 다니면서 문학적 재능을 키워온 이호우 시인이 오빠라는 점도 그를 보다 빨리 정신적으로 올곧게 성숙시킨 요인이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레 시조공부에 발을 들여놓았으나 한편으로는 중국 북경대학 유학의 꿈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대 상황이 날로 어수선해지자 조부모의 뜻을 따라 1935년 그는 그의 나이 20세에 대구의 부호인 밀양 박씨의 자제 박기주(朴基澍)와 결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신혼의 꿈도 잠시 1936년 10월 딸(박동지, 나중에 진아로 개명) 하나를 얻었으나 원래 병약한 남편의 병간호에 매달리다가 1945년 8월 남편과 사별하게 되었다. 그나마 해방이 남편을 잃은 청상과부라는 슬픔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결혼 전에 쓰다가 덮어두었던 시조노트를 꺼내 들었고 통영여자중학교(1945년 10월~1953년 5월)를 시작으로 부산 남성여자고등학교(1953년 5월~1954년 10월), 마산 성지여고(1954년 10월~1956년 9월) 등 교편생활을 하였다. 이 무렵 그는 딸아이의 양육을 언니(이남도)에게 맡겼다.
이영도는 통영여자중학교 수예선생님으로 부임하면서 그러나 또 한 번 생애의 커다란 전기를 맞이하게 된다. 청마 유치환 시인과의 만남이다. 마침 그 학교에는 유치환 외에도 작곡가 윤이상, 화가 전혁림, 시인 김춘수, 초정 김상옥 시인 등 유능한 예술가들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청마 유치환과의 인연은 장차 두 사람의 삶의 모습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청마의 일방적 애정 표현으로 시작된 사랑은 많은 안타까움과 우여곡절을 거듭하며 1967년 청마가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20여 년 간 변함없이 지속되어 서로의 문학세계 속에 온전히 스며들었다. 청마가 이영도에게 보낸 연서가 5,000통에 이르렀고 청마 사후 그 일부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서간집으로 묶어져 세간의 큰 반향을 불러왔다.
통영여자중학교에서의 이러한 분위기는 결국 이영도로 하여금 문학의 길로 접어들게 하여 1946년 5월 ≪죽순≫ 창간호에 「제야」를, 같은 해 8월 제2집에 「낙화」, 「춘소」를 발표하면서 등단하게 된다.
천성이 부지런하였던 터라 시조 쓰는 일에다 아이들 가르치는 일, 기숙사일마저 나서서 열정을 쏟다보니 자신을 추스르는 데 게을리 하여 그는 폐침윤 발병으로 1949년 5월 마산 결핵요양원에서 1년 간 요양을 하게 된다. 이즈음 그는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다. 1954년에는 심신이 지친 상태에서 변화를 꾀하던 중 당시 국어교사였던 초정 김상옥의 추천으로 부산 남성여고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리고 당호를 “수연정”이라 짓고 거기서 첫 시조집인 『청저집』을 준비하고 출간하여 시조문단의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그의 삶은 언제나 굴곡이 많았다. 1955년에는 폐침윤이 재발하여 요양을 겸하기 위해 다시 마산 성지여고로 임지를 옮겼고 이번엔 당호를 ‘닭이 운다’는 의미의 “계명암鷄鳴庵”이라 지어 불렀다. 2년여의 요양 끝에 건강상태가 좋아지자 다시 거처를 부산으로 옮겨 부산여대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부산일보>에도 고정적으로 집필을 하였다. 이 무렵 동래 온천장 부근에 주택을 마련하고 당호를 “애일당愛日堂”으로 지었으며 본격적인 “애일당”시대를 열어나갔다.
여기서 첫 수필집 『춘근집春芹集』을 발간하였고 수필가로서도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1964년에는 부산어린이회관(애성회관) 관장에 취임하였으며 ‘여성 교양문화 모임’인 “달무리회”를 창설하여 범부산시민운동으로 발전시켰다. 이 같은 사회전반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6년에는 ‘말없이 행동하는 문화인에게’ 수여한다는 취지의 눌원(訥園)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같은 해에 두 번째 수필집 『비둘기 내리는 뜨락』을 발간하는 등 절정의 문학활동을 펼쳤다.
