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착각 / 양희용
자신이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여자가 의외로 많다. 시내에 나가보면 눈에 보이는 여성들은 모두 늘씬하고 예쁘다. 나를 보고 눈웃음을 띠며 지나가는 것 같기도 하다. 노화된 나의 두뇌는 그것이 허황한 망상이라기보다는 그럴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다. 남몰래 얼토당토않은 상상을 하면서 즐겁게 거리를 활보하는 행동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자유다. 세상이 아름답게 보이고 외출하는 내내 기분도 좋다.
인간의 지각知覺은 감각기관을 통해 대상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지각의 착오로 일어나는 현상은 착각錯覺과 환각幻覺으로 구분한다. 착각은 어떤 사물이나 사실을 실제와 다르게 인식하는 것이고, 환각은 외부에 어떤 사물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 현상을 말한다. 망상妄想은 실현될 가능성이 없는 막연한 공상이라는 점에서 환각과 구별된다.
여자보다 남자들이 착각을 많이 한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던 중, 비어 있는 옆자리에 여자가 앉았다. 빈자리가 있으니 당연히 앉았다고 생각하면 지각, 내가 좋아서 옆에 앉았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출근하는 남자들은 아침에 샤워를 끝내고 거울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낀다. '이 정도면 됐어. 너무 잘 생기면 여자들이 부담스러워해.'라는 생각을 한다. 즐거운 착각을 하면서 산뜻한 하루를 출발한다. 그 기분이 종일 이어지지는 않는다. 퇴근 후, 소주잔을 들이키며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는다.
착각을 잘하는 남자들은 상상력도 풍부하다. 직장동료 여성이 밥을 같이 먹자거나 사달라고 제안하면 남자들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이 여자는 나를 좋아한다. 밥을 같이 먹고 싶은 동반자. 책임과 신뢰, 사랑과 여행.' 등의 다양한 상상을 한다. 겉으로는 못 이기는 척 동의하면서 속으로는 쾌재를 부른다. 사실 여자는 사람이 많은 식당에 혼자 가기가 어색하고 민망해서 가볍게 부탁했을 뿐이다.
남자들은 결혼하고 50대 중년이 돼서도, 어쩌면 죽을 때까지 착각하면서 살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일부 남자 중에는 아내를 낮잡아 보고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자신은 더 좋은 여자와 결혼할 수 있었는데 결혼을 너무 서둘러 평범한 여자와 결혼했다면서 아쉬워하거나, 아내가 가정에 헌신하는 이유는 자기처럼 잘나고 능력 있는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더군다나 자신은 나이가 들수록 중후한 매력이 넘치기 때문에 아내와 이혼해도 더 젊은 여자와 재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친다. 이런 남자의 거만한 착각 때문에 가정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 아내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피로감을 느낀다.
남자들이 착각을 많이 하는 이유는 여자의 모성애와 질투심, 그리고 '스칼렛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심리학자도 있다. 연약해 보이는 남성에게 특별한 친절을 베푸는 자상한 여자의 모성애에 남자들은 쉽게 감동한다. 그냥 알고 지내던 남자가 주변의 평범한 여성과 가깝게 지내는 걸 인지한 여자가 갑자기 질투심에 사로잡혀 적극적인 관심을 표출하면 남자들은 금방 넘어간다.
'스칼렛 콤플렉스'는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여주인공, 스칼렛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진 용어다. 한마디로 주변의 남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여자가 되고 싶은 심리를 말한다. 이 콤플렉스를 가진 여자들은 알고 있는 모든 남자에게 호의를 베풀고 선물까지 주면서 자신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기를 바란다. 여기에 어리석은 남자들은 그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여자는 인기 연예인처럼 팬 관리 차원에서 약간의 호감을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남녀가 만나면 상대의 외모와 성격, 능력과 학벌, 직업과 집안, 친절과 미소 중에서 몇 가지 요소에 매력을 느껴 서로 사귀게 된다. 자주 만나다 보면 눈에 콩깍지가 씌어 결혼까지 골인한다. 콩깍지는 착각이다. '상대를 좋아했던 이유가 시간이 지나면 헤어지는 이유가 된다.'는 말이 있다. 원앙처럼은 아니더라도 서로 등을 돌리고 앙숙처럼 지내며 결혼을 후회하는 일이 없으면 좋으련만…. 남녀 간의 만남은 감성보다는 이성으로 판단하고 좀 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도 남자이기 때문에 이성적 판단이 부족할 때가 있다. 학교에 근무하면서 동료 여선생들은 나를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출근하면 여선생들은 나에게 커피와 먹을 것을 챙겨주고, 일을 잘한다는 칭찬도 아끼지 않았다. 나도 여선생들의 힘든 업무를 도와주고 컴퓨터도 친절하게 가르쳐주며 나름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많이 했다. 그것은 서로를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고 직장동료로서 마땅히 지켜나가야 할 도리라는 것을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깨달았다. 이해가 상반되는 문제가 생기면 여자 동료들은 털끝만큼의 양보도 없었고, 항상 내가 양보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몇 년 전, 평생교육원에서 '미술 감상'과 관련된 프로그램을 수강했다. 스무 명 정도 되는 남녀 수강생의 나이가 비슷해 분위기가 좋았다. 나에게 친절을 베푸는 미모의 여자가 있었다. 필기구와 인쇄물, 주차권, 심지어 간식거리까지 챙겨준다. 가끔은 카톡이나 문자로 안부를 묻기도 한다. 별도의 모임 자리에서 내가 앉은 테이블에 그녀가 합석하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가슴 한편에 숨어있던 착각 증세가 다시 살아났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닌 지각이라고 착각했다.
얼마 후, 친절한 여인에게 좋은 곳에서 함께 식사하자는 문자를 보냈다. '요즘 바빠서, 다음에…'라는 답장을 받았다. 머리를 싸매고 생각해 보았다. '바빠서'의 의미는 관심이 없다는 말이다. 성격이 원만하고 붙임성이 좋은 여자 동료다. 나에게만 친절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한다. 여자가 의례적으로 보여준 조그만 호의에 반색하며 이기주의적 착각을 했다. 이성의 힘을 빌려 착각을 치료하는 중이지만 완치는 힘들 것 같다. 본능과 성격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인간은 합리적으로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성의 독재에 짓눌린 채 살아간다. 착각은 그 독재로부터 우리를 벗어나게 해주려는 탈출구 역할을 한다. 이성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가끔 행복한 착각에 빠지면 삶의 새로운 활력소를 찾을 수도 있다.