이영도에게 이처럼 뜨거운 열정의 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1967년 2월 13일 밤, 부산시 좌천동 685번지 앞길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청마 유치환이 유명을 달리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 그의 슬픔과 충격이 얼마나 컸었는지는 그의 글을 통해서 보면 유추가 가능하다. 그는 수필 「유성」에서 “일찌기 나는 사랑하는 이와 더불어 흐르는 별똥을 향해 아픈 기원을 나누어 왔다. 우리들의 목숨이 같은 날, 같은 시각에 죽어서 멀고도 창창한 영겁의 길을 동반할 수 있기를 빌었던 것이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죽음으로본의 아닌 배신을 그는 저질렀고 남은 나는 함께 우러르던 그 날의 성좌를 버릇처럼 우러러 섰다”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물론 그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죽음은 청마 외에도 사별한 남편이 있지만 청마가 1959년 이영도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를 보면 ‘우리’란 분명 이들 두 사람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죽음의 길을 가는 날에는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당신과 함께 떠납시다. 이것만은, 이 한恨만은 서로 풀도록 기약합시다. 그렇지도 못한다면 영혼도 눈감을 수 없는 애달픔인 것입니다.”
그리고 청마가 남긴 편지들 가운데 일부를 간추려 청마 서간집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를 발간하였다. 그는 청마가 떠난 부산에 남아 있기가 힘들어서였을까 그 해 9월 서울시 마포구 하수동 95번지로 이사를 단행하였다. 1968년에는 오빠 이호우와 함께 공동 시조집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이호우 분-휴화산, 이영도 분-석류)를 발간하였고 1969년에는 청마 서간집의 인세를 기본으로 그의 아호를 딴 정운(丁芸)문학상이 제정되어 시상하였다. 같은 해 딸(박진아)이 철학자 김이준과 결혼하여 함께 살게 되었다.
1970년에는 이영도 시조의 또 하나의 커다란 기둥이었던 오빠 이호우의 갑작스러운 작고로 크게 상심하였고 1971년에는 수필집 『머나먼 사념의 길목』을, 1975년에는 수필선집 『애정은 기도처럼』을 간행하였으며 1974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에서 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한편 이 무렵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과 여류 문학인회 부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나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업적은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재능 있는 시조시인들을 지도하여 문단에 등단시킨 일일 것이다.
그는 평생토록 몸과 마음이 건강하지 못했다. 일찍이 고생한 폐침윤이 아니더라도 고혈압에 시달려야 했고 두 번씩이나 유서를 써둔 채 조마조마하게 삶을 달래며 살아왔으나 끝내 1976년 3월 6일 12시 5분 뇌일혈로 운명을 달리했다. 3월 8일 이은상 시인을 장례위원장으로 문인장을 치른 뒤 화장을 거쳐 3월 9일 경남 밀양시 상동면 고정리 산 314번지 고향 앞산자락, 친정의 선영에 묻혔다.
2. 시 세계
시인은 시를 통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이영도의 경우 시조 외적인 삶의 차별성으로 인해 시조에서 거둔 성과가 상대적으로 축소된 면이 없지 않다. 시조라는 형식질서 안에서 전통의 정서를 수용하고 퇴고를 거듭하여 가장 한국적인 정신과 민족시의 외형을 일체화시키고자한 그의 필생의 노력이 문학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서 훼손된다는 것은 지극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될 부분이다.
지금까지 적잖은 이들이 이영도 시인의 시를 연구하고 해석한 사례들을 발표해 왔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 또한 거의 대부분이 밝혀져 있다. 생전에 발간한 『청저집』(1954년, 문예사 간), 『석류』(1968년, 오누이시조집, 중앙출판공사 간), 유고집으로 간행된 『언약』(1976년, 중앙출판공사 간)에 그의 모든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외에 작고 이후의 선집으로 『너는 저만치 가고』(2000년,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 12, 태학시 간)가 있고 이영도시조전집으로 『보리고개』(2006년, 이영도 30주기기념문집, 목언예원 간)에 모든 작품들이 망라되어 있다. 특히 시조전집에는 개작의 추이와 발표작품의 전체 목록이 게재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시조선집『외따로 열고』(2013년<한국대표명시선 100>, 시인생각), 오빠 이호우와 함께 오누이의 시정신을 기려온 <이호우, 이영도문학기념회>가 발간한 육필시조집 『석류』(2016, 국제시조협회), 『아지랑이-陽炎』(2016년, 이영도 40주기 기념 중국어 번역 시조집, 목언예원) 등 여러 권이 있다.
1) 일생을 관류한 그리움
이영도 시의 미학은 삶 속에서 조우하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은 인간의 내면에 깔린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정서이다. 누구라도 이 그리움을 독점할 수 없고 누구라도 이 테제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자리 매김은 판이하다. 긍정과 부정을 동시에 지녔으되 선택과 의미부여에 따라서 상승작용과 하강작용을 부추기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이영도에게 그리움은 대체적으로 한(恨)으로 인도되고 다시 그 한을 극복하는 수단으로도 원용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고 상승적인 측면이 크다. 그리움을 통하여 자기 중심의 감상주의에 빠지는 대신 끊임없이 바깥세상과의 화해를 시도하는 동기재생의 발판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①고결한 인간애, 혹은 그 향수
이영도 시의 처녀작은 1945년 12월에 쓴「제야」이다. 그 시기는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된 그가 다시 처녀시절의 습작노트를 끄집어내어 본격적으로 시조공부를 시작한 때였다. 당시의 정황으로만 보면 개인적 슬픔에서 쉽게 벗어나기 힘든 시기였음에도 맨 먼저 다가선 곳이 고향이었다는 점이 눈에 띄는 대목이다.
“아득히 그리워라 내 고향 그 모습이/ 새로 바른 등에 참기름 불을 켜고/ 제상에 제물을 두고 밤새기를 기다리나.”(「제야」 네 수 가운데 둘째 수) 결혼을 하면서 고향을 떠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첫 시가 고향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는 것은 그의 정신에 뿌리내린 고향의 의미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겠다.
고향의 여러 모습들 가운데서도 이영도에게 가장 큰 그리움의 대상은 역시 어머니였다.
우러르면 내 어머님/ 눈물 고이신 눈매//
얼굴을 묻고/ 아, 우주(宇宙)이던 가슴//
그 자락/ 학(鶴)같이 여시고, 이 밤/ 너울너울 아지랭이
-「달무리」 전문 (『언약』, 1976. 10)
그에게 어머니는 그리움이자 동시에 마음의 빚이었다. 이 땅의 모든 어머니가 다르지 않겠지만 그 이름만으로도 눈물나게 하고 가까이 다가서면 세상의 모든 절망이 일시에 멈춰지는 넓은 대지이자 끝없는 우주 그 자체이다.
이 시는 전체 글자 수가 46자밖에 안 되는 단시조의 그릇이지만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큰 내면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초장에서는 어린 시절의 기억 가운데 지워지지 않는 달무리가 등장한다. 대기 중의 빙점에 의해 빛이 굴절되거나 반사하여 나타나는 자연현상의 하나이지만 그 달무리의 기억 속에는 아버지를 기다리며 뜨개질로 시간을 보내는 어머니의 모습이 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니 삼종지덕(三從之德)이니 하면서 언제나 자숙하고 인내하기를 강요받아온 우리네 어머니들의 모습은 항상 눈물에 젖지 않았던가.
중장에는 아픔을 묻으려고 서로의 품속으로 파고들던 한 영상이 애잔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그 아픔도, 아픔을 어루만져 준 시간들도 다 사라지고 덩그러니 기억만이 남았다. 종장에서는 추억도, 그 추억을 떠올리게 한 시간들도 모두 벗어나 만남과 헤어짐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질서만이 남은 것이다. 어머니에 대한 사모의 마음도 함께 시공을 초월한 것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이면서도 우리네 보편적인 정서를 잘 조화시킨 작품이다.
「달무리」와 관련한 어머니에의 연민은 그의 수필을 보면 얼마나 사무치는 그리움인지 이해할 수가 있을 것이다.
“바람둥이 남편은 떠도는 구름일 뿐 층층 시하에 고달팠던 하루가 저물면 어리광으로 기댈 애정 하나 없는 외롭고 허전한 정한(情恨)을 오직 바늘 끝에 맡겨 푸시다가, 밤 깊어 자리에 들면 막내둥이 저의 어깨를 어루만지시며 속으로 내어 뱉던 핏빛 한숨, 그 물기 어린 눈매가 오늘 밤 허공에 높이 후광처럼 저의 서정을 윤색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다시없을 높고 향그러운 이름, 어머니!” (『머나먼 사념의 길목』 가운데 「어머님께」 부분)
한 편 그런 그도 또한 한 딸아이의 어머니였다. 오직 한 사람뿐인 혈육을 키우면서 이번에는 어머니로서의 진한 애정을 작품으로 형상화하였다.
아이는 글을 읽고/ 나는 수를 놓고//
심지 돋우고/ 이마를 맞대이면//
어둠도/ 고운 애정에/ 삼가는 듯 둘렸다.
-「단란」 전문 (『청저집』, 『석류』에 재수록)
이 작품은 그의 초기작품으로 1954년에 발간한 『청저집』에 실려 있다. 그럼에도 이 시에서는 「제야」에서 보였던 관념적인 시어나 의고조의 전개가 사라지고 새로운 생활시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시적 공간으로 보면 호롱불을 켜둔 작은 방에서 동화책을 읽는 딸아이 옆에서 수를 뜨고 있는 이영도 자신의 스냅사진이다. 시기적으로는 겨우 초등학교 1, 2학년이었을 딸아이를 바라보는 엄마의 사랑이 진솔하게 나타나 있다. 앞서 읽은 작품에서 보여준 어머니에 대한 사모가 그랬듯이 딸아이에 대한 애정 또한 얼마나 절절한 것인가를 느끼게 해 준다.
②고독과의 화해
언제나 한 점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는 단아한 외모를 가꾸었고 다정다감한 성품이었던 만큼 그를 스쳐간 세월은 언제나 적지 않은 상처를 남기기 마련이었다. 끝끝내 떨쳐내지 못한 그 깊은 상처의 이름이 바로 고독이었다. 그 자신도 이미 수필 「봄의 서곡」에서 “의롭고 슬기로움이 항상 고독을 동반하기 마련이듯, 가장 아름다운 것일수록 크낙한 슬픔의 밑받침을 입고 있는 것”이라고 규명한 바 있다.
하지만 그 치명적 고독을 대하는 자세는 보편성과 상투성을 벗어나 독자적인 처방을 지니고 있었다. 고독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이기보다는 화해하고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한다는 점에서 보다 다양한 양태의 심상을 작품 속에 남겨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어루만지듯/ 당신/ 숨결/ 이마에 다사하면//
내 사랑은 아지랑이/ 춘삼월(春三月) 아지랑이//
장다리
노오란 텃밭에
나비
나비
나비
나비
-「아지랑이」전문 - (『석류』, 1968)
이 시는 이영도의 전성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그러나 발표 당시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다. 우선은 형식질서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고도 자유시 이상으로 자유로운 배행에 주목하였고 나아가서는 자유시의 전유물처럼 여겨지던 회화성을 도입하여 마치 한 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공간구조를 시연하여 시각화에 성공하였다는 점이 그랬다.
행간에 나타난 ‘당신/ 숨결’이나 ‘내 사랑’과 같은 시어만으로 좁게 해석하면 이 시는 개인적인 사랑의 체험에서 오는 감사나 그 사랑을 이루게 해준 자연에 대한 고마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영도가 지칭하는 ‘당신 숨결’은 만물이 소생할 수 있도록 따스한 온기를 뿜어주는 신(神)의 섭리라는 해석이 타당하다. 신의 은총 위에 힘겨웠던 겨울이 가고 맞이한 봄,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기만 하는 ‘내 사랑’을 탓하기보다는 아른거리는 ‘아지랑이’의 시간에 뒤따라오게 될 운명으로 눈을 돌린다.
반면에 자신의 실체적인 그리움의 정서를 진솔하게 노래하여 공감대를 넓히고 주목을 받은 작품들도 많다.
①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
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
실실이/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②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
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
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
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
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다가//
그래도/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①은 「비」 전문이고 ②는 「무제 1」 전문이다. 두 편 모두 『청저집』에 실린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 시에 해당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겪어야하는 개인적인 사모의 심사치고는 너무나 애잔할 정도로 소극적으로 묘사된 작품들이다. 어쩌면 위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우리네 전통방식의 그리움과 정서가 닿아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연민의 정을 배가시킨다.
「비」의 경우, 비가 내리는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진솔하고 정갈하게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이다. 시적 화자인 나와 하나가 된 비가 들려주는 사연을 듣고 있노라면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기다리는 마음이야 안타깝지만 그러나 기약할 수는 없지만 그 날이 있기 때문이다. 나직이 내리는 빗소리에서도 영성을 읽어내는, 이영도다운 사모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 준다.
「무제 1」 역시 실체적 체험 안에서 얻은 심경의 변화가 마치 동영상을 보듯 잘 묘사되어 있다. 가장 큰 감동의 요인은 체험에서 오는 솔직함이라 했던가. 그리워하고 함께 하고자하는 본성적인 감정은 신이 생명체에게 준 고귀한 선물이다.
2) 시대에 대한 진단, 혹은 역사적 고발
이영도 시의 출발은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주변 환경을 돌아보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의 초기 시 10편을 발표순서대로 적어보면 「제야」,「낙화」,「춘소」,「먼 생각」,「맥령」,「병고」,「먼 등불」,「제승당」,「세병관」,「노을」등인데 대체로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 매김에 다름이 아니다. 그 같은 접근은 바람직한 자기규명의 한 방법이겠지만 이영도의 시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보다 근원적인 문제이거나 사회상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 된다.
너는 내 목숨의 불씨/ 여밀수록 맺히는 아픔//
연련히 타는 정은/ 연등(煙燈)으로 밝혀 들고//
점점이/ 봄을 흔들며/ 이 강산을 사루는가
-「진달래 -조국에 부치는 시」 3수중 첫 수 (『언약』, 1976 )
4․19를 노래한 또 다른 「진달래」와 달리 이 시는 남북 분단의 조국현실이 지닌 아픔을 노래하고 있다. 봄이면 이 강산 어느 산에나 흔하게 피는 진달래를 ‘연등’으로 환치하여 시적 화자가 갈구하는 평화와 통일의 세계를 꿈꾼다. 비록 지금은 “여밀수록” “아픔”만 맺히는 현실이지만 마치 약손처럼, 등불처럼 남북을 동시에 쓰다듬고 지나가는 ‘진달래’는 “세월이 어두울수록/ 밝혀/ 뜨는 언약”이 아니겠는가. 여기서 ‘진달래’는 재생과 환생의 이미지를 지닌 연등과 하나됨으로써 조국에 대한 시인의 깊은 발원(發願)을 나타내고 있다.
눈에 포탄을 박고 머리는 맷자국에 찢겨
남루히 버림받은 조국의 어린 넋이
그 모습 슬픈 호소인 양 겨레 앞에 보였도다.
이 작품은 ‘-고 김주열군에게’라는 부제가 붙은 「애가哀歌」 3수중 첫 수이고 ④는 ‘-사월 탑앞에서’라는 부제가 붙은 「천계天啓」 전문이다. 이름을 가리고 이들 시를 보면 이영도의 작품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뭇 격정적이고 피를 뜨겁게 한다. 작품을 쓴 시차가 크지만 분명하고 단호하다.
「애가」는 3․15 마산의거 때 경찰에 의해 희생당한 김주열의 죽음을 애도한 작품이다. 김주열은 1960년 당시 마산상업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그 해 마산에서 3․15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학생시위에 참가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는데 약 한 달 뒤인 4월 10일, 최루탄 파편이 머리에 박힌 채 마산 앞 바다에 시체로 떠오른 것이다. 이에 격분한 학생들의 분노가 전국적으로 확산됨에 따라 4․19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다. 조국의 민주화과정에서 꽃다운 목숨을 잃게 된 안타까움과 정부의 폭압에 대한 질정(叱正)을 나타낸 작품이다.
3. 문학적 성과
어떤 면에서 이영도는 문학적 성과 면에서 상당부분 객관성을 침해당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그의 시조가 확보한 시대사적 성과나 준열한 시정신의 우월성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영도가 지닌 삶의 차별성으로 인해 정당한 평가를 제약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에 ‘나는 감히 단언한다. 우리 고시조에 황진이가 있다면 현대시조에 이영도가 있다고’(김동준, 『시조문학론』) 문학 외적인 삶에 초점이 맞춰지거나 ‘이영도는 정한(情恨)의 시인으로, 그의 오라버니 이호우가 절벽처럼 버티어선 거부(拒否)의 시인이었다면, 그는 어스름에 타는 목련처럼 한향(寒香) 속에 젖어 있는 시인이었다’ (정완영, ≪한국문학≫ 1976년 5월. 정운 추모특집에서)는 식의 가족과도 비교되곤 하였다.
황진이와 비교되거나 이호우의 영향을 거론한다고 해서 결코 이영도 시가 평가절하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선입관으로 인해 독자적 가치가 훼손당할 개연성은 항상 열려있다는 점이다.
이영도 문학의 성과는 우선 생활 속에서 찾은 전통적 민족정서를 시로 승화시켰다는 점이고 다음은 개인적 정한의 정서를 보편적 시어로 환치시킴으로써 시조의 현대화에 기여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시대와 시대의식에 대한 간단없는 진단으로 시조의 영역을 획기적으로 확장시킨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예의 그 감성비평에서 벗어나 앞으로는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져 민족문학의 위상을 제고하고 시조문학의 방향성을 열어나가는 자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영도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는 비교적 이원화되어왔고 앞으로도 다양할 것이다. 다만 여기서는 그에 대한 몇몇 기억들을 통하여 이해를 돕는 잣대로 삼고자 한다.
이은상 시인은 "이영도는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다정다감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맑고, 고요하고, 격조 높은 시를 쓰고, 시를 이야기하고, 또 시를 생활화하고 간 여인이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참모습을 전해주는 가장 적절한 말"(이영도 시조집, 『언약』 책머리에, 중앙출판공사, 1976.)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두동 시인은 “정운은 고독이란 불행 때문에 오히려 그 고독을 인고하고 극복하고 승화시켜 남달리 피나는 정한의 시를 많이 남겼다. 역경이 오히려 값어치 있는 생활을 안겨다준 셈이다”(이영도 추모특집 <청초와 재화의 여인상>에서, 《한국문학》 1976년 5월호)라고 회고하였다.
소설가 이주홍의 표현을 빌리면 “‘마지막으로 남았다가 간 조선 여인’. 이렇게 말하면 정운 이영도 시인의 모습을 얼마쯤 그려진 것이 될까? 그 새첩한 자태와 그 깔끔한 성격이 아무래도 현대인 속에서는 만나기가 어려운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이주홍의 수필 <정운생각>에서, ≪죽순≫ 1979년호)라고 기억하고 있다.
지금까지 이영도의 삶과 시력을 일별해 보았다. 언제나 한복차림으로 한국적 전통과 문명 비판적 가치관을 함께 아우르며 작품 속에 낱낱이 배태시켜온 그의 삶은 시보다 더 시적이었고 시인보다 더 시인적이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삶이 지닌 개별성으로 인해 지금까지 그의 시조는 객관적 평가의 공정성을 침해받아왔다. 이를테면 그의 시조가 거둔 성과, 즉 정형시 형식질서를 가장 현대적으로 승화시킨 점이나 동서 문화의 대립양상 속에서 한국적인 정신의 가치를 지향한 점과 시대의 아픔을 역사적인 관점에서 성찰한 점은 이제 그의 삶과 분리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이영도의 시정신이 새로운 시조의 미래를 향한 눈부신 길라잡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민병도
경북 청도 출생. 197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조집 『장국밥』, 『들풀』 등 30권. 문학평론집 『비정형의 정형화』 등 5권. 수필집 『강물은 자신을 밟고 길을 낸다』 등 3권. 한국화 개인전 32회. 중앙시조대상, 가람문학상, 한국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한국문협 시조분과회장,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대구지회장 역임.
현재, 계간 《시조21》 발행인, (사)국제시조협회 이사장, 이호우·이영도문학기념회 회장, 들풀시조문학관 관장. Email//mbdo@dau